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47화 (347/510)
  • 00347 제국의 심처에 머무르는 자  =========================================================================

    가미긴은 실수했다.

    머리 한구석에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었다면 파이몬을 노리지 않았겠지.

    냉정하게 판단했다면 시녀들을 공격했을 것이다. 시녀를 막기 위해서 파이몬은 크게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을 테고, 결과적으로 파이몬은 그대로 공격에 노출되었으리라.

    반면에 파이몬은 거기까지 판단해두었다. 단탈리안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상대방을 도발한 것은, 가미긴의 시선에서 시녀들을 완전히 빼내려는 수작이었다.

    문제는 너무 도발이 잘 먹혀들었다는 것일까.

    파이몬은 단탈리안에게 가까이 붙으면 차마 상대방이 공격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가미긴이 단탈리안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상에 어느 여자가 연인이 위험해질 것을 감수하고 주저없이 폭력을 휘두르겠는가, 하고 방심했다.

    “아……!”

    누가 목소리를 냈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가미긴이 마법을 쏟아부은 직후 낸 목소리였는지, 정말로 공격했다는 사실에 놀라서 파이몬이 낸 목소리였는지――아니면, 파이몬을 감싸면서 손을 내민 단탈리안의 목소리였는지.

    주인이 위험에 처하자 단탈리안의 그림자에서 새카만 대검들이 튀어올랐다.

    대검들은 바람의 칼날을 대신 받아 안전하게 상쇄시켰다. 그러나 한 줄기. 미처 막아세우지 못한 한 줄기 바람이 대검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촤락, 하고 단탈리안의 팔뚝에서 핏물이 치솟았다.

    “단탈리안! 괜찮아요!?”

    파이몬이 소리쳤다. 단탈리안은 약간 신음하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뭐,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할까요. 제 악운도 질기군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피가 계속 흐르잖아요!”

    “이런 건 상처 축에도 끼지 못합니다.”

    단탈리안이 망토를 뒤적여서 포션을 꺼냈다. 그는 이빨로 포션의 코르크 마개를 빼낸 다음, 상처가 난 왼판에 아무렇게나 액체를 쏟아부었다.

    그걸 보고 파이몬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한테 주세요!”

    파이몬이 포션을 뺏었다. 자신이 걸치고 있던 이불을 지이익 찢어서 충분히 포션을 먹였다. 붕대 대용으로 이불조각을 쓰려는 것이었다. 파이몬은 단탈리안의 왼팔을 천조각으로 칭칭 둘렀다.

    “세상에, 당신이라는 남자는 정말이지…….”

    “뭘 허둥지둥댑니까. 정말 별 것 아닌 상처라니까요?”

    “얌전히 입 다물고 있으세요!”

    파이몬과 단탈리안이 툭탁거렸다.

    “…….”

    그동안 가미긴은 제자리에 꼼짝없이 서 있었다. 단탈리안의 팔뚝에서 핏물이 튀기는 광경을 보자마자 그녀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이윽고 붕대가 완성되자, 파이몬이 고개를 돌려 무시무시한 눈으로 가미긴을 노려보았다.

    “지금 제정신이에요!?”

    “나는……그러려던 게…….”

    “제멋대로 관리인들을 죽이고! 게다가 단탈리안까지!”

    “정말이야……정말로 그럴 생각은 없었어…….”

    파이몬이 가미긴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녀가 가미긴의 뺨을 후려쳤다.

    “죽음의 기사들이 없었으면 단탈리안은 죽었을지도 몰라요.”

    “무, 무영창 마법이었는걸. 그 정도로 강하지는…….”

    “당신이 죽일 뻔했다고요!”

    가미긴이 움찔했다.

    “거기까지 해두세요.”

    뒤쪽에서 단탈리안이 다가와 두 여인의 사이를 벌렸다. 파이몬은 오른팔로, 가미긴은 왼팔로. 붕대에 감긴 팔이 자신을 슬쩍 밀어내자 가미긴은 더 몸이 얼었다.

    “……단탈리안, 하지만.”

    “저는 거기까지 하라고 말했습니다.”

    파이몬이 입술을 다물었다.

    “이번 사건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  *  *

    폴리투니아에서 한건 해결하고 돌아오니 이 난리였다. 그것도 바로 다음날 아침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파이몬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저 화났어요, 하고 눈썹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자기 스스로 가미긴을 처벌하고 싶겠지. 미안하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었다.

    “파이몬. 당신은 시녀들을 추슬러주세요.”

    “고소는…….”

    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고소는 없습니다. 증인으로서 격이 떨어집니다.”

    작위식이 열린 지 이제 겨우 두세 달이 지났다. 그런 시점에서 막 공작에 오른 가미긴이 구설수에 올라버린다? 농담이 아니다. 제국 전체가 망신거리로 전락해버린다.

