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48화 (348/510)
  • 00348 중립국  =========================================================================

    나는 담뱃대에 불을 지폈다.

    아침부터 가미긴과 엉망진창으로 섹스했다.

    그녀는 지금 침대 옆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섹스하는 내내 어린애처럼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감정의 교감이 부재하는 자리를 육체적인 쾌락으로 채우려는 것처럼.

    창문 너머에서는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

    마왕들은 모두 자의식 덩어리에 자폐증 환자이다. 정신에 병이 들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그대로 느끼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나의 감정인지 아니면 타인의 감정인지 분명하지 않다. 경계선이 흐릿하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둘러쳐져 있는 방호막이 마왕에겐 없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마왕은 사랑에 빠졌을 때도 자신에게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한다고 느끼지만 어쩌면 단지 상대방의 감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나를 좋아해주는 상대의 애정을 내 애정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으레 '나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

    마왕들은 그러나 '무엇이 나인가'라고, 정반대의 방향에서 자문한다. 그렇다. 마왕에게 있어 자기 자신이란 처음부터 확고하게 주어져 있지 않다. 스스로 찾는 수밖에 없다.

    혹은 만들어낸다.

    필사적으로 자기 자신이라 부를 만한 무언가를 쌓아올린다.

    대륙정벌이라는 목표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바르바토스. 모든 종족의 평등이라는 이상을 진지하게 추구한 파이몬. 파벌 사이의 중재를 천직으로 여기는 마르바스까지.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인간종 전체가 멸망해도 상관없다. 동족을 전부 죽여버려도 괜찮다. 자신의 정체성만 유지할 수 있다면, 수백수천만을 희생하더라도 좋은 것이다.

    균형 감각이 망가졌다고 볼 수밖에 없겠지. 정신병 환자. 망상증 환자나 다름없다.

    너무나 병적이다.

    그러나, 또한 병적이기에 아름다운 것도 있다.

    “단탈리안…….”

    가미긴이 새근거리면서 잠꼬대를 했다.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빗질하듯이 쓸어주자, 그녀는 기분이 좋은지 한 차례 몸을 뒤척였다.

    이것은 나의 것이다, 라고 여기는 물건에 대한 광적인 집착. 이 집념은 물건이 아니라 애인의 경우에도 똑같이 해당했다. 나는 가미긴의 사랑을 그렇게 이해했다.

    어떤 사람은 그걸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라 말하겠지. 무슨 상관인가.

    가미긴은 섹스하기에 즐거운 파트너이며, 이용해먹을 구석이 무궁무진한 여자이다. 우리 둘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감정이 사랑이든 집착이든 나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녀에게 조용히 귓속말을 속삭였다.

    “사랑합니다. 가미긴.”

    기분 탓인지 몰라도 가미긴이 조금 움찔한 것 같았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한동안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창가에 저녁놀이 지고 있었다.

    *  *  *

    황궁에서 한바탕 난리가 일어났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졌다.

    직접 사건을 겪은 시녀들에게 입막음을 시키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여자들이란 소문을 퍼트리는 데 천성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시녀들은 특별히 뛰어났다.

    사건이 일어나고 다음날, 황궁은 물론이고 제도(帝都)에 머무르는 모든 마왕이 소식을 접했다.

    그들이 전해들은 소문은 이러했다. 가미긴이 단탈리안 궁중백에게 무언가를 항의하러 입궐했다가 파이몬의 방해를 받았다. 결국 가미긴은 홧김에 궁중백한테 공격 마법을 쏟아부었다…….

    “올 것이 왔다.”

    마왕들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현재 제국은 누가 보더라도 무소속 파벌의 마왕들을 홀대하고 있었다. 거의 반(反) 무소속주의라 표현해도 좋았다.

    제국 각부처에 마족들이 대거 관료로 임명되어 배치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무소속 마왕들과 인연이 없는 인재들만 뽑혔다. 낮게는 황궁의 경비병에서 높게는 법무부 서기까지. 전원이 평원파의 추종자이거나 산악파의 추종자, 중립파의 추종자로 채워졌다.

    너무나 정치색이 명확한 나머지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파벌들 가운데서도 “조금 더 당파성이 옅은 인물이 필요하지 않은가” “최소한 법관들이라도 정치적으로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으로 선출해야 한다” 하고 불안감 어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에 대해서 단탈리안은 명확하게 반론했다.

