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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350화 (350/510)

00350 중립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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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력 1512년 3월 15일의 아침이 밝아왔다.

3월은 겨울 추위가 물러서는 시기였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군대는 차가운 겨울 내내 숙영지에 틀어박혀 꼼짝하지 않다가 3월이 되어야 서서히 움직였다. 사람들에게 3월이란 전쟁이 다시 움트는 시기였으며, 그렇기에 전신(戰神) 아레스에게 공양된 달이었다.

이날은 궁전에서 대회의가 예고되어 있었다.

봄철이 다가옴에 따라 새해를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왕은 물론이고 마계의 대공, 자유도시의 시민대표가 초대되었다.

대공과 시민대표 중에는 흡혈귀가 여러 명 있었다. 그들을 배려하기 위해 대회의는 땅거미가 지는 저녁에 열렸다. 보통 오전에 회의를 여는 인간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본디 마족의 예법이란 그러했다.

무소속 마왕들은 주의 깊게 이날을 암살 결행일로 선택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여러 개 있었다.

첫 번째. 손님을 대거 맞이할 준비로 인해 황궁이 무척 부산하다.

두 번째. 황궁에 입궐해도 정당한 이유가 있으므로 이상하게 비추지 않는다.

세 번째. 마왕과 대공이 모인 자리에서 가미긴이 강간당하는 영상을 공개하면, 더더욱 효과적으로 단탈리안의 죽음에 대해 정당화할 수 있다…….

아무리 바르바토스이나 몇몇 마왕이 단탈리안을 총애할지라도, 대공까지 참석한 자리에서 강간 영상 따위가 공개되어버리면 별 도리가 없다. 단탈리안의 죄를 옹호하는 것이 극도로 어려워진다…….

무소속 마왕들은 절호의 기회를 손에 넣었다고 해도 좋겠지. 단탈리안을 처단하고 단숨에 세간의 지지를 얻는다. 3월 15일은 말 그대로 최적이었다.

“…….”

“…….”

가미긴이 황궁에 입궐하고 무소속 마왕들은 초조하게 기다렸다. 누군가가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농담을 던져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반응이 시원하지 않았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기분이었다.

모두 직감하고 있었다. 오늘 만약 암살이 이루어지면 정국은 걷잡을 수 없도록 혼란스러워진다. 결국에 소수파에 불과한 자신들이 혼란을 책임지고 짊어져야만 한다…….

발레포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이러니했다. 파벌 싸움에 휘말리는 것이 싫어서 수백 년 동안 마왕군의 정치판에 거리를 두었다. 그런 자신이 이제는 정치의 최전선에 설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역설적이군.”

“예?”

“본인은 정치가 싫어서 한적한 바닷가에 은둔했소. 그런데 이제 와서 가장 정치적인 입장에 서게 된다 생각하니 아무래도 우습구려…….”

무소속 마왕이 아아, 하고 맞장구를 쳤다.

“저도 그렇습니다. 어쩌다 마왕이 되었을 뿐이지, 대륙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었지요. 저야 조각상이나 모으면서 시간을 때울 수만 있다면야 정치든 뭐든 상관이 없었습니다.”

“호오. 조각상을 모으는 취미도 갖고 계셨소?”

“단탈리안이 문화유산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수집을 금지시키기 전까지는.”

마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자 발레포르를 비롯해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다른 마왕들까지 웃었다.

“그 작자는 끼어들지 않는 곳이 없군.”

“정말입니다. 나 참.”

공기가 부드러워졌다. 누구나 솔직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문득, 발레포르는 이 순간에 이들과 진정한 의미에서 동지가 된 것처럼 느꼈다.

“이제는 제국에 세금까지 내라고 하지 않습니까. 마왕이 제국에 세금을 낸다니, 지나가던 개도 웃어버리지 않고는 못 배길 겁니다.”

발레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단탈리안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이 하나 있소. 바로 권리는 가만히 있다고 해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지.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투쟁해야만 하오.”

“아아. 편안하고 게을렀던 나날은 이제 영원히 안녕이로군요.”

마왕들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여러분께만 몰래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저는 솔직히 가미긴님께서 실패하시는 것을 내심 바라기도 합니다. 앞으로 어떤 미래가 다가올지 상상하면 목덜미가 서늘합니다…….”