    그뿐만이 아니다. 파이몬은 산악파를 대표하고 가미긴은 무소속을 대표한다. 두 사람이 제국 법정에서 맞부닥치면 그건 이미 일대일 싸움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어느 한쪽의 파벌이 끝장날 때까지 폭주하겠지.

    “가미긴의 명예는 비단 가미긴 한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제국의 명예이지요.”

    “허울밖에 없는 명예 따위는 없어지는 편이 차라리 나아요.”

    파이몬이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잘못을 고칠 수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국가의 저력을 나타내지요. 잘못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제국을 더 해롭게 만들 거예요.”

    “저런. 혹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파이몬의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번 사건은 제가 처리하겠다고 말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아.”

    파이몬이 자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따로 대답하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아직 복도에 주저앉아 있는 시녀들을 다독여서 일으켜 세운 다음, 파이몬은 황궁을 빠져나갔다.

    내가 쓰게 웃었다.

    이거야 원.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난리인지.

    마법을 날아왔을 때 나는 놀라지 않았다. 가미긴이 폭주하는 모습이야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놀라움보다는 솔직히 '또냐' 하는 심정이 앞섰다.

    이럴 때 가미긴을 진정시키는 방법은 간단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으면 되었다.

    죽음의 기사들에게는 일부러 바람 한 줄기를 놓치라고 명령했다. 아마도 가미긴은 내가 무도회장에서 칼로 복부를 찌른 것이 트라우마로 단단하게 박힌 모양이었다. 내가 피를 흘리면 거의 본능적으로 사고가 마비되었다.

    “…….”

    지금도 가미긴은 멍하게 내 왼팔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 참, 파이몬은 쓸데없는 배려를 해주었다. 붕대로 숨겨두지 않고 상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편이 좋았다. 그래야 가미긴이 심리적으로 더 불안해할 테니까. 정말 괜한 참견이었다.

    어쩔 수 없지. 이빨이 없으면 잇몸이다. 약간 연기해볼까.

    “으으윽…….”

    나는 갑자기 상처가 아파온 것처럼 팔뚝을 붙잡았다. 허리를 살짝 굽히는 디테일도 까먹지 않았다. 그러자 가미긴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단탈리안!”

    가미긴이 급하게 내 몸을 부축했다. 뭐라고 할까. 너무 의도한 대로 반응해서 재밌었다. 그녀는 나에게 미움을 받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미안해……내가 실수해서……하지만 고의가 아니었어……!”

    “물론 알고 있습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아픔을 참아내는 듯이 힘겨운 미소였다.

    “당신이 고의로 저를 공격했을 리가 없지요.”

    “맞아. 그 창녀 때문이야. 걔가 쓸데없이 피해서…….”

    “하지만 실망했습니다.”

    가미긴이 뚝, 하고 멈추었다.

    “어?”

    꼭 실이 끊어진 인형 같았다.

    내가 입가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파이몬 옆에는 바로 제가 있었습니다. 자칫 조준이 엇나갔다면 제가 맞았을 것입니다. 가미긴, 당신은 제가 맞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무런 주저도 하지 않고 마법을 썼습니다.”

    “나는 정확히 파이몬을 노렸어…….”

    “만에 하나. 백분의 일이라도 빗나갈 확률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가미긴의 황금색 눈동자를 냉정하게 노려보았다.

    제법 오랫동안 사귀어본 결과, 알아낸 사실이 하나 있었다. 가미긴은 내가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거의 견디지 못했다. 지금쯤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겠지.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생각조차 할 수 없으리라. 단순히 말문이 막혔을 뿐이지만, 나는 그녀의 침묵을 무언의 긍정으로 활용했다.

    “역시 그렇군요. 제가 다칠지 모르는데도 당신은 공격한 겁니다…….”

    가미긴이 두 손으로 내 옷자락을 꾸욱 잡았다. 무릎에서 힘이 풀렸는지, 그녀는 서서히 바닥에 꿇어앉았다.

    “아……니야. 단탈리안. 날 믿어줘……정말로 아니야…….”

    “저는 당신에게 사죄하기 위해 자해까지 했는데.”

    가미긴이 창백해졌다.

    “당신은 결국 제 안전보다 자기 자신의 분노를 푸는 것이 소중합니다. 저보다 당신의 감정이 우선이지요. 가미긴. 알려주십시오. 당신의 감정을 만족시키려면 제가 얼마나 더 상처 입어야 합니까?”

    “아니야, 단탈리안. 정말 아니야…….”

    내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기껏 저한테 한다는 변명이 아니라는 말밖에 없습니까. 예전에 현명했던 당신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군요.”

    “너가 파이몬을 우선했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화가 났을 뿐이야!”

    가미긴이 허둥지둥 입술을 열었다. 어떻게든 변명하려는 모습이었다.

