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54화 (354/510)
  • 00354 중립국  =========================================================================

    군병이란 자고로 일단 움직이면 벼락처럼 신속할지어니.

    명령이 하달되자마자, 근처에 주둔하는 마왕군 부대가 들이닥쳤다. 제도(帝道)는 단숨에 장악되었다. 스물여섯 명의 마계대공 전원이 끌려오기까지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실로 깔끔한 솜씨였다.

    “대체 무슨 난리이옵니까!”

    “이럴 수는 없습니다, 전하!”

    마계 대공들은 며칠째 제도에 머물고 있었다. 본래 열리기로 예정된 대회의가 한없이 연기되는 바람에 꼼짝없이 붙잡힌 것이었다. 당연했다. 애당초 대회의는 구실에 불과했다.

    “이번 암살사건에 그대 대공들이 연루되었다는 증언이 확보되었다.”

    “……!”

    대공들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이번 암살 사건에서 내가 노린 세력은 무소속 마왕 따위가 아니었다. 마왕이 없는 동안 마계에서 제멋대로 제왕처럼 군림하는 대공들은 예전부터 눈엣가시였다. 이 녀석들을 바깥으로 불러들일 수만 있다면 명목은 뭐가 되어도 상관없었다.

    “아주 재미있는 증언을 들었다. 월맹군 원정이 계속 실패하도록 그대들 중 일부가 음모를 획책했다지 않는가. 그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질 것이다.”

    “모, 모함이옵니다……그런 간신배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건 자네들이 지금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마계대공들이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 하오면 누가 판단하오리까?”

    “글쎄. 내 말을 잘못 이해한 모양이군.”

    내가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나는 지금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날 밤부터, 끔찍한 고문이 자행되었다.

    마계대공들은 드디어 이번에 자신들을 모이게 한 이유를 깨달았겠지.

    ――피의 숙청.

    나는 마왕군이 언제나 내부의 분열로 인해 실패함을 알았다. 이제 내가 배후에서 권력을 잡은 이상, 그런 웃기지도 않은 실패를 되풀이할 생각은 추어도 없었다. 도대체 마계대공은 왜 존재해야 하는가?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마족을 지배하는 부류는 마왕 하나로 충분.

    나머지 군벌 세력은 깔끔하게 없애버리는 편이 월등하게 좋았다.

    물론 마계대공들이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없었다. 그렇기에,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다. 마왕의 증언이라면 아득하게 높은 가치를 지녔다. 무소속 마왕은 말하자면 마계대공이라는 대어를 낚기 위한 미끼였다…….

    마왕들을 고문할 때 써먹었던 방법을 이번에도 그대로 써먹었다.

    “그대 대공들은 의도적으로 월맹군 원정을 방해했다. 내 말이 맞는가?”

    “일찍이 반역자 바알과 몰래 내통하여 제2차 월맹군의 보급로를 끊은 것이 그대들의 책략이라 밝혀졌다. 승인하라.”

    대공들은 나흘을 버티지 못하고 범행을 인정했다.

    스물여섯 명의 대공 중에서 열한 명이 유죄로 판명되었다. 마왕에게 특히나 적대적인 녀석들이었다. 나머지 열다섯 명은 무죄로 판결이 났다. 그중 절반은 옛날에 나한테 천만 골드에 해당하는 뇌물을 바친 대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앞으로도 무사히 살아남고 싶으면 이쪽에 협조하라.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제법 많은 대공들을 순순히 풀어주자 의문이 생긴 것일까.

    나와 공범인 바르바토스가 입술을 삐죽이며 불평했다.

    “왜, 이참에 전부 죽여버리지 않고?”

    “원래 숙청이라고 해서 전부 죽여버리면 안 돼.”

    내가 포도주를 마시며 말했다.

    “몽땅 다 죽이면 그건 더 이상 지배자가 아니라 폭군이야.”

    “흐응. 둘의 차이점이 뭔데? 어차피 우리는 이미 폭군이 되어버린 거 같은데.”

    “아주 큰 차이가 있지.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지 기준을 제시해주는 거.”

    정치는 전쟁터와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

    그중 가장 비슷한 지점을 뽑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어떠한 승리도 완벽하지 않다'를 들겠다. 설령 한 명의 적군도 살려두지 않고 몰살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그건 결코 완벽한 승리일 수 없다.

    누군가는 당신의 업적을 질투한 나머지 모함을 해버릴지 모른다. 적국의 백성들은 당신을 학살자로 취급해서 대대손손 원망하고 증오할 것이다. 그 원망과 증오가 나중에 당신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줄 수도 있다…….

