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57화 (357/510)
  • 00357 외교전의 걸작  =========================================================================

    *  *  *

    나는 입을 떡 벌렸다.

    “크고 아름답다…….”

    눈앞에는 문자 그대로 산더미처럼 쌓인 금화와 보석.

    여섯 명의 마왕과 열한 명의 마계대공이 수백 년이 넘도록 축적한 재물이 한자리에 모였다. 반역자들에게 수금한 재화는 황궁의 창고 일곱 곳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으하하하, 단탈리안! 이거 봐라! 금이 쓰레기 같아!”

    바르바토스는 한창 신나서 금화에 파묻혀서 꺄르르 웃었다.

    얘가 금화더미를 보자마자 정신줄을 놓더니 옷을 홀라당 벗고 뛰어들었다. 내가 식겁해서 말리려고 하니까 옛날부터 꼭 한 번쯤 이런 짓거리를 해보고 싶었다며 막무가내였다. 아니, 그 심정은 이해한다마는……섭정 전하. 체면을 좀 차리시죠. 하긴 바르바토스에게 체면 따위 무리인가. 차라리 개한테 교양을 바라는 편이 낫겠지.

    내 옆에서는 이바르가 냉정하게 서류를 읽어나갔다.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경화(硬貨)와 보석만 구천만 골드에 육박합니다.”

    “구, 구천만 골드…….”

    머릿속이 띵했다.

    나의 재산이 대략 리브라 금화로 환산해서 삼백만 골드가 남았다. 참고로 명실상부 마계 최대 재벌, 지금은 어째서인지 외눈 안경을 쓴 채 서류를 읽고 있는 이바르 로드브로크, 이 아이 전재산이 현물자산까지 통틀어서 오천만 골드였다.

    “대부분이 대공들의 재산입니다. 무소속 마왕들은 의외로 가난하더군요.”

    “저기. 가난하다는 게 어느 정도입니까……?”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왠지 모르게 존댓말이 튀어나갔다. 아마도 내가 인간이었던 시절 영혼까지 각인된 거지근성 때문이겠지.

    이바르가 외알 안경을 쓰윽 고쳐 썼다.

    “기껏해야 여섯 명 전부 합쳐 천만 골드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흐음, 청빈한 삶을 살았다는 것일까요. 개인의 인격과 실력은 별개라더니 이번 경우에는 확실히 그렇습니다.”

    “처, 청빈……천만 골드가 청빈…….”

    이것이 부르주아 중에서도 부르주아로 군림하는 자의 금전 감각.

    설마 이바르가 보기에 나 정도 되는 자산가도 시골에 짱박혀 청빈낙도하는 선비 수준으로 비추는 것일까. 이바르 로드브로크,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소녀인가…….

    태생이 프롤레타리아인 내가 옆에서 덜덜 떨고 있자니, 이바르가 싸늘하게 비웃었다.

    “마왕보다 오히려 대공들이 월등하게 많은 재산을 축적했습니다. 결국 세상에 마왕이 없었다 해도 절대다수의 마족들은 지배자에게 착취당하기 마련이었겠지요. 마왕인가 아닌가 하는 차이만 있을 뿐. 그리 달라지는 점은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장본인이 이바르여서야,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마계대공 열한 명을 족쳐서 뜯어낸 금액이 구천만 골드라서 상당히 아득하긴 한데, 달리 생각해보면 이바르가 지닌 전재산의 두 배가 안 되었다. 마왕 여섯 명과 마계대공 열한 명 = 이바르 두 명, 이라는 등식이 간단하게 성립했다.

    요컨대 재벌이 벼락부자를 비웃는 셈이었다. 새삼스레 이바르의 무시무시함이 느껴졌다. 내 여자라서 참 다행이지.

    나는 허리를 굽혀 금화를 만지작거렸다.

    “이중에서 오백만 골드는 대공들한테 선물로 뿌릴 거야. 따로 분류해둬.”

    “대공들한테……그렇군요. 위로금으로 하사하실 생각입니까?”

    “반역자 혐의에 심장이 덜컹했을 것 아니냐.”

    내가 작게 웃었다.

    이번 숙청에 마계대공들은 잔뜩 긴장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마계에 돌아가자마자 자기들끼리 몰래 모여서 향후 대책을 마련하자며 회합을 열겠지. 그 회합에서 엉뚱한 짓을 벌이지 않도록 약간의 기름칠을 해줄 필요가 있었다.

    “나는 자상한 마왕이니까 말이야. 모쪼록 몸관리에 신경을 쓰라고 배려심을 보여줘야지.”

    “알겠습니다.”

