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42화 (342/510)

00342 제국의 심처에 머무르는 자  =========================================================================

“제국의 중심인가.”

마르바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단순한 수사학일까, 아니면 이쪽의 의도를 간파했다는 암시일까. 만약에 간파했다면 어느 정도까지 알아챘는가…….

마르바스는 단탈리안의 눈동자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적이 대군을 끌어모았네. 폴리투니아의 국왕이 직접 군대를 통솔하고 있지. 중앙에서 원군을 보내주지 않는다면 힘겨운 싸움이 될 것이야.”

“아무리 군세를 모아본들 어찌 마르바스 전하 한 사람에게 당하겠습니까?”

우물처럼 새카만 눈동자가 웃음기로 반짝거렸다.

저 눈동자 때문이었다. 무해하고 힘없는 초식동물마냥 단탈리안의 눈에는 반쯤 유약한 구석이 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물어뜯으면 바로 항복해버릴 것 같았다.

저것 때문에 단탈리안을 상대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깔본다. 그러나 안심해서 공격하면 터무니없는 반격이 돌아온다.

이쪽이 무기를 쓰지 못하도록 틀어막고 사방에서 포위한다. 눈치채보면 이미 사지가 묶여 있다. 마치 거미와 같은 인물이다. 사냥꾼의 눈을 현혹하는 독거미…….

단탈리안은 둘 중 하나이겠지. 천성적인 위장술을 지녔거나, 혹은 눈빛마저 자유자재로 조종할 만큼 능숙한 희대의 배우였다. 어느 쪽이든 지극히 위험한 부류임에 틀림없었다.

“본인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수만의 대군에 필적할 수는 없다.”

“싸우지 않고도 승리하는 것이 병가의 상책이라 들었습니다. 저는 황부(皇父)야말로 마왕군 제일의 병법가라 믿고 있습니다.”

역시 알고 있었는가…….

마르바스가 외알 안경을 고쳐 썼다. 단탈리안은 폴리투니아의 대군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더욱 신경 쓰고 있었다. 이쪽의 속내를 훤히 뚫어보았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미안하지만 잠시 나가주게. 단탈리안과 긴히 나눌 말이 생겼네.”

마르바스가 다른 마왕들과 지휘관들을 바깥으로 보냈다. 중립파 마왕들은 대체로 단탈리안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기에, 존경하는 군단장과 단 둘이 내버려두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막사가 적막해졌다. 주변의 시선이 사라지자 마르바스는 단도직입해서 물었다.

“언제부터 눈치 챘는가?”

“폴리투니아의 왕이 군대를 모집하고 있는데도 전하께서는 원군을 즉시 청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실 의향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단탈리안이 즉답했다.

“승리가 아니라 패배를 바라고 계신다……그렇다면 패배해서 얻을 이익은 무엇인가. 거기서 생각을 역추적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해답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정말로 쉬워보이는군.”

마르바스는 졸지에 어린애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단탈리안이 진지한 낯빛으로 말했다.

“전하께서는 제가 당신의 생각을 알아내리라 짐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여태까지 수수방관하신 것 아닙니까? 서로가 서로의 덜미를 잡았으니 무승부라 할 수 있습니다.”

“무승부라…….”

달리 말해 호적수인가. 당신과 내 수준이 똑같다고 말하는 것이니 어찌보면 기분이 나빠질 수도 있건만, 마르바스는 어째서인지 오히려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저는 전하와 정략을 주고받는 것이 내심 즐겁습니다.”

어느새 단탈리안이 싱긋 미소 짓고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우리의 동지들은 자극적인 즐길거리를 별로 선물해주지 않지요. 더러 따분할 때가 있습니다.”

“허. 자네는 제국을 다스리는 일을 한낱 놀이로 취급하는 것인가.”

“세상에는 진지함과 지루함을 혼동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은밀하게 귓속말로 중얼거리는 것 같은 어조였다. 마르바스가 웃고 말았다.

“맞는 말이다. 마왕이라면 응당 두 가지를 구별할 줄 알아야지.”

“황송합니다.”

“허나, 단탈리안. 본인으로서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군. 본인의 계획을 막고 싶다면 전쟁에서 승리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원군이 필수적이다. 자네는 그러나 단독으로 이곳에 왔다.”