    “유죄로 판결낸 애들은 우리한테 비협조적이었어. 무죄가 난 애들은 비교적 우리한테 호의적이었고. 우리는 아무나 죽이지 않는다. 비협조적으로 나올 때만 죽인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려준 거야.”

    이른바 생존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었다.

    나는 포도주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이쪽에 협조하는 대공까지 굳이 죽일 필요는 없어. 한번 공포심을 맛본 만큼, 놈들은 훌륭한 사냥개가 되어 우리한테 충성하겠지……가끔씩 적당히 먹이라도 던져주라고. 신나서 꼬리까지 흔들걸.”

    “대공을 한낱 개새끼로 취급하다니.”

    바르바토스가 꺄르륵 웃었다.

    나도 따라서 웃고 있자니,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바르바토스가 내게 입술을 맞추었다.  가벼운 애정표현이 아니었다. 딥키스였다. 하긴 바르바토스의 애정표현은 언제나 무거웠지만…….

    “으……하아, 으읍…….”

    참고로 우리 두 사람은 지금 루돌프 황제의 침실에 들어와 있었다. 죄인들을 심문한 결과를 황제 폐하께 먼저 개인적으로 보고드린다. 그런 명목이었다.

    물론 루돌프 황제가 살아서 움직일 리가 없었으므로, 그는 구석에 인형처럼 틀어박혀서 우리 두 사람이 열렬하게 키스를 나누는 모습을 빤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키스가 길어지자 나도 바르바토스도 자연스럽게 숨결이 거칠어졌다.

    간신히 입술이 떨어지고 내가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섭정 전하. 전하께서 사시사철 발정기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몰래 운우지정을 나누기에는 장소가 심히 적절하지 않은 것 같은데 말입니다.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앞입니다.”

    “그거 알아? 너 며칠 전부터 온몸에서 피냄새가 나.”

    바르바토스가 씨익 웃으면서 나에게 바짝 몸을 붙였다.

    “난 왠지 네가 개새끼 같을 때가 좋더라.”

    “변태라서 그래, 변태라서.”

    “깔깔. 누가 누구보고 변태래.”

    바르바토스가 내 허벅지에 올라탔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우리 두 사람은 의자에 기대어 서로 마주본 형태가 되었다. 다시 한번 키스했다.

    “응, 으응……흐으응…….”

    일국의 섭정이 입어야 하는지라 바르바토스의 옷은 무척이나 화려하고 거추장스러웠다. 그 옷을 한겹씩, 한겹씩, 천천히 벗겨나갔다.

    조급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때로는 내 손가락이 그녀의 상의를 벗겼고, 때로는 그녀 스스로 속옷을 미끄러 내려트렸다. 눈이 내리듯이 의자 아래에는 옷가지가 겹겹이 쌓여갔다.

    이윽고 흠집 하나 없이 새하얀 바르바토스의 맨살이 드러났다.

    황제의 침실. 제국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후우, 하아……. 야, 단탈리안.”

    “응.”

    “너가 가미긴이랑 놀아나는 거 솔직히 마음에 안 들어.”

    바르바토스는 내가 여러 명의 여자와 즐기는 걸 용납하고 있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바르바토스가 여러 명의 여자와 노는 것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마 외부의 눈에서 보자면 우리는 제법 또라이 같은 연인으로 비출지도 몰랐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우리 공주님.”

    내가 키득거렸다.

    “가미긴도 죽여버릴까?”

    “흥. 놀아나는 것 자체는 상관없어. 그런데 걔는 마치 네가 자기 물건인 것처럼 생각하고 다니잖아. 불쾌한 년이야……흐읏.”

    가볍게 바르바토스의 가슴을 핥았다.

    바르바토스는 가슴이 자그마한 주제에 쓸데없이 감도가 민감했다. 적당히 달아올랐다 싶었을 때는 아주 살짝 깨물어주었다. 깨문다기보다 이빨에 조금 스친다는 느낌으로.

    “하으, 잠깐만. 짜식아. 발정난 개처럼 굴지 말고 잠깐만……으읏!”

    “뭐야. 한참 즐기려고 하는데.”

    나는 가슴에서 얼굴을 떼고 눈썹을 찡그렸다. 자기가 먼저 유혹해놓고 분위기를 깨다니, 제멋대로인 것에도 정도가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이거 봐라.”

