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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352화 (352/510)
  • 00352 중립국  =========================================================================

    “아아, 확실하게 보여주겠다.”

    발레포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미리 약속을 받아두겠다, 바르바토스. 우리가 보여줄 메모리아는 여기 있는 가미긴의 명예를 상당히 훼손할 염려가 있다. 이것과 관련해서 가미긴의 명예를 끝까지 지켜주기를 바란다…….”

    “거창하게 나오는걸.”

    바르바토스가 코웃음을 쳤다.

    “나는 수치도 모르는 개새끼와는 아무런 약조도 내걸지 않아.”

    “수치를 모르는 것은 단탈리안이다, 바르바토스. 그는 무소속 마왕들을 겁박했으며 오늘도 가미긴을 모욕했다!”

    발레포르가 호기롭게 소리쳤다. 그러자 한 평원파 마왕이 삿대질을 했다.

    “중립지역으로 선포된 황궁에서 암살 따위를 저지르다니. 네놈들이야말로 지엄한 율법을 모욕하지 않았는가!”

    “하, 중립지역을 먼저 침범한 자가 바로 단탈리안이다!”

    기세에서 밀리면 죽도 밥도 안 되었다. 그 사실을 발레포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무시무시하게 눈을 부라리며 바르바토스뿐만 아니라 사방을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는 마왕들을, 대공들을, 병사들을 노려보았다.

    “오 년 전을 기억해보라.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마왕이었던 안드로말리우스가 어디서 누구에게 죽었는지. 수백 년 동안이나 중립지역으로 엄숙하게 지켜진 니블헤임에서, 그것도 모든 시민이 바라보는 광장 한 가운데에서, 다름 아니라 단탈리안에 의하여 살해당했다. 누가 율법의 파괴자인가. 누가 후안무치한 살인자인가!”

    무소속 마왕들이 팔을 높이 치켜들며 호응했다. 그렇다, 단탈리안은 범법자다, 하고 소리가 터져나왔다.

    “중립지역은 모든 마왕들을 위해 존재하지, 결코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단탈리안은 자기 편할 대로 중립지역을 써먹으며 그 스스로는 어떠한 중립도 존중하지 않는, 이 시대에 가장 혐오스러운 파렴치한이다!”

    “암살자의 변명이다!”

    “저놈의 혀를 잘라버려라!”

    파벌에 속한 마왕들이 험악하게 인상을 찡그리며 우우, 하고 야유를 쏟아부었다. 무소속 마왕들 역시 목에 핏대를 세웠다. 숫자에서 압도적으로 밀리지만 명분과 증거는 여기에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당장이라도 난투극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바르바토스가 빈정거렸다.

    “단탈리안이 가미긴을 강간했고, 때마침 가미긴은 그 광경을 담아두는 메모리아 아티펙트를 갖고 있었고, 또 때마침 너희는 그 순간을 노려서 들이닥쳤다라. 우연이라면 그거 참 대단한 우연이네.”

    “이상한 건 어디에도 없다. 만약의 사태를 위해 아티펙트를 상비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럽다. 오히려 단탈리안의 잘못이지 않겠는가?”

    발레포르가 비웃었다.

    “아티펙트가 없이는 단 둘이서 만나는 것도 위험한 인물이라는 얘기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 모두가 염려하던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가미긴.”

    발레포르가 고개를 돌려 가미긴을 쳐다보았다. 가미긴은 몇 시간 동안 안정을 취해서 다행히 채찍질로 난 상처가 회복되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왔다.

    “그래. 내가 증거를 가지고 있어.”

    “그녀는 증인으로 부적합하다!”

    중립파 마왕 중 한 사람이 이의를 제기했다.

    “가미긴은 단탈리안과 연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내밀한 일이 이루어졌다 한들 어찌 그것이 강간이겠는가.”

    “단탈리안은 가미긴을 연인으로 대하지 않았다. 단지 내전의 승리를 빌미로 가미긴을 겁박하고 협박했을 뿐이다!”

    발레포르가 가미긴을 대신해서 반박했다.

    “단 한번이라도 단탈리안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가미긴을 연인으로서 존중한 적이 있는가! 허구한 날 바르바토스와 비교하며 그녀를 깎아내리지 않았는가. 단탈리안은 순전히 그녀를 모욕하고 비웃음거리로 만들 목적으로 즐겼다. 그녀는 피해자다!”

    다시 마왕들 사이에서 노성이 오갔다.