    미리 준비했다는 듯, 그는 <중립에 대해서>라는 소책자를 발간했다. 스무 쪽 가량으로 이루어진 책자가 마왕들에게 뿌려졌다.

    ─ 정치에는 두 가지 종류의 중립이 있다. 소극적인 중립과 적극적인 중립이다. 소극적인 중립이란 말 그대로 당파에 무관한 인물을 요직에 앉혀두는 것으로서, 정치에 완연하게 거리를 두는 것이다.

    ─ 그러나 이는 결국 개개인의 청렴함과 정직함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국가라는 거대한 제도가 한낱 개인의 미덕에 좌지우지되는 셈이다. 이 경우, 우리는 중립성이 훼손되었을 때 어떻게 대응할 수 있겠는가? 개인들에게 미덕을 권고하고 강조할 수밖에 없다.

    ─ 궁극적으로, 소극적 중립성은 제도라는 거대한 차원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 내면의 도덕적인 문제로 소급시킨다.

    ─ 이에 반대해서 본인은 적극적인 중립성을 지지한다.

    ─ 적극적인 중립이란 철두철미하게 당파성에 입각하여 모든 요직을 배분하는 것이다. 가령 국가에 세 개의 파벌이 있다면 정확하게 1:1:1의 비율로 관직을 나눈다. 이는 제도의 문제를 제도로써 해결하는 데 의의가 있다.

    ─ 중립성이 훼손될 경우, 우리는 간단하게 힘이 부족한 당파에게는 조금 더 많은 요직을 나누어주고, 힘이 과한 당파에게서는 요직을 거둬들이면 된다. 개개인의 미덕은 중요하지 않다. 정치적 균등함만이 관건이다…….

    ─ 나는 마족이 마왕의 명령에 거슬러서 끝까지 순수한 중립을 지킬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에게 '절대적인 중립'이란 허상이고 망상에 불과하다.

    ─ 가장 명료하게, 가장 노골적으로, 가장 적나라하게 파벌의 세력비를 노출시키는 것만이 우리가 앞으로 제국을 경영해나가는 데 있어 최선의 방책이리라…….

    소책자는 즉시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현실적인 시각을 보여준다고 칭찬하는 마왕도 있었고, 파벌 논리에 파묻힌 선동문이라고 비난하는 마왕도 있었다. 이에 덩달아 마족들이 양편으로 갈라져서 싸웠다.

    사태에 정점을 찍은 것은 중립파의 지지선언이었다.

    “이 소책자는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앞으로 제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혀주고 있다.”

    마왕 마르바스는 제일 먼저 공식적으로 단탈리안을 지지했다.

    “우리 중립파가 지난 천 년 동안 이루고자 했던 중립이 바로 적극적 중립이다. 본인은 단탈리안 궁중백의 시각에 심정적으로 공감할 뿐만이 아니라 아낌없는 응원을 보낸다.”

    중립파의 거두가 내뱉은 말은 무게가 남달랐다.

    혹자는 폴리투니아에서 단탈리안이 마르바스를 도와줬음을 지적하며, 두 마왕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오고갔을 것이라 추측했지만 증명할 방법이 없는 음모론에 불과했다. 여론은 단탈리안을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무소속 마왕들이 분개했다.

    “우리들을 정치에서 배제하겠다는 뜻이지 않는가!”

    마르바스의 뒤를 따라서 도미노가 쓰러지듯 평원파와 산악파가 지지선언을 발표했다. 전형적으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무소속 마왕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들은 단탈리안을 맹렬하게 비판했다.

    “단탈리안은 바르바토스의 개이며, 파벌의 꼭두각시이다!”

    “저들이 말하는 중립이란 오직 권력의 독점을 의미한다.”

    그러나 단탈리안은 끝끝내 무소속 마왕들을 배려하지 않았다.

    작위식이 열리고 지난 두 달 동안 일어난 사태가 이러했다.

    무소속 마왕들의 분노는 쌓여만 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가미긴이 난동을 부렸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놀라지도 않았고 의아해하지도 않았다. 가미긴은 무소속의 대표자로 취급받고 있었으므로.

    늦은밤.

