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55화 (355/510)
  • 00355 중립국  =========================================================================

    *  *  *

    조속하게 내부 정리가 마무리되었다.

    마계사회는 말 그대로 들끓었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암살미수와 숙청이 일어났다. 처음에야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며 어리둥절했지만, 이쪽이 정식으로 발표하자 순식간에 끓어올랐다.

    ─ 암살이라는 최악의 방법으로 동족을 죽이려고 한 비겁자.

    ─ 여태까지 마왕의 칭호로 불렸다는 것조차 마족의 수치.

    ─ 월맹군을 실패시키고, 최근에 일어난 원정까지 초를 칠 뻔했다. 수치심도 모르고 명예도 모르는 들개이다.

    마계의 도시 곳곳에서 여섯 마왕을 상징하던 깃발이 불탔다. 그중 이포스는 마왕이면서 동시에 매우 뛰어난 조각가이기도 했는데 그가 조각한 작품들은 공공연히 파괴되었다.

    마계대공이 열한 명이나 싸그리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거기에 대한 반응은 옅었다. 아마 대공들 자체가 평범한 시민 입장에서는 '대변자'라기보다 '지배자'에 가깝기 때문이겠지.

    대변자는 오히려 마왕에 가까웠다. 옛날 로마제국에서는 황제가 '나는 민중의 대변자다'라고 주장한 모양인데 그것과 비슷했다. 어째서 민중은 카스트의 정점에 오른 지배자를 오히려 대변자로 여기는 것일까? 알면서도 모를 일이었다. 글쎄, 멋대로 착각해주면 나야 고마웠다.

    여하간 대세는 이쪽에 있음이라.

    분위기를 읽은 것인지 무소속 마왕의 사병들이 속속들이 항복했다. “부디 자비를” 하고 용서를 구해와서 쿨하게 용서해주었다. 다만 천 명 정도는 마지막까지 남아 저항했다.

    “의미가 없는 반항이었어.”

    토벌 대장을 맡은 벨레드 형님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형님이 말한 대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저항이었다. 마왕이 죽은 이상,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미 붕괴하기 시작한 마왕성과 함께 자멸하는 것뿐이었다.

    발레포르의 마왕성인 기동요새 <라비린토스>는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 마왕성은 평소 바다 한가운데에 섬처럼 우뚝 솟아 있다. 그게 마치 산사태가 일어나는 것처럼 서서히 외벽이 깎여나갔다. 마지막에는 거대한 물보라와 해일을 일으키면서 성채째로 수몰되었다.

    “그건 제법 장관이었지.”

    벨레드 형님이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며 감탄했다.

    우리는 제도의 술집 하나를 통째로 빌려서 거나하게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호오. 직접 보지 못해서 안타깝군요.”

    “뭐, 네놈은 방구석에만 박혀 있으니까 자업자득이다.”

    언제부터 마시기 시작했는지 솔직히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황궁에서 집무를 보고 있던 내 목덜미를 벨레드 형님이 잡았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이미 손에 맥주잔이 들려 있었다. 뭐, 괜찮다. 살다가 이런 날도 있는 것이다.

    벨레드 형님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곳에는 저항의지를 불사른 근위병 삼백 명이 남아 있었다. 탈출하려면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었지만…….”

    “끝까지 남았군요.”

    “아아. 의미없는 죽음이었지. 허나, 일말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아름다움인가. 하지만 그것도 멀리서 지켜보았기에 아름다운 것이겠지. 나는 입안에 맥주를 털어넣으며 말했다.

    “그들은 그야말로 폭포와 같은 삶을 살다 죽었군요.”

    “흐흐, 세상에 어느 누가 폭포의 삶을 살겠느냐. 신화 속에서 헤라클레스나 그랬을까.”

    벨레드 형님이 웃었다.

    “이보게, 아우! 기껏해야 폭포 주위로 날아다니는 물방울처럼 살려고 아득바득 발꿈치를 드는 거야. 한 순간만이라도 쏟아지는 힘을 비껴나가 떠 있는 것처럼 보이려는 것이지.”

    “으음.”

    벨레드 형님은 거기까지 말했다.

    형님의 눈동자에는 어딘지 상냥하고 부드러운 빛이 감돌고 있었다. 나 역시 형님의 말을 충분히 이해했으므로 더 이상 대화를 걸지 않았다. 우리 두 사람은 술잔을 부딪쳤고, 자연스럽게 화제가 바뀌었다.