    “삼천만 골드도 언제든지 쓸 수 있게 따로 모아둬.”

    이바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거금은 어디에 쓰실 계획인지 소인이 여쭈어도 괜찮을까요?”

    “삶을 살아가면서 삼천만 개의 금화를 쓸 일이 몇 개나 있겠나.”

    허리를 폈다.

    한 웅큼 쥐어든 금화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금속과 금속이 둔탁하게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금화들이 굴렀다.

    “군자금이다, 이바르. 내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하여 전쟁을 벌이도록 하지.”

    *  *  *

    나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이름을 내걸고 사절단을 보냈다.

    목적지는 사르데냐 왕국. 아직도 대세를 거스르고 합스부르크 공화국을 대대적으로 지원하는 국가였다. 엘리자베트에게 행여라도 전쟁을 일으킬 힘을 허락하지 않으려면 사르데냐의 지원을 끊어야만 했다.

    문제는 명분이었다. 무슨 명분으로 사르데냐 왕국을 협박할 것인가.

    여기서 나는 매우 인간적인 주제를 카드로 꺼내들었다.

    사절단이 나의 서신을 전달하자 저쪽은 난리가 벌어졌다. 사르데냐 왕실에서 고르고 고른 사신이 곧장 텔레포트를 이용해서 합스부르크 황궁으로 찾아왔다. 사신은 맹렬하게 항의했다.

    “궁중백. 이건 말도 안 되오. 명백한 내정간섭이외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아국은 귀국에 정당한 요구를 할 뿐입니다. 이것은 국경을 뛰어넘어 보편타당하게 이루어져야 할 정당함에 불과하지요.”

    “진즉에 배신자로 낙인 찍혀 멸문한 가문을 어찌 복권시킨다는 말이외까……!”

    사신은 멋들어지게 기른 수염이 분노로 바들바들 떨렸다.

    내가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탁자에 잔을 내려놓았다.

    “파르네세 가문은 결코 배신자의 무리가 아닙니다. 파르네세는 한번 잃어버린 명예를 다시 되찾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 제국의 총의입니다, 후작.”

    그렇다.

    라우라의 가문인 파르네세는 이른바 국화전쟁이라고 불리는 내전에 의해 몰락했다. 이 내전은 왕국이 절반으로 나뉘어 치고박고 싸웠다기보다, 귀족들이 절반으로 갈라져 자기네의 권력을 수호하기 위해 싸운 것이었다.

    복잡하게 얘기하자면 왕족의 직계 혈통을 국왕으로 내세울 것인가, 방계 혈통을 국왕으로 내세울 것인가, 하는 사정이 숨어 있다. 그렇지만 귀족사회의 지난한 왕권 다툼은 언급할 필요가 없겠지.

    중요한 것은 파르네세 가문이 직계 혈통을 옹호했으며 이로 인해 패망했다는 것.

    파르네세 공작가는 상대 파벌을 반역자라 비난하며 최전선에서 맞서 싸웠다. 당연히 상대편에서 보자면 파르네세 가문이 반역도당이었다.

    파르네세 가문을 싸그리 멸문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제2계승권자였던 라우라를 노예로 만들어버린 것만 봐도, 이 내전이 얼마나 서로 간에 깊은 원한을 안겨주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귀족이 같은 귀족을 노예로 전락시키는 경우는 정말 희귀했다.

    “궁중백. 우리 솔직하게 말합시다.”

    사신으로 파견온 로디 후작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후작은 제국에서 변경백에 해당하니 나보다 위상이 높았지만, 사르데냐 왕국에서는 힘 깨나 쓴다는 남작이라면 너도 나도 후작을 자칭했다. 국화전쟁에서 귀족의 절반이 비명횡사하자 그런 경향은 더욱 강해졌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격식을 덜 차리고 있었다.

    “제 귀는 언제나 현자에게 열려 있습니다, 후작.”

    “파르네세 가문은 아국의 국왕 전하께 정당한 계승권이 있음을 부정했소. 파르네세를 복권시킴은 자칫 국왕 전하의 정당성을 위협할 수 있소. 아니, 명백한 위협이오……!”

    내가 눈빛을 차갑게 했다.

    “귀국의 사정은 이해하지만 우리도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후작.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황제 폐하의 대리장군입니다. 합스부르크 제국군의 총지휘권이 그녀에게 달려 있습니다.”

    “…….”

    “지금 귀국에서는 아국의 대장군을 감히 반역자의 후손이라 매도할 생각입니까?”

    후작이 이마를 비단 손수건으로 닦았다. 머리가 반쯤 뒤로 벗겨진 후작은 척 보기에도 몸에 열이 많았다.

