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43화 (343/510)

00343 제국의 심처에 머무르는 자  =========================================================================

“한 방울의 피를 흘리지 않는다? 지나치게 달콤하여 되레 버겁구나.”

“대왕. 삶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나 멀리서 보면 희극인 법입니다.”

본래 찰리 채플린이 한 명언이나 이 세계에는 당연하게도 위대한 독재자가 없었다. 저작권은 나에게 있었다.

바토리 대왕이 잠시 멈칫하고 눈썹을 가운데로 모았다. 내가 던진 말을 음미하는 것 같았다.

“한 줄기의 현명함이 담겨 있구나. 무엇이든 멀리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느냐.”

“멀리서 바라보기 위해서는 무언가 하나쯤을 포기할 수 있어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옳다.”

바토리 대왕의 입꼬리가 슬그머리 올라갔다.

“삶의 진지함을 포기하는 자는 진지함을 비웃을 수 있다. 투쟁을 포기하는 자에게 타인의 피 흘리는 투쟁이란 단지 쓸데없이 웃긴 발악에 불과하다. 제국의 번견이여! 그러나 버리는 자는 버림으로써 무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가벼워지는 것이다!”

거인은 말꼬리를 쥐어잡고 일갈했다.

“왕이란 무거운 자다. 또한 마땅히 무거워야만 한다. 짐의 어깨에 신민 천만의 생명과 왕국 육백 년의 역사가 도사리고 있노라. 그 무게를 경계하라.”

“위대한 바토리여. 저만큼 무게에 정통한 자도 없습니다.”

내가 작게 웃었다.

“대왕과 저 사이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쌍방이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는 길입니다. 우리는 양끝에서 출발함으로써 길의 중간에서 만나겠지요. 결국, 두 사람 모두 반절의 길밖에 걷지 못한 채 발걸음을 멈추고 말 것입니다.”

“짐의 군대가 승리하지 못하리라 생각하는가?”

바토리 대왕이 불곰처럼 으르렁거렸다.

“짐은 그대들을 죽이고 영토를 탈환할 것이다. 패배는 그대의 몫이다.”

“전면전이라.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나는 상대방의 눈동자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폴리투니아의 평원에 살아가는 모든 목축과 나무는 싸그리 불타 죽을 것입니다. 대왕이 자랑스러워하는 신민은 아기와 말에게 먹일 하루 끼니도 찾지 못하고 굶주림에 쓰러질 것입니다. 흑마법사는 역병을 흩뿌릴 것이요, 해골과 시체가 초원을 배회할지어니!”

바토리 대왕이 나를 잡아먹을 기세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중요한 대목이었다. 기세에서 밀려버리면 죽도 밥도 안 되었다.

나는 싸늘한 비웃음을 적나라하게 내비추었다.

“혐오스러운 묘지에서 매일밤마다 식인의 환호성이 울리고, 마족은 장난 삼아 수만 명의 인간을 장님으로 만들어 서로가 서로를 죽이게끔 한바탕 축제를 펼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인류의 도덕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스테판 바토리.”

“…….”

“나는 단탈리안. 산 자를 모욕하고 역병을 퍼트리는 자입니다. 인간의 군주여! 마왕의 이름을 가벼이 여기지 마십시오.”

살벌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검은 수염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번째 방법은 무엇인가?”

나는 잔뜩 뜨겁게 달아오른 심장을 진정시켰다. 좋다. 가장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쌍방이 함께 길을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영토를 동시에 포기한다고?”

바토리 대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쪽의 의도가 무엇인지 가늠하는 기색이었다.

“영토의 절반은 아레스의 대신전에 봉납합니다. 나머지 절반은 아테나의 대신전에 바칩니다. 이 땅은 앞으로 귀국과 저희가 평화로운 맹약을 맺은 증거로 남을 것입니다.”

“…….”

대왕의 눈빛이 깊어졌다.

아레스는 폴리투니아 왕국을 대표했고, 아테나는 브르타뉴 왕국을 대표했다. 다만 아테나 신전은 최근 들어 명백하게 친(親) 합스부르크 제국을 표방하고 있었다.

요컨대 폴리투니아 왕국과 우리가 반반씩 영토를 나눠갖는 것. 눈가림용 속임수였다. 검은 돈을 이리저리 세탁하듯이, 영토의 출처를 신전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세탁한다고 할까.

“배부른 사제들에게 공으로 땅을 선물하라는 말이냐.”