    “그 전에 시녀들이 날 모욕해서! 그러니까, 파이몬이 제멋대로 끼어들어서……나는 너가 돌아왔는지 몰랐는데 파이몬은 알았다고 하니까…….”

    애인이 명백하게 잘못한 상황.

    여기서 상대방을 더 궁지에 몰아세우는 방법은 간단하다. 변명을 꼼꼼이 들어주는 척하면서 상대방이 잘못한 점만 끄집어내는 것이다.

    단, 계속해서 똑같은 잘못을 지적하면 안 된다. 상대방에게 이성을 되찾을 여유를 안겨주고 만다. 원투 펀치를 먹이듯이 게속해서 새로운 잘못을 들춰내야 한다. 그러면 상대방은 생각할 여유를 잃어버리고 변명밖에 못한다.

    예컨대.

    “가미긴. 어떻게 제가 돌아온 걸 알았습니까?”

    “어……?”

    “황궁에 첩자를 심어둔 것입니까? 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고요?”

    가미긴의 얼굴 표정이 무너져내렸다.

    빙고.

    “솔직하게 대답해주십시오. 정말로 절 감시하는 사람을 심어두었습니까? 저를 믿지 못해서요? 제가 당신에게 뭔가를 숨긴다면 전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까?”

    “아,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단탈리안, 그런 게 아니라 그냥 혹시 몰라서…….”

    “혹시라도 저를 의심했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나는 감정에 복받쳐서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흘리는 데 굳이 감정이 진짜여야 할 필요는 없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모든 감정은 진짜다. 단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진짜인가 거짓인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 나 정도가 되면 5초 만에 눈물을 흘릴 수 있다.

    “아…….”

    눈물이 흐르자 가미긴은 완전히 사고가 정지했다.

    남자의 눈물이란 원래 비장의 순간을 위해 아껴두어야 하는 법. 여태까지 나는 가미긴 앞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 달리 말해, 가미긴은 지금 처음으로 내 눈물을 목격한 것이었다.

    “아, 아…….”

    “어떻게 저를 의심할 수 있습니까. 가미긴, 제가 당신에게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저는 당신에게 제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모라비아의 땅을, 슐레지엔의 땅을……공작위를, 가장 명예로운 자리를, 그 모든 것을 선물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애인에게 무엇을 해주었는지 밝힐 때는 될 수 있는 한 정확하게 묘사해야 한다.

    땅이라고 말하지 않고 모라비아의 땅이라고 말한다. 작위라고 말하지 않고 공작위라고 말한다. 추상적일수록 적게 상처를 입고, 구체적일수록 날카롭게 상처를 입는다. 기본 철칙이다. 단, 자그마한 선물은 제외하고 가장 커다란 선물만 깔끔하게 언급한다.

    “그런데도 당신은 단 하루조차 저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아니야, 단탈리안……제발…….”

    “저는 당신에게 모든 헌신과 노력을 바쳤건만, 그 대가로 돌아오는 것은 의심과 첩보원입이로군요. 그것이 당신의 사랑입니다. 하루조차 허락해주지 않고 상처를 입히는 사랑입니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가미긴의 얼굴에 내 얼굴을 파묻었다. 내가 잔뜩 흘리는 눈물이 그대로 가미긴의 뺨으로 옮겼다.

    “가미긴, 대답해주세요……가미긴. 제가 당신을 믿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당신을 믿고 싶은데 너무 아픕니다……너무 아파요, 가미긴…….”

    그리고.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단탈리안, 내가 잘못했어……미안해…….”

    가미긴이 눈물을 터트렸다.

    “의심해서 미안해……내가 생각이 짧았어……미안…….”

    서로의 눈물로 그녀와 내 얼굴이 범벅이 되었다.

    지금 가미긴은 이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감성만으로 사죄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올바른 태도라고 믿으면서. 내가 그녀에게 준 상처를 망각하고, 그녀에게 애당초 조바심과 의심을 심어둔 장본인이 나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순전히 자기가 잘못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가미긴은 연애경험이 전무했다. 상대방한테 입은 상처 그리고 상대방에게 준 선물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전략적인 안목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사랑이 전쟁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정말입니까? 제가 당신을 한 번 더 믿어도 괜찮은 걸까요……?”

    “정말이야……미안해, 미안해…….”

    이쪽이야말로 미안하다, 가미긴. 원래 첫사랑은 처참하기 마련이다. 다만 누구한테 걸리느냐에 따라 참혹함의 정도가 달라진다.

    멍청한 남자한테 걸리면 그럭저럭 나빠지고, 무책임한 남자한테 걸리면 꽤나 많이 나빠진다. 모든 남자는 멍청하거나 무책임하거나 둘 중 하나이므로 첫사랑이 처참해지지 않을 확률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제 작은 부탁을 들어주세요. 그러면 당신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최악은 연인을 이용하는 남자한테 걸리는 것이다.

    모쪼록 하늘을 원망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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