    “그럴 리가 있겠소! 궁중백! 황제 폐하의 명예가 달린 문제라는 것은 알겠으나 이쪽도 국왕 전하의 명예, 더 나아가 왕실 전체의 안위가 걸렸다는 사실을 알아주셔야만 하오.”

    “후작.”

    내가 후작을 향해서 허리를 굽혔다. 우리 두 사람의 얼굴이 지척에 놓였다.

    “이건 매우 간단하면서도 명료한 문제입니다. 아국의 명예인가. 귀국의 명예인가. 어느 한쪽이 양보하지 않는다면 양보를 받아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후작이 다시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그곳에는 이미 사생결단의 각오를 끝마친 눈빛이 침침하지만 뚜렷하게 서려 있었다.

    “이 사람은 어리석어 사람의 귀를 사로잡을 연금술사의 언어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가 없소. 그러니 궁중백이 말씀해주시오. 우리가 '최종적인 권고'를 회피하려면 어떤 배려가 필요하오?”

    “약간의 배려가 필요하지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후작. 공식적인 타협이 불가능하다면 비공식적인 타협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그 점을 염려해주면 고맙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나누는 대화는 여신들께서도 엿듣지 못하실 거요.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귀가 빠른 양반은 언제나 환영할 만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에 대한 원조를 끊으십시오.”

    “…….”

    “공화국은 아국의 황제 폐하께 정당한 계승권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국은 잘못되었고, 새로이 건국된 공화국이야말로 진정한 합스부르크의 이름을 이어받는다……제국과 공화국은 태생부터 서로를 인정하지 못합니다.”

    결심으로 다져진 후작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이 비공식적인 제안이 얼마나 달성되기 어려운 것인지 머릿속으로 계산했겠지. 시시각각 안색이 어두워졌다.

    “사르데냐 왕실의 정당성이 문제라면 아국 왕실의 정당성 또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왜 문제인지 후작도 충분히 이해해주었으리라 믿습니다.”

    후작이 반박할 수단은 전무했다.

    파르네세 가문의 복권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논리가 바로 왕실의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공화국에 대한 원조를 끊지 않겠다고 대답해버리면, 자기네들 정당성은 소중한 주제에 이쪽 황실의 정당성은 알 바 아니라고 말하는 셈이 된다.

    파르네세 공작가를 복권시키든지, 아니면 원조를 끊어라.

    이것이 극단적인 양자택일의 협상임을 후작도 깨달았으리라. 목소리가 잠겼다.

    “……우리가 공화국을 원조하는 까닭은 귀국에 적대적인 의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외다.”

    “알고 있습니다. 국방의 문제를 제외하고도 귀국 내부의 문제가 있지요.”

    내가 슬며시 입꼬리를 들었다.

    “국화전쟁으로 귀족 가문이 절반 이상 멸절해버린 만큼, 행정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부유한 평민을 대거 관료로 발탁했겠지요. 그들은 아무래도 공화주의라는 사상에 조금 더 친근합니다. 물론, 애당초 귀국은 공화주의에 친밀했습니다만.”

    “…….”

    “새로운 관료 세력이 공화국에 대한 원조를 강하게 지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후작이 지금 걱정하는 것은 왕실을 설득하는 것보다 관료들을 설득하는 것이지요.”

    후작이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보다 아국의 사정을 꿰뚫고 있구려. 옳소. 공화국에 대한 원조는 비단 외교적인 문제에 지나는 게 아니오. 우리 젊은이들 중에는 이전부터 엘리자베트 통령을 흠모하는 자가 많았소.”

    “이해합니다. 통령은 이런저런 책을 많이 저술했으니 말입니다.”

    “넓은 이해에 감사드리오.”

    사르데냐 왕국은 꽤나 난감한 상황에 놓였다.

    우리 부탁대로 원조금을 끊자니 부르주아 출신의 관료 세력이 반발하게 생겼다. 이들은 정부의 실력자들이고 왕국을 관리하는 데 무척이나 중요했다. 그러나 우리 부탁을 거절하면, 이제 공식적인 타협도 비공식적인 타협도 끝나버린다.

    즉.

    “하지만 쌍방에 대한 이해가 언제나 배려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때때로 이해는 완전히 무력하여 오히려 하지 않는 것만 못한다는 실망감을 안겨주지요.”

    “……실로 현명한 말씀이오, 궁중백.”

    더 이상 타협은 없다.

    전쟁이다.

    “후작. 우리의 삶에 대해서 제가 다시 한번 실망할 때가 찾아왔습니까?”

    “…….”

    후작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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