    “이제 슬슬 합스부르크 공화국을 집어삼킬 차례인가? 그 왜. 아우가 정말로 싫어하는 여자가 거기에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제가 정말로 싫어하는 여자입니까.”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희대의 천재, 합스부르크의 구원자, 독재자. 엘리자베트를 표현하는 수식어는 많고 많았지만 벨레드 형님처럼 부르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리라.

    “아니요. 저는 얌전히 기다릴 생각입니다.”

    “왜? 헬베티카도 우리에게 복속했다. 공화국을 삼면에서 포위한 셈이지 않나. 이 정도면 그 여자가 제아무리 쌈박질을 잘하더라도 별 수가 없을 터인데?”

    헬베티카는 엘프-난쟁이의 부족 연맹국을 가리킨다.

    월맹군이 자그마치 이천 년 동안 삽질에 삽질을 거듭하자 거기에 환멸을 느껴서 중립국을 선포해버렸다.

    내가 어마어마한 숙청을 일으키자 제 발이 저렸는지, 과거의 일탈을 용서해달라며 우리한테 복속했다. 덕분에 현재 엘리자베트는 서쪽 북쪽 동쪽 삼면에서 우리에게 포위되었다. 이 자발적인 복속에 마계가 또 한번 크게 열광한 것은 물론이었다.

    사실 헬베티카 연방 대표를 내가 거하게 협박한 것도 있었다. 뭐, 이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나는 형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맞습니다. 지금 전쟁을 걸면 십중팔구 우리가 이깁니다. 공화국도 멸망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최악의 사태가 기다리겠지요.”

    “최악의 사태? 그게 뭔가.”

    벨레드 형님이 고개를 갸웃했다.

    “엘리자베트는 자기 나라를 버릴 겁니다.”

    “……!”

    내가 맥주를 들이키고 씁쓸하게 말했다.

    “형님. 사람이 가장 소중한 것을 짓밟히면 어찌 되는지 아십니까?”

    “……그거야 절망하겠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사람은 절망에 패배하겠지요. 하지만 절망 속에서도 철의 의지를 관철하는 자가 가끔씩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제 자신의 남은 생애를 다 바쳐 오로지 복수만을 갈망합니다.”

    아마도 엘리자베트는 어딘가 외국으로 망명할 것이다.

    멸망한 국가의 군주라는 것은 정치적으로 써먹기 좋다. 특히 합스부르크 제국의 핏줄을 지니고 있는 엘리자베트라면, 적당히 어느 왕자랑 결혼시켜 씨받이로 만들겠지. 그리고 엘리자베트는 자신이 씨받이로서 값어치가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지금 엘리자베트가 움직이지 못하는 까닭은 지켜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화국의 국민, 이념, 대의. 그런 것들이 족쇄가 되어 엘리자베트를 묶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켜야 할 것이 사라지면.”

    “그런가. 복수를 위한 귀신이 태어나는 것인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엘리자베트에게 군재가 있다는 건 모든 나라가 알고 있습니다. 객장(客將)으로 써먹겠지요. 그리고 엘리자베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과 병력을 총동원해서 우리를 괴롭힐 겁니다…….”

    정말이지 난감한 아가씨였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이쪽이 당한다. 그렇다고 완전히 패배시키면 복수의 귀신이 되어 달려든다. 발레포르 같은 잔챙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가시다.

    내가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면서 수세를 지키는 것. 이게 최선입니다.”

    “으으음.”

    벨레드 형님은 지나치게 소극적인 방법에 불만이 있는 듯 신음했다.

    하지만 정말로 이게 최선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천만다행으로 지금 엘리자베트에게는 용사가 없다. 데이지는 나에게 맹약으로 묶여 있고, 루크는 혁명사상에 전염되어 엘리자베트를 독재자로 여기고 있다.

    용사라는 패가 사라진 만큼 엘리자베트는 아마도 암살자를 고용하겠지. 어떻게든 마왕만 죽일 수 있다면 사태가 호전된다. 아무리 수많은 병력이 있다 한들 마왕이 죽으면 끝.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던전 어택>에서는 마왕에게 두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마왕성에 틀어박혀 무한정 농성하거나, 아니면 병력을 통째로 이끌고 바깥으로 진출하든가.