“이해하오. 이포스, 본인에게도 그런 마음이 없지 않소.”

바알조차 제어하지 못했던 것이 지금의 신생 마왕군이다. 그것을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을까. 과연 파벌들을 이끌어나가거나 숙청할 수 있을까. 여기 모인 마왕들 중 어느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허나 마왕군은 잘못된 행보를 걷고 있소. 아무리 실리를 위해서라지만 명목상으로나마 인간종의 제국과 동침하다니. 무언가 잘못되었소.”

마왕들이 찬동했다.

“그렇습니다. 누가 봐도 이상합니다.”

“당장은 전쟁에서 승리했으니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지,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과 불만이 생겨날 것이오.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불평을 토로하는 마족들이 수두룩할 것이외다. 우리는 바로 그 잠재적인 불만을 십분 이용해야만 하오…….”

그럴듯한 이야기에 분위기가 조금은 풀어졌다.

사실 정말로 그런 불평분자가 있는지, 만약 있다고 해도 얼마나 될지, 그건 발레포르도 알지 못했다. 있을지도 모른다. 기껏해야 그 정도 수준의 얘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얘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

한 마왕이 말했다.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그는 오른손에 생쥐처럼 생긴 마물을 들고 있었다.

“가미긴님께 연락이 왔습니다. ……성공했다고.”

“……!”

단숨에 긴장감이 공기를 쫙 폈다.

발레포르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안, 초조, 흥분. 수십 가지의 감정이 눈동자들에 담겼다. 이것이 이제부터 자기가 짊어져야 할 시선이다, 하고 실감이 되었다.

피하는 것은 용서되지 않겠지. 정적(政敵)이 용서하지 않고, 역사가 용서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용서하지 않는다.

“주사위는 던져졌소. 갑시다.”

“예.”

마왕들은 저택에서 우르르 빠져나갔다.

그들은 당당하게 대로를 걸어 황궁으로 향했다. 찔리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게 주변에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일단의 마왕들이 들이닥치자 황궁 경비대장이 허겁지겁 마중을 나왔다. 자그마치 서열 제6위에 해당하는 마왕이 행차한 것이었다. 서열 제도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으나 여전히 마족들의 뇌리 깊숙한 곳에 각인되어 있었다.

“바다와 태풍의 지배자를 뵈옵니다! 발레포르 전하.”

“음. 오늘 회의에 참석하려고 동지들과 함께 왔네.”

경비대장이 공손한 낯빛으로 발레포르의 뒤편을 살펴보았다. 그는 지난 며칠 동안 모든 마왕과 대공의 신상을 외우느라 진을 뺐고, 덕분에 다섯 명의 마왕 전원을 알아보았다.

“황송합니다. 회의가 시작하기에는 약간 이르오니, 별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니다. 단탈리안이 머무르는 곳에 안내하도록.”

“아……궁중백 각하에게 말입니까?”

경비대장은 약간의 무례를 무릅쓰고 반문했다. 황궁의 경비대장인 그는 단탈리안이 얼마나 권력을 쥐어잡고 있는지 몸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함부로 안내했다가는 다음날 아침 경비대에서 쫓겨날 것이 뻔했다.

발레포르가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들이 이른 시각에 찾아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회의가 열리기 전 궁중백에게 공식적으로 항의하기 위해서이다.”

“알겠나이다. 당장 시녀장을 호출하겠습니다.”

발레포르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경비대장은 자기가 관여해봤자 좋을 일이 하나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가 되어 끼어들 생각은 일절 없었다. 그리하여 경비대장은 이 심상치 않으면서 불길한 주제를 다른 사람한테 간단히 넘겨버렸다.

약간의 절차를 거치고 마왕들이 황궁에 들어섰다.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궁전 건물의 코앞까지 도착하자, 저편에서 열댓 명의 시녀가 허겁지겁 달려나왔다.

그들은 정확히 일렬로 멈춰서서 마왕들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황궁 안에서는 신분이 낮은 자가 신분이 높은 자보다 먼저 말할 수가 없었으므로, 하인들은 정숙하게 허리를 굽힌 채 가만히 기다렸다.

“음. 그대들이 수고가 많도다.”

“황송하나이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엘프족 시녀장이 극히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소인에게 봉사를 명령하시면 무슨 일이든 진력을 다하겠나이다.”