대체 무슨 생각인가, 하는 의문을 담아 마르바스가 상대를 바라보았다.

“이를 말씀입니까, 고귀하신 마왕이여. 원군은 이미 도착해 있습니다.”

“호오. 자네 한 사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인가.”

오만하기까지 한 발언에 마르바스는 즐거워졌다.

“소신에게 맡겨주십시오. 폴리투니아의 삼만 대군은 단 하나의 요새도 함락하지 못한 채 쓸쓸이 회군할 것입니다.”

황궁에서 마왕들의 서열이 재정립된 지 두 달이 흘렀다. 짦은 시간 동안 눈앞의 마왕은 확실하게 권력을 휘어잡았다. 그 솜씨를 바로 옆에서 일견하는 것도 즐겁겠지, 하고 마르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무엇이 필요한가?”

단탈리안이 연극하듯이 두 팔을 벌렸다. 그가 허리를 낮추고 말했다.

“중립파의 모든 병력.”

이틀 뒤, 일만오천의 마족으로 이루어진 중립파 군세가 진군했다.

이 진격을 기다렸다는 듯이 폴리투니아의 왕은 이만 대군을 이끌고 나아갔다. 두 군세는 약속한 것처럼 널찍한 평원에서 맞닥트렸다.

양군을 합쳐서 사만에 가까운 대병력이 부닥치는 전투. 이제야 평화가 찾아오는가, 하고 안심하고 있었던 대륙인들은 다시금 불안에 잠겼다. 그들은 각자의 안위를 걱정하며 휘스트 평원에 주목하였다.

*  *  *

널찍한 평원에 양군이 마주보고 있었다.

수만 명의 병력이 드넓게 진용을 펼치는 광경은 언제 봐도 웅장했다.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불안감, 초조함, 흥분, 두려움……그 모든 감정이 짙은 안개가 되어 대지에 내려앉았다.

대부분의 지휘관은 그 중압감을 견뎌내지 못한다. 겁쟁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전투가 시작되면 이 수많은 장병들을 절대로 통제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피냄새를 맡고 흥분해버린 오크는 제멋대로 날뛰고, 인육을 눈앞에 둔 고블린은 마음껏 돌격해버린다. 그들과 감정을 공유하는 마왕은 덩달아서 흥분하고 만다. 웬만한 연륜이 없는 이상, 마왕의 군대는 한 덩어리의 카오스가 되어 폭주한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것 같은 흥분감. 그 때문에 마왕들은 이성을 잃고 돌격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립파는 견고하게 진용을 갖추고 있었다. 부대를 배치하고 한참이 지났는데 어느 마왕도 마르바스한테 공격을 보채지 않았다.

일선의 부대들은 엄중한 절도를 지키고 있었다. 소수의 젊은 마왕이 혈기를 참지 못하는 듯 입가를 씰룩거렸지만, 그뿐이었다.

마르바스를 비롯하여 중립파 마왕들은 한없이 침착한 시선으로 평원 너머의 적군을 지켜보았다. 때때로 가벼운 농담을 던짐으로써 서로가 적당히 긴장을 풀어주었다.

정예병을 이끄는 숙장(宿將)들이라고 할까. 평원파처럼 명장과 맹장이 즐비하진 않았지만, 오히려 이쪽이 군대로서 올바른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평범한 군대로는 감히 대적할 수 없겠지.

다만 평범을 뛰어넘은 규격 외의 군대에는 당해내지 못한다. 게임에서 마르바스는 군대를 이끌고 엘리자베트와 맞서 싸우다가, 전투 도중 결사대로 돌격한 용사에 의해 목이 날아간다…….

“배치가 끝났다. 이제 어떻게 할 셈인가, 단탈리안?”

마르바스는 무척이나 편안한 표정이었다. 이제부터 어떤 일이 벌어져도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너의 책임이다, 라고 말하는 듯했다.

“흰색 깃발을 준비해주십시오.”

“전투가 시작하기도 전에 협상부터 할 생각인가?”

“폴리투니아의 국왕과 담판을 짓고 오겠습니다.”

나는 세 명의 기병만 대동하고 평원 한가운데로 말을 몰았다.