    무소속 마왕들이 가미긴의 저택에 모여들었다. 다름 아니라 단탈리안의 만행을 토로하는 모임으로, 벌써 다섯 번이 넘게 열렸다.

    “그자의 의도는 명백하오. 우리에게는 좁쌀만한 영지를 건네주고 자기가 제국을 좌지우지하겠다는 것 아니외까!”

    “아무런 작위를 받지 않았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합니다. 법무상이니 뭐니 직책을 받았을 때 이미 이상한 낌새를 알아챘어야 합니다. 저주받을 여우놈…….”

    여섯 명의 마왕이 포도주를 들이마시며 몇 시간이고 시끌벅적 불만을 토해냈다.

    그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신세가 퍽 처량했다. 만마의 위에서 군림하던 자신들이 어쩌다 이런 취급을 받게 되었는가. 정치적인 순수성을 지키는 자신들이 도리어 배격되고 있으니 말세가 따로없었다.

    전 서열 제6위였던 발레포르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언제까지 우리가 이렇게 참고 있어야 하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잖습니까.”

    “상대는 서열 제71위였소. 여기서 그자보다 약한 분이 계시오?”

    마왕들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발레포르가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결국 단탈리안 그자는 파벌들의 얼굴 마담에 불과하오. 개인의 무력은 하찮고 또 하찮소외다. 저쪽에서 우리를 끝까지 무시할 속셈이라면, 우리도 본때를 보여줄 필요가 있소.”

    “……발레포르. 허나 그자를 암살하기가 어디 쉽겠습니까?”

    마왕들이 떨떠름하게 반응했다.

    이미 단탈리안을 암살하자는 얘기는 수십 번도 더 나왔다. 하지만 그때마다 마왕들은 어렵다, 하고 결론을 내렸다. 단탈리안은 죽음의 기사들에게 보호를 받고 있을뿐더러 최근 들어서는 언제나 황궁에만 머물렀다.

    발레포르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본인이 운을 때었음에도 말문을 닫았다. 단지 안색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가미긴이 입술을 연 것은 그때였다.

    “가능할지도 몰라.”

    “가미긴 님? 정말입니까?”

    “으응. 확률이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어쩌면 가능할지도.”

    가미긴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포도주를 홀짝였다.

    “단탈리안의 유일한 약점은 바로 여자야. 난봉꾼으로 유명하잖아. 살짝 고백하자면, 예전에 아가레스랑 내전을 일으켰을 때 단탈리안이 나를 봐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야.”

    “…….”

    몸을 바쳐서 구명을 얻었다는 암시였다. 마왕들은 멋쩍어 했다.

    “그것 때문에 한동안 단탈리안의 애인인 척 돌아다녀야 했지.”

    “허면, 미인계를 써서 암살하자는 말씀입니까? 아무래도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너무 적어보입니다만…….”

    “그러니까 말했잖아. 방법이 있다구.”

    가미긴이 혓바닥으로 입술에 묻은 포도주 방울을 훔쳤다.

    “내가 황궁에서 단탈리안을 상처 입혔으니까 말이야. 그거에 대해서 사과하러 가야 하거든. 그런데 단탈리안이 사과를 받아주는 대신 나한테 개인적으로 뭘 요구할지 너무 뻔해~.”

    가미긴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몸을 톡톡 건드렸다. 마왕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단탈리안은 변태거든. 놀아도 보통으로 놀지 않아.”

    “보통으로 놀지 않는다는 말씀은……?”

    “변태처럼 논다는 얘기지. 마치 강간하는 것처럼 상황을 연출해서 즐겨. 뭐, 그 이상으로 굳이 내가 말로 표현해줘야겠어?”

    마왕들이 헛기침을 했다. 마계가 성적으로 자유분방하다지만 마왕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강간이란 단어를 자유자재로 쓰기란 조금 꺼려지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가미긴 님, 그걸 어떻게 이용하자는 말씀인지요?”

    “어휴. 나는 이래 봬도 제국의 공작이잖아.”

    가미긴이 손가락을 까닥까닥 흔들었다.

    “만일 일개 궁중백이 공작을 개인적으로 협박해서 강간했다고 해봐. 그 광경만 메모리아 마법으로 찍을 수 있으면 단탈리안의 정치적인 생명은 끝장나지 않겠어?”

    “……!”

    무소속 마왕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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