“우리를 단탈리안 궁중백에게 안내하라.”

“…….”

시녀장이 일순 멈칫했다.

“송구하오나, 궁중백은 회의를 준비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본인도 오늘 회의에 참석하건만 그걸 모르겠는가? 바로 그 회의에서 논할 안건 때문에 잠시 궁중백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말문을 능숙하게 잇지 못하는 시녀장을 보며 발레포르는 확신을 얻었다. 단탈리안은 미리 시녀장에게 아무도 접근시키지 말라고 언질을 준 것이 분명했다.

“무슨 일로 주저하느냐. 설마 본인에게 궁중백을 만날 권리조차 없다는 것인가.”

“처, 천부당만부당하옵니다. 다만 지금 궁중백이 가미긴 전하를 접견하고 있는지라…….”

“오호라. 마침 잘 됐구나.”

발레포르가 짐짓 기쁘다는 듯 말했다.

“우리는 단탈리안에게 파벌이 없는 마왕들의 처지를 제고하라고 항의하기 위해 왔노라. 가미긴께서도 우리와 사정이 같으시니 오히려 호사로다. 그대는 어서 본인들을 안내하라.”

“저, 전하…….”

발레포르가 엄하게 시녀장을 쏘아보았다.

“네놈! 마왕의 언명이 우습게 들리느냐!”

마력이 담긴 사자후가 궁전 안뜰에 쩌렁쩌렁 울렸다. 시녀들이 기겁하여 그대로 바닥에 온몸을 부복했다.

“궁전이 있고 마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왕이 있고 그 다음에야 궁전이 있는 법이다! 감히 마왕들 사이의 일을 논하는 데 있어 어디 하찮은 직분을 남용하려 드는가! 당장 궁중백에게 안내하지 않으면 네놈의 두 귀를 찢어버릴 것이다!”

시녀장은 아무런 말도 반박하지 못하고 복종했다. 그녀는 일찍이 단탈리안에게 뇌물을 바친 마계 대공의 첫 번째 딸로서, 마족 사회에서는 최정상에 군림하는 일족의 한 사람이었지만 그런 권위도 마왕의 분노 앞에서는 무색해질 따름이었다.

시녀장이 몸을 떨며 마왕들을 안내했다. 한참이나 궁전 안쪽으로 들어가서야 단탈리안이 머무른다는 방이 나왔다. 시녀장이 문을 두들기려고 가까이 다가서자, 다짜고짜 발레포르가 앞질러 걸어나갔다.

“전하! 아니되옵니다!”

“우리는 한가하게 차나 마시려고 방문한 것이 아니다. 단탈리안!”

발레포르가 두 팔을 벌려 방문을 열어재꼈다.

그리고 마왕들과 시녀들이 얼어붙었다.

방안에는 금발의 아름다운 가미긴이 벽에 꽁꽁 묶여 있었다. 단탈리안은 채찍을 들고 때마침 가미긴을 내려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방문이 열리자 단탈리안이 뒤를 돌아보았고, 그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네노오오옴!”

이 순간 발레포르는 분노했다.

그것은 연기인 동시에 진심이었다.

가미긴이 가장 좋은 메모리아 영상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일찍이 부드럽고 대리석처럼 하얬던 그녀의 살결이 온통 핏자국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정신을 잃을 듯 말 듯 고개를 픽 숙이고 있었다.

“감히 지엄한 황궁에서! 네놈보다 격이 높은 마왕에게 무슨 짓을!”

그러나 절호의 기회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발레포르는 단 일 초도 낭비하지 않고 뛰었다. 최고위 마왕인 그는 단 몇 발자국 만에 단탈리안의 코앞까지 도착했다. 단탈리안이 당황하며 오른손을 뻗었다.

“자, 잠깐――.”

“불충은 죽음으로 사죄하라!”

발레포르는 그 손을 쥐어잡고 그대로 비틀어서 꺾었다. 뼈가 아스러지는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단탈리안이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악!”

그 비명이 기점이었다.

“감히 단탈리안이 가미긴 전하를 고문하고 있다!”

“저 후안무치한 역적을 쳐라!”

뒤쪽에서 무소속 마왕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들의 팔은 어느새 마력으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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