“신전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보다 체면입니다. 양국의 평화, 더 나아가 대륙의 평화를 위하여 나선 셈이 됩니다. 잔뜩 콧대가 높아지겠지요. 어느 사제를 파견할 것인지는 대왕께 결정권이 주어질 것입니다.”

대왕이 혀를 찼다.

“나쁘지 않은 계책이나 달갑지 않다. 신전에, 그것도 두 개의 신전에 빚을 만들어두는 꼴이지 않는가. 짐은 그들에게 채무를 느끼고 싶지 않노라.”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정반대?”

나는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 아레스의 대신전은 포세이돈 대신전, 헤스티아 대신전과 함께 제국을 비난했지요. 열두 곳의 대신전 중에서 오직 세 곳만 그러했습니다. 지금쯤 그들이 고립감을 느끼고 있지 않겠습니까?”

“……!”

바토리 대왕이 침음을 흘렸다.

“과연. 신전들이 서로 화해하도록 오히려 우리가 배려해주는 모양새가 되는가…….”

“더군다나 명목상으로, 우리는 신전들에 영지를 봉납합니다.”

신전들 입장에서는 세 가지 이득이 있었다.

대륙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명분, 서로 서먹해진 관계를 자연스럽게 회복, 명목상으로 늘어나는 신전의 토지까지. 이게 웬 떡이냐면서 우리의 제안을 냉큼 받아들이겠지.

“대왕께서 이참에 사제들한테 크나큰 빚을 지워두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

바토리 대왕이 장고에 들어갔다.

“후우.”

문득, 그가 하늘을 높이 올려다보더니 장탄식을 흘려보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위로 딸려갔다. 얄밉도록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대는 무서운 자로고.”

여태까지 바토리 대왕의 온몸을 감싸고 있던 위압감이 불현듯 어딘가로 가라앉았다.

왕자(王者)의 카리스마가 증발하고 나자, 그곳에 있는 것은 더 이상 대륙의 초원을 호령하는 대군주가 아니었다. 한 명의 중년이 안장에 올라탔을 뿐이다.

다만 검은색 눈동자가 유독 깊었다. 천성적인 직감과 수많은 경험에서 비롯한 깊이였다. 얼굴 주름에는 세월의 풍파가 거칠게 녹아들어 있었다.

“그대가 모시는 황제의 여동생에게 들었다. 제국의 심처에는 한 마리의 독거미가 산다고…….”

“…….”

“눈치 채보면 이미 거미줄에 사로잡혀 움직일 수 없으며, 움직이자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던가. 그녀가 실로 올바르게 말했구나.”

이미 엘리자베트는 바토리 대왕과 인연을 만들어두고 있었는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몰린 나라를 재건하면서 동시에 주변국과 몰래 협조했다. 엘리자베트이기에 가능한 묘기이겠지. 그리고 주변국과 협조를 꾀한 이유는 아마도 단 하나, 나를 사방에서 포위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엔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제가 독거미라면 그녀는 교룡입니다. 때를 만나지 못해 승천하지 못했을 따름이지요. 능히 대륙 전체를 오시할 재능이 있습니다.”

“알고 있노라.”

바토리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였다.

바토리는 어딘지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짐도 젊을 적에는 대륙을 아우르고자 했다. 청년의 혈기였지.”

“…….”

“허나 천운이 부족하고 재능이 부족했다. 짐에게 주어진 왕국 하나를 건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기에 보고 싶었다. 짐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대륙을 정벌하는 광경을. 그 눈부신 재능을…….”

그랬는가.

<던전 어택>에서 폴리투니아 왕국은 퀘스트 하나를 깨면 간단하게 용사를 지지했다. 본래부터 제국과 우방국인가 싶었지만, 스테판 바토리의 개인적인 열망이 숨겨진 모양이었다.

“어리석은 소망이라 해도 좋다. 마왕이여, 이해하겠는가. 짐은 단지 증명되기를 바란 것이다. 짐이 어릴 적에 꿈꾼 광경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는 것을. 결코 불가능하지 않음을 증명받고 싶었다.”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당신의 삶이겠지.

나는 당신의 삶을 기꺼이 긍정한다.

“그런데 저에게 협력해도 좋겠습니까?”

내가 반쯤 장난스레 입끝을 들어올렸다.

“저는 엘리자베트 통령의 미래를 가로막을 자입니다. 지금 저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그녀가 구상한 계획은 망가질 것이요, 대왕의 꿈을 이어받을 자가 좌절할 것입니다.”