    바르바토스가 조용히 오른손을 들자 평원파들이 입을 다물었다. 천성이 전사이며 동료의 억울한 죽음을 결코 외면하지 못하는 이들은 흥분과 적의로 숨을 씩씩거렸다. 다만 평원파라고 해서 모두가 단탈리안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자들은 침묵했다.

    “더 이상 말은 무용.”

    바르바토스가 차갑게 일축했다.

    “가미긴. 증거를 보여라.”

    “안 그래도 보여주려고 했어.”

    가미긴이 자신의 목에 걸린 흑요석 목걸이를 벗었다. 과연, 하고 발레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걸이에 메모리아 마법을 걸어두었는가. 단탈리안은 우둔한 자였다. 어떤 미래가 도사리는지도 모른 채 그녀를 방안으로 들였다…….

    이제 단탈리안이 그녀를 어떻게 협박했는지 천하에 드러나겠지. 방안에서 보았던 광경에 의하면 변태적인 고문까지 이루어진 것이 분명했다. 감히 마왕을 창녀처럼 마구 대한 것이었다. 관용은 불가했다.

    그런 광경을 보고도 단탈리안을 옹호한다면 평원파의 명예까지 땅바닥에 떨어질 뿐이다. 심지어 지금 이곳에는 마계의 대공들까지 참석하고 있다. 감정이 어떻든 간에 공식적으로는 단탈리안의 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계획은 완벽하다…….

    목걸이에서 불투명한 막이 새어나왔다.

    가미긴이 미소를 지었다.

    “확실한 증거를.”

    허공에 총천연색의 광경이 투영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발레포르에게 익숙치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언제까지 우리가 참고 있어야 하오?

    처음에 발레포르는 누구의 목소리인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가 서서히 입을 열었다.

    ─ 상대는 서열 제71위였소. 여기서 그자보다 약한 분이 계시오?

    ─ 결국 단탈리안, 그자는 파벌들의 얼굴 마담에 불과하오. 개인의 무력은 하찮고 또 하찮소외다. 저쪽에서 우리를 끝까지 무시할 속셈이라면……우리도 본때를 보여줄 필요가 있소.

    ─ 발레포르. 허나 그자를 암살하기가 어디 쉽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소리였다. 발레포르 자신이, 동료 마왕들이 불투명한 막에 투영되었다. 이게 무엇인가. 지금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가. 발레포르는 알 수 없었다. 등줄기에서 형거할 수 없는 오한이 일어났다.

    그는 기계처럼 고개를 돌려 가미긴을 쳐다보았다.

    가미긴은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 본인은 참가하겠소.

    ─ 발레포르…….

    ─ 단, 본인은 여기에 모인 전원이 찬성했을 경우에만 동참하겠소. 이 계획은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보안을 요구하오. 모두가 함께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양자택일밖에 없소외다.

    악의적으로 편집된 영상이었다. 가미긴이 한 말은 모조리 삭제되었고, 무소속 마왕들이 찬동하는 부분만이 들어 있었다. 순식간에 끝나버린 영상을 앞에 두고 무소속 마왕 전원이 석상처럼 굳었다.

    광장이 조용해졌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불온하기 짝이 없는 공기가 황궁 전체에 가라앉았다. 누군가가 불쑥 중얼거렸다.

    “저건……암살을 모의하는 것 아닌가.”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기보다 혼잣말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타인의 심정을 대변해준다면 그것은 더 이상 혼잣말이 아니었다. 불온하게 가라앉았던 공기가 요동쳤다.

    “암살이다! 계획된 암살이다!”

    “저놈들이 궁중백을 암살했다!”

    광장이 고함소리로 진동했다. 무소속 마왕들이 얼어붙었다. 벨레드가 우렁차게 내뱉은 한 마디의 말은 모든 것을 폭발시켰다.

    “암살자들을 쳐죽여라!”

    벨레드가 가장 근처에 있는 무소속 마왕을 향하여 도끼를 날렸다. 메모리아에 의해 충격으로 굳어 있던 마왕이 당황하며 본능적으로 두 손바닥을 내밀었으나, 도끼날은 정확하게 마왕의 이마에 찍혔다. 두개골이 사정없이 부서지며 마왕은 뒤로 꺼꾸러졌다.

    그와 동시에 수십 명이 달려들었다.

    “가미긴……가미긴, 네년이! 크헉!”

    이포스가 분노하며 단검을 휘둘렀다. 곧 시트리의 사복검(蛇腹劍)이 뱀처럼 날아들어 그의 오른팔을 어깨째로 갈기갈기 찢었다. 이포스가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단검을 놓쳐버리자 다섯 명의 산악파 마왕이 하이에나처럼 물어뜯었다.

