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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345화 (345/510)
  • 00345 제국의 심처에 머무르는 자  =========================================================================

    어색한 공기가 우리 둘 사이에 흘렀다.

    회군하는 병사들이 주변을 지나치고 꾸역꾸역 걸어갔다. 마르바스와 나만이 시냇물에 박힌 바윗돌마냥 말발굽을 멈춘 채 그 자리에 박혔다.

    “흐음. 흠.”

    마르바스는 어째서인지 나를 정면에서 바라보지 않고 다소 비스듬하게 쳐다보았다. 그 각도와 눈빛은 틀림없이 이쪽의 반응을 기다리는 것. 기세에 떠밀려 말해놓고 상대방이 어찌 나올까 조심히 관망하는 태도였다.

    내 시선과 마르바스의 시선이 몇 번 교차하고 미끄러졌다. 그러자 어색한 공기에는 새로운 색채가 더해졌다. 마치 부드럽고……그러면서도 간질간질하고 무언가 야리꾸리한…….

    잠깐만.

    잠깐 기다려봐라.

    이건 뭐냐. 지금 내 온몸의 신경세포를 분홍색으로 휘감으려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이 촉수의 점액질과 같은 분위기는 대체 뭐냐!

    마르바스, 당신은 왜 자꾸 내 눈길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겁니까. 절 보십시오. 아니, 눈길을 피하지 말고……군단장 각하? 저기요? 능구렁이 영감탱이 씨? 세바스토크라토르……?

    문득 머릿속에서 최악의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마르바스는 현재 호감도가 50을 찍고 있었다. 그러니까……호감도가 50이라서……나에 대한 감정이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 무언가 이상하게. 이 시대에는 어린 동성 애인을 양자로 들이는 풍습이 있기도…….

    ‘그럴 리가 없다!’

    마음속의 무언가가 절규했다.

    나는 그러나 원망스럽게도 아무리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이더라도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하도록 습관이 되어 있었다. 주인이 절찬리에 카오스의 폭풍에 휘말리는 도중에도 이성적인 자아들이 남았다.

    자아의 파편들이 냉정하게 현황을 논의했다.

    ‘설마 양자 이벤트가 호감도 락을 해체하는 조건이었다니.’

    ‘맹점이었던 거야.’

    ‘마르바스까지 함락하면 바르바토스, 파이몬이랑 합쳐셔 삼관왕 플레이 오케이?’

    ‘제국의 궁전에서 시녀는 목격했다. 충격보도 360일.’

    내 이성은 죄다 빌어먹을 쓰레기 자식들이었다. 이런 새끼들을 데리고 천하를 논하느니 차라리 시트리한테 제국 섭정을 맡기는 편이 훨씬 유익하리라.

    “…….”

    “…….”

    일초가 흐를수록 우리 주위의 공기가 기묘해졌다. 정체도 모르거니와 밑도 끝도 없는 부끄러움과 머뭇거림이 칵테일되고 있었다. 도저히 참기 힘들었다. 난 이런 공기가 쥐약이었다! 정말로 싫었다. 증오한다고 표현해도 부족했다.

    여기서 허둥지둥거려도 볼썽사나울 뿐이었다. 그러했다. 3cm 철갑을 가뿐히 씹어먹을 정도로 견고한 내 철면피를 사용하자. 나는 침착하게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마, 마르바스 님. 양자란, 무슨 뜻인지요?”

    ――침착하게 대응하기는커녕 말을 씹어버렸다.

    분위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팝콘을 튀긴 것처럼 들떴다.

    틀렸다. 글러먹었다. 고등학교 시절 처음 미팅에 나가서 여자 고등학교 학생이랑 얘기할 때와 비스무리한 공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끔찍한 재앙이었다.

    “말 그대로. 자네가 내 양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외람되오나, 저, 저는 누구의 아들이 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습니다.”

    “본인은 상관없네.”

    마르바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단탈리안. 자네라는 사람 자체가 중요하다.”

    “…….”

    그렇게 열렬하게 고백해와도 이쪽은 곤란할 뿐이다!

    나는 졸지에 붕어가 된 기분으로 입을 뻥긋거렸다. 머리가 너무 과열된 나머지 어떻게 무슨 식으로 말을 내뱉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저 혓바닥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 부모와 자식의 인연이란 조금 더 서로가 서로를 충분히 알고 나서 논해야지 옳다고 할까요. 전하와 저 사이에는 아직 이르지 않을까요.”