    바르바토스가 오른손을 가볍게 저었다. 그러자 루돌프 황제가 쓰고 있던 황금관이 무언가에 끌려오듯이 바르바토스의 손에 날아들었다. 바르바토스는 그걸 자신의 머리에 쓴 다음 짜잔~, 하고 허리에 손을 짚었다.

    “어때? 어울리지?”

    “……대역죄인으로 들어가야 할 사람이 여기 한 명 더 있었군.”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바르바토스의 태도는 무례함을 뛰어넘어 귀엽기까지 했다.

    “지금 나는 황제의 관을 쓰고 있어.”

    “아아. 역사상 마왕이 처음으로 황금관을 쓴 순간이겠지.”

    그녀는 내 목덜미를 양손으로 감싸고 살며시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까지 가깝게.

    “한 번쯤 황제씩이나 되는 사람을 범하고 싶지 않아?”

    “…….”

    맨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소녀가 오직 머리에만 황금관을 쓴 모습은, 틀림없이 배덕적이었다. 나는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대신 한 번만 더 약속해.”

    “아아.”

    뭘 약속하라는 것인지 마저 듣지 않아도 뻔했다. 가미긴 얘기를 꺼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행여나 딴 눈 팔지 말라는 암시였다.

    “나한테는 언제나 너가 최고야. 바르바토스.”

    “……쓸데없이 눈치는 빨라 가지고는.”

    더 이상은 말이 필요없겠지. 나는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날, 황제의 침실에서 바르바토스는 두 번 기절할 때까지 엉망진창이 되었다.

    *  *  *

    암살 사건이 터지고 일주일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열한 명의 마계대공들에게는 굵직한 죄목이 세 개나 걸렸다.

    첫 번째, 월맹군 원정이 실패하도록 수차례에 걸쳐 대역죄인 바알과 함께 계략을 획책한 것.

    두 번째, 지난 꼭두각시 전쟁 후반기에서 제멋대로 별동대를 보내 프랑크 남부를 약탈한 것.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마왕군의 신의를 크게 손상시킨 것.

    세 번쨰, 신생 마왕군에 반항해서 궁중백인 나를 암살할 계획을 모의한 것.

    요컨대 그동안 미해결로 남아 있던 죄목을 모조리 덮어씌웠다.

    세 개 모두 무소속 마왕들과 다른 마계대공들의 증언을 토대로 입증되었다. 제멋대로 조작된 증거였으나 그런 진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열한 명의 대공과 세 명의 마왕은 즉시 처형되었다.

    처형은 공개된 광장에서 이루어졌으며, 마왕이 처형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수많은 마족과 인간이 구경하러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그야말로 진풍경이겠지.

    “저주한다! 단탈리안 개자식! 네놈을 저주한다――!”

    그들은 대부분 나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면서 죽어갔다.

    처형자로는 특별히 벨레드 형님이 자처했는데, 과연 형님답게 단 한 번의 도끼질로 마왕과 대공의 목을 몸통에서 분리시켰다. 훌륭한 솜씨였다.

    마지막 차례는 발레포르였다.

    “죄인 발레포르.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는가?”

    “…….”

    발레포르가 내 쪽을 쳐다보고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바알이 죽었을 때는 이 또한 시간의 흐름이라 생각했다. 아가레스가 죽었을 때도 역시 언젠가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이제 와서 주위를 둘러보니, 본인을 옹호해줄 자가 하늘 아래 어디에도 없구나.”

    발레포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하지 않은 죽음을 당연한 것처럼 보고 넘어갔다. 허니, 본인의 죽음이 시간에 파묻혀서 그대로 흘러가버리는 것 또한 정당한 보복이겠지. 다만 본인이 미련했다는 것만이 회한과 후회로 남을 뿐……. 그저 이대로 내버려두어라.”

    벨레드 형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한 도끼가 번쩍 빛났고, 퉁,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마왕의 처형에 군중들이 환호하며 소리를 질렀다. 나에게 대적할 내부 세력은 이리하여 완벽하게 제거되었다…….

    마왕의 피에 영험한 효과가 있다고 믿는 일부 사람들은 어린애들을 보내서 빵조각에다 핏물을 묻혀오게 시켰다. 아이들이 어른들 틈새를 비집고 쪼르르 달려나왔다.

    “저지할까요?”

    경비대장이 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 자가 말하지 않았는가. 그저 내버려두라고.”

    “알겠습니다.”

    아이들은 빵에 새빨간 핏물을 묻히고는 다시 뛰어나갔다. 부모님이 내린 명령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는 기쁨으로 아이들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이 열네 명의 마왕과 대공이 마지막으로 남긴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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