    이포스는 공포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다른 무소속 마왕들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살려달라며 무릎을 꿇은 마왕을 향해서 창날이 쏟아졌다. 이자는 가슴과 허벅지, 오른쪽 팔뚝, 목이 꿰뚫리며 그대로 절명했다.

    “죽이지 마세요! 잡아서 심문해야 합니다!”

    파이몬이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 말에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이미 눈 깜짝할 사이에 세 명의 무소속 마왕이 죽어버린 뒤였다. 발레포르를 포함하여 오직 세 명만 남았다. 그들은 저항할 의지조차 사라져 있었고, 온몸이 꽁꽁 묶여 바르바토스 앞에 던져졌다.

    발레포르가 중얼거렸다.

    “모함……그래, 모함이다……저건 조작된 영상이야……!”

    바르바토스가 이죽거렸다.

    “변명으로 삼기에는 별로 그럴듯하지 않은데. 조금 더 머리를 굴릴 수는 없을까, 암살자 양반?”

    “어째서…….”

    어째서 배신하였는가. 가미긴도 틀림없이 맹약을 행했다. 자신들을 배신했다면 모든 마법 서클을 잃어버린 채 반신불수로 전락할 터……. 그러나 가미긴은 멀쩡해보였다. 설마 맹약의 마법이 잘못되어 있었는가?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마법은 확실했다. 몇 번이나 점검했다…….

    어느새 바르바토스 옆에 다가선 가미긴이 싱긋 웃었다.

    “질문이 잘못되었어, 발레포르. 어째서가 아니야. 어떻게인지를 물어야지.”

    “무슨 소리를…….”

    “나는 너희랑 약속한 대로 아티펙트를 가동했어. 아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티펙트가 바뀌기라도 한 것 아닐까?”

    발레포르는 이해할 수 없었다. 가미긴의 눈동자에 상대방을 가련하게 여기는 기색이 떠올랐다.

    “너는 스스로 제법 똑똑하다 믿겠지만 결국은 전쟁에도 정치에도 무관심한 채 수백 년 동안 허송세월한 범인에 불과해. 사람을 의심할지라도 제대로 의심하는 방법을 모르고, 사람을 죽이더라도 제대로 죽이는 방법조차 모르지…….”

    “그러니까 무슨 소리인가!”

    그때 뒤편이 소란스러워졌다. 발레포르는 뒤를 돌아보려 했으나 등이 벨레드에게 밟혀 있는 탓에 머리를 돌리지 못했다. 잠시 뒤, 발레포르의 머리 위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당신이 구제할 도리가 없는 머저리라는 소리입니다. 발레포르.”

    “뭐…….”

    “발을 치워주십시오, 벨레드 형님. 암살자란 본디 왕과 동격입니다. 그는 저를 볼 권리가 있을 것입니다.”

    남자가 쿡쿡 웃었다.

    그러자 등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사라졌다. 발레포르는 얼굴을 치켜들었다. 그곳에는 단탈리안이 허리를 굽히고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수가……말도 안 된다…….”

    “안타깝게도 말이 될뿐더러 이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다시는 보지 못했다고 생각한 동지를 보게 되었으니 잘 됐군요. 부디 환영해주셨으면 합니다.”

    단탈리안이 발레포르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리고 주변에 들으라는 식으로 말했다.

    “여러분께서 저를 증오하신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나약한 소인에 불과해서 말입니다. 암살에 대비해서 항상 대용 인형을 준비해두고 있지요. 여러분께서 죽이신 것은 불쌍한 인형입니다.”

    “인형이라니…….”

    그 순간 발레포르는 자신이 죽였다고 생각한 인물이 반마법 옷을 입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마력이 유독 약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반마법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납득했다. 애초부터 마력이 대단찮은 단탈리안이기에 무시했다. 하지만, 만약 처음부터 마왕이 아니었다면.

    단탈리안이 등을 피고 말했다.

    “포로들을 가두십시오. 그들은 단독범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그들을 심문해서 배후에 숨은 공범들을 찾아낼 것입니다.”

    공범이라니?

    발레포르는 아까 전부터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공범이 있다는 말인가. 단탈리안을 죽이자고 맹세한 사람은 일곱 명, 아니 여섯 명밖에 없었다.

    발레포르는 속절없이 끌려갔다. 단탈리안이 사람들을 향해 뭐라고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심문이라는 단어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오한이 일었다. 도대체 무엇인가. 저 남자는 무엇을 꾸미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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