“으음.”

바토리 대왕이 얼굴을 찡그리며 턱끝을 돌렸다.

“대륙의 제왕이 되겠다는 여걸이 겨우 짐 때문에 좌절해서야 쓰겠는가? 만일 좌절한다면 결국 그 정도 그릇이라는 뜻이다. 그녀가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다.”

나는 크게 웃고 말았다.

“저 단탈리안, 대왕의 드넓은 도량에 실로 감복했나이다. 과연 천만의 생명과 육백 년의 역사를 짊어질 만한 뻔뻔함입니다.”

“짐이 그런 칭찬을 자주 듣는다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바토리 대왕이 대답했다. 이거 걸물이었다.

바토리 대왕에게 호감이 생겼다. 게임에서도 위대한 군주라 자주 묘사되길래 그냥 그런가 싶었건만, 실제로 보니 재밌는 아저씨가 아니고 뭔가. 이 남자의 오만함과 뻔뻔함이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무엇을 숨기겠는가. 나는 뻔뻔함을 사랑했다. 왜냐하면 오직 뻔뻔한 자만이 삶의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즐기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만끽하는 모습이란 언제나 흥겨웠다. 이런 자야말로 속이고 배신하며 모욕하는 가치가 있었다. 우리의 삶을 한결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부류였다.

좋다. 당신에게 깜짝 선물을 건네주도록 하자.

내가 흥에 겨워 마치 노래하듯이 말했다.

“위대한 바토리여. 대왕에게는 여동생이 한 분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아아. 짐이 소년일 때 안타깝게도 유명을 달리했노라.”

바토리 대왕이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 양반은 소년 시절 여동생과 사랑을 나누었다. 육체적인 사랑이 아니라 정신적인 사랑이었다. 엄격한 궁정 생활, 그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준 것이겠지.

아름다운 왕녀는 한창 꽃다운 열다섯 살에 죽었다. 적어도 세간에 그리 알려졌다.

“왕녀가 살아 있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

공기가 바뀌었다.

넉살 좋은 남자가 사라지고 본능적으로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맹수가 나타났다. 눈동자에서 약간의 호감은 순식간에 없어졌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이쪽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처럼 눈빛이 맹폭했다.

“네놈. 어떻게.”

“왕녀는 어릴 때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불운이었지요. 왕녀가 나병에 걸렸다는 것은 그 자체로 폴리투니아 왕가의 명성에 큰 해가 됩니다. 대왕께서는 사랑하시는 동생을 죽음으로 위장하고, 멀리 외딴 별장에 숨겨두었습니다.”

“…….”

이게 폴리투니아 왕국을 용사편으로 끌어들이는 한 개의 퀘스트였다.

“왕실에서 엄선한 치료 마법사 덕에 여태까지 생존하고 있습니다만, 실로 괴롭고 저주스러운 인생 아니겠습니까. 제 호의입니다. 마계의 의사를 대왕께 보내도록 하지요.”

“설마…….”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치료할 수 있습니다.”

“말도 안 된다!”

바토리 대왕이 버럭 소리쳤다.

“백방에 처방을 구해도 무용지물이었거늘!”

“인간계는 아무래도 흑마법에 미숙하지요. 허나 마계는 다릅니다.”

“흑마법이라니.”

바토리 대왕은 아연해진 얼굴이었다.

“동생께서 걸리신 병은 단순한 문둥병이 아닙니다. 교묘하고 음습한 흑마법의 저주가 걸려 있습니다. 뭐, 너무 마법사와 사제를 탓하지 마십시오. 인간계에서 흑마법이 실전된 지 이미 천 년이 흐르지 않았습니까?”

“그대가 어찌하여 그것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상냥한 미소를 머금었다.

“저는 단탈리안입니다. 마왕의 이름을 가벼이 여기지 마십시오.”

그 이상 물어보지 말라는 협박에 상대방이 침묵했다.

나는 오른손을 건네었다.

“대왕. 제가 귀국의 영원한 우정을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

느긋하게 기다렸다.

바토리 대왕은 오른손으로 내 손을 마주잡았다. 손에서 미약하지만 떨림이 있었다. 매우 기분이 즐거웠다. 인간은 마왕에게 딱 이 정도 두려움을 안고 사는 것이 좋았다.

엘리자베트의 우군이 한 명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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