    “섭섭하군.”

    마르바스는 적잖게 실망한 어조였다.

    “본인은 출생과 나이를 뛰어넘어 그대와 진정한 의미에서 마음을 나누었다고 생각하네. 우리가 조금 더 단단한 인연으로 묶이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아……그것이 말입니다……네, 그렇지요…….”

    긍정하지 마라, 멍청아!

    웬 숫처녀처럼 우물쭈물거리는 목소리가 저절로 튀어나갔다. 세상에. 정말로 내가 낸 목소리가 맞기는 한 건지 의문이었다. 뭇 여마왕들의 마음을 농락했고 심지어 시트리까지 사로잡았건만 겨우 동성에게……까마득하게 나이가 많은 남자한테……그것도 스무 살 서른 살 수준이 아니라 수천 년이나 연상인 사람한테……!

    “단탈리안.”

    마르바스가 내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나는 딸꾹질이 나올 만큼 깜짝 놀랐다.

    “네, 네.”

    “본인은 타인을 속일지라도 자기 자신에게는 거짓말하지 않겠노라고 맹세했다. 자신의 신념에 대해서.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바에 대해서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말일세. 마르바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대, 본인은 진심으로 제안하고 있다네. 알겠는가?”

    마르바스의 나지막하고 그윽한 목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들려왔다. 회백색 눈동자가 더없이 진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이것이 마계의 여성들에게 천 년이 넘도록 부동의 인기를 자랑하는 미중년인가. 아가씨와 아줌마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얻는다고 들었는데, 남자인 내가 봐도 멋지게 나이가 들었다…….

    눈썹과 턱수염은 매일마다 정성스럽게 관리하는 것이 분명하겠지. 적당한 길이에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었다. 주름은 자연스럽게 접혔다. 나이에 의해서 접혔다기보다 수많은 감정이 누적되고 누적되어 그 무게에 의해 저절로 파인 느낌이었다. 그래. 깊이가 있었다. 향수조차 기분 좋게 은은했다…….

    ‘아니. 이게 아닌데!’

    필사적으로 정신줄을 붙잡았다. 깊이는 무슨 얼어 죽을 깊이인가!

    나는 여자가 좋았다. 백 번 양보해서, 진짜 백 발자국 양보해서 시트리까지는 허용하더라도, 진짜 남자를 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 마르바스 전하.”

    “본인은 자네를 믿고 있네. 아아. 믿고말고――.”

    마르바스가 그윽하게 눈빛을 보내왔다.

    지금 마르바스를 거절하면 호감도가 확 줄어들지도 몰랐다. 중립파에 대한 영향력도 덩달아 감소하겠지. 그래도 괜찮았다. 인간으로서, 아니 마왕으로서 무언가 소중한 것을 지켜야만 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죄송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단탈리안. 용감하고 과감하게. 미래에 행여나 후환을 남기지 않도록. 당신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죄, 죄송하지만 소인은!”

    “――자네야말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차기 황제가 될 인물이라고.”

    …….

    경직의 시간이 흘러갔다.

    나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예? 황제라니요?”

    “자네도 알다시피 본인은 황부(皇父)가 되었다. 황실의 일원으로 공인된 것이지. 공화국의 통령은 합스부르크라는 성씨를 버렸으니, 사실상 루돌프를 제외하고 본인이 유일한 황족인 셈이다.”

    처음에는 마르바스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마르바스의 진중한 목소리는 꼭 노크하는 것처럼 내 두개골을 가볍게 두들겼다. 그러자 뜨거운 수증기에 감싸였던 정신머리가 서서히 돌아왔다.

    “본인이 자네를 양자로 맞이하면, 단탈리안. 자네는 대륙에서 유일하게 합스부르크 제국의 제위를 이어받을 후계자로 거듭난다네.”

    “아, 아. 그래서 소인한테…….”

    요컨대 마르바스는 꼼수를 고안해낸 것이었다.

    제국에는 현재 공식적인 후계자가 전무했다. 황족이란 황족이 싸그리 죽어버렸으니 당연했다. 내가 마르바스의 양아들로 들어가면 최소한의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땅바닥이 꺼지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휴. 저는 그런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 또.”

    “음? 무슨 소리인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착각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비밀로 안고 살자.