    마왕성에 틀어박히면 생명을 잃을 위험이야 줄어들겠지만 반대로 행동 반경이 극도로 줄어든다. 전략적으로 수세에 몰린다. 그리고 엘리자베트에게 전략적인 우위를 넘겨주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마왕성에서 뛰어나와도 사태는 호전되지 않는다. 엘리자베트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야전의 명수이다. 바르바토스조차 엘리자베트와 정면으로 맞붙다가 패사(敗死)한다.

    결국 두 가지 결말밖에 없다. 자기 본진에 있다가 말라비틀어져 괴사하든지, 야전에서 처참하게 전멸당하든지. 꽤나 괴로운 양자택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엘리자베트에게는 단독으로 마왕을 죽여버릴 만한 최종병기가 없다. 그렇다고 일반적인 암살자로 마왕들을 죽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고로, 엘리자베트는 이쪽의 배신자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만약에 내가 가만히 있었다면 앞으로 몇 년 안에 엘리자베트는 발레포르와 결탁했을 것이다. 누가 단탈리안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지, 그런 마왕들이 있는지 철저하게 조사했겠지. 어쩌면, 아니 거의 확실하게 현재도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엘리자베트라면 대략적인 계획을 그려내는 데 이 년쯤 걸릴까. 아니, 일 년 안에 해내겠지. 나는 다소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조금 서둘러서라도 이쪽에 불만을 가진 세력을 일찌감치 짓밟았다…….

    “엘리자베트에게 남은 수단은 이쪽의 내부를 뒤흔드는 것뿐이었습니다. 외부에서 도저히 공격할 수 없다면 내부를 공략한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순이지요.”

    “음. 아우는 그걸 미연에 방지한 것이고.”

    그렇다.

    편집증적인 강박관념이라 해도 좋다. 천하의 엘리자베트라고 해도 내가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세계에서 오직 나만은, 엘리자베트가 모든 마왕을 죽일 운명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혹시, 아우. 폴리투니아에서 침공을 준비했을 때 굳이 자네가 직접 간 것도…….”

    “예. 폴리투니아는 엘리자베트의 동맹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지요.”

    “…….”

    벨레드 형님이 맥주를 원샷했다.

    형님은 맥주잔을 쿵, 하고 탁자에 내려놓으며 묘하게 탄성을 흘렸다.

    “꽤 재미있군. 대륙을 장기판으로 놓고 자네와 그 여자, 두 사람이서 놀아재끼는 것 아니냐. 그 여자 때문에 왕국이 움직였고 마왕과 대공이 죽었다. 이걸 그 여자가 알면 얼마나 좋아할지! 크흐흐. 마치 대륙을 혼수물로 삼아 구애하는 꼴이다.”

    나는 형님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벨레드 형님은 그것마저 원샷했다. 기분이 무척 좋아보여서 나도 모르게 물었다.

    “형님,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으십니까?”

    “아니. 나는 또 자네가 바르바토스 님이랑 정말로 사귀고 있는 것 아닌지 걱정했지 뭔가. 크하하.”

    벨레드 형님이 큰소리로 웃었다. 나는 찔끔했다.

    참고로 벨레드 형님은 아직도 나와 바르바토스의 사이를 SM 파트너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내가 두드려맞는 관계로.

    “그, 그럴리가 없지 않습니까. 바르바토스에게 저는 그저 단순한 육노예. 자기가 편할 대로 써먹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어제만 해도 잔뜩 채찍질을 당했다구요.”

    “암, 그렇고말고. 이제보니 자네가 좋아하는 여자는 따로 있었구만!”

    벨레드 형님이 내 술잔에 맥주를 콸콸 쏟아부었다. 저기, 형님. 술이 넘쳐 흐르고 있습니다만.

    “생각해보니 자네가 그 여자랑 결혼해서 공화국을 이어받으면 순조롭게 대륙이 정벌되는 것 아닌가! 크하하하! 아우, 자네의 사랑을 내 진심으로 응원하겠어!”

    “아니, 만에 하나라도 그럴 일은…….”

    “자아! 건배하자고!”

    일단 공화국은 핏줄로 이어받는 게 아니라는 걸 설명해드릴까 했지만 관두었다. 벨레드 형님은 특정한 분야 이외에는 완전히 멍청이였으니까. 뭐, 말도 안 되는 오해를 사버린 것 같지만 이대로 내버려두는 편이 좋겠지. 나한테도 불쌍한 벨레드 형님한테도.

    “건배.”

    결국 나는 활짝 웃으면서 벨레드 형님에게 건배했다.

    힘내십시오, 형님. 저는 형님이 천년 동정을 탈출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