    나는 상황을 이리저리 정리해보았다. 이번에야말로 얼굴 표정을 제대로 가다듬었다.

    “전하. 확실히 흥미로운 계획입니다. 허나 마왕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인간종은 가만히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공동황제로 즉위하면 그만일세.”

    마르바스가 즉답했다.

    “적당한 인간 여식을 아내로 맞이하게. 아내를 여황제로 추대하고 자네는 부군이 되는 형식이다. 자네의 부인은 명목상의 여황제로 남는다.”

    “……!”

    과연. 여황제의 부군이라는 방법이 있었는가.

    아무 왕국에서나 그럭저럭 지위가 높은 왕녀를 데려온다. 현재 제국과 친교를 맺고 싶어하는 나라는 수두룩했다. 그렇게 수입해온 왕녀를 바르바토스의 흑마법으로 세뇌시킨 다음, 철두철미한 꼭두각시 여황제로 만들어버린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일 분의 시간이 흐르고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가능……하군요. 예. 가능할 것 같습니다.”

    “자네는 마왕군에 존재하는 세 개의 파벌 전부에서 인망을 얻고 있네. 자네가 황제에 오르면 약간의 잡음이 있을지언정 큰 반발은 없겠지.”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도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 언제까지나 시체로 조종할 수는 없다.

    나는 엘리자베트 통령과 바토리 대왕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했지만, 그건 우리 제국에도 적용된다. 루돌프 황제가 늙어죽지 않으면 우리를 의심하는 인간들이 틀림없이 생겨난다.

    루돌프 다음으로 누가 황위를 이을 것이냐. 이것이 문제였다.

    바르바토스가 즉위해도, 파이몬이 즉위해도, 마르바스가 즉위해도 문제는 발생한다. 마왕군이 내전에 휩싸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바싸고나 가미긴은 아예 논외에 해당한다. 그들에겐 마왕군 전체를 다독일 균형 감각이 없다…….

    “단탈리안. 자네가 아니라면 황제에 즉위할 인물이 없다.”

    그렇기에 마르바스는 나를 대안으로 선택했으리라.

    세 파벌 모두에게 어느 정도 신뢰를 받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각 파벌 수장들의 호감을 사고 있다. 제국을 안정적으로 조율할 위치에 서 있다.

    흥미로웠다. 이건 내가 그려놓은 구상과 180도 다른 미래도였다.

    나는 제국의 음지에 숨어서 파벌들을 조종해나갈 계획이었다. 반면에 마르바스는 내가 정면에 나설 필요가 있다며 역설하고 있었다. 궁극의 약자택일이라 해도 좋겠지. 막후의 지배자인가, 아니면 만인지상의 황제인가. 음지인가, 양지인가…….

    “자네도 아까 전에 말했지. 제도가 뒷받쳐주지 않는 집단은 결국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단탈리안, 제국이라는 집단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제도는 바로 후계자에게 있네. 후계자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제국이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

    올바른 지적이었다. 루돌프 황제의 치세가 끝나면 어찌할 것인가. 나로서는 아직까지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였다…….

    “……마르바스 전하. 소인은.”

    “알고 있네. 갑작스러운 제안이겠지.”

    마르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에게 충분히 시간을 주고자 한다. 일 년 동안 고민해도 좋고, 십 년 동안 고민해도 좋다. 아직 우리에게는 제법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마르바스가 말고삐를 당겼다. 군마가 가볍게 투레질을 하며 발굽을 들어올렸다. 나도 그를 따라서 천천히 말을 몰았다.

    “하지만 기억하게, 단탈리안.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은 결코 영원이 아니다. 앞서 준비하는 자만이 시대를 지배할 수 있다. 그리고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해 앞서 준비할 수 있는 자는 자네밖에 없네.”

    “…….”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여황제의 부군이 된다.

    굳이 타국의 왕족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되었다. 성녀를 이용할 수도 있으리라. 성녀는 원칙적으로 결혼할 수 없지만 간단히 성녀의 자리를 포기함으로써 부부의 예를 올릴 수가 있었다.

    성녀와 마왕의 결합에 전 대륙은 환호하겠지. 정치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보장받는다.

    음지에 머무르는 편이 유리할까, 양지에서 모든 것을 지휘하는 것이 유리할까. 나는 말을 몰면서 계속해서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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