한 명의 기병은 사신을 뜻하는 흰색 깃발을 들고 있었다. 다른 기병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가를 뜻하는 붉은 독수리 깃발을 들었다. 마지막 한 명은 마왕 단탈리안을 상징하는 깃발을 휘날렸다.

양군이 대치하고 있는 평원의 정중앙.

잠시 뒤, 폴리투니아군 쪽에서 일단의 기병이 말을 몰고 다가왔다. 폴리투니아 왕국을 상징하는 붉은색과 흰색의 깃발. 폴리투니아 왕가를 의미하는 하얀 독수리와 성기사.

기병들은 우리에게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멈추어섰다. 그리고 무리 중에서 한 명만이 말머리를 앞세운 채 천천히 걸어나왔다. 나 역시 거기에 호응하여 말을 이끌었다.

사만 명의 병력이 바라보는 가운데 나와 상대방이 조우했다.

“항복을 전하러 왔는가, 마왕이여.”

스테판 바토리.

동방의 거인.

폴리투니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

덩치가 웅장한 남자는 검은 턱수염을 실룩거렸다. 황금색 망토를 어깨에 걸친 대왕은, 꼭 자신이 올라탄 말과 한몸이 되어 허리를 우뚝 피고 있었다. 근엄한 목소리는 내 귀에 작은 말발굽을 울리는 듯했다.

나보다 키가 곱절은 크겠군, 하고 생각하며 내가 미소를 지었다.

“대왕이시여. 항복은 없습니다.”

“항복이 없다면 전쟁이 있을 뿐. 그 이외에 예법은 전쟁터에 불필요하다.”

“왕이라면 무릇 중도를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토리 대왕이 흐, 하고 낮게 웃었다.

“중도란 아무런 성과가 없는 결과를 두고 치장하는 단어에 불과하다. 짐은 이곳에 오만의 정병을 끌고 왔다.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있겠는가.”

“실례합니다만, 저는 대왕께서 승리를 바라시고 이곳에 왔다 생각치 않습니다.”

대왕은 불쾌한 듯 눈썹을 와락 구겼다.

“마왕이 변설을 일삼는다고는 듣지 못하였다만.”

“대왕께서는 이번에 출병하는 데 있어 의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선전포고는 폴리투니아 왕국의 이름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단지 대왕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지요.”

군대를 움직이는 데엔 항상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고 그 자금은 세금에서 충당되어야 한다. 문제는 귀족들로 이루어진 의회에서 쉽사리 세금을 지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폴리투니아의 귀족들은 국왕을 위하여 전쟁 특별세를 내는 데엔 동의했다. 단, 최소한 자신들의 이름으로 전쟁을 치루지 않기를 바랐다. 설령 전쟁이 벌어져도 그것은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라 국왕의 책임이라는 것이었다.

전쟁의 필요성엔 수긍하면서도 백성들의 원망을 듣긴 싫다는 얘기이지. 뭐, 마왕들이야 '국왕이 선전포고한 것이나 국가가 선전포고한 것이나 똑같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겠지만, 인간계의 정치판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위대한 바토리여. 당신께 작금의 상황은 별로 달갑지 않을 터입니다.”

대왕이 차가운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짐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마왕.”

“엘리자베트 통령에게 협력할 때만 하더라도 대왕께선 설마 제국이 국제적인 지위를 보장받으리라 생각하지 않으셨겠지요. 그렇기에 통령에게 협력하여 반(反) 월맹군 전선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역전.

현재 대륙에서 제국에 적대적인 국가는 사르데냐 왕국과 폴리투니아 왕국, 합스부르크 공화국, 단 세 곳에 불과하다. 국제적으로 점점 고립되는 상황에 바토리 대왕은 심란할 게 분명하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와 적당히 전쟁하여 적당히 협약을 맺는 것……우리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무슨 근거로 짐의 마음을 멋대로 재단하는가?”

“대왕께서 다른 국가에 원병을 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바토리 대왕이 진심으로 우리 마왕군과 한판 결전을 벌이고 싶었다면 이 전쟁을 '사악한 마왕군에 대적하는 인류'라고 광고해댔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바스가 제국의 중앙에 아무런 원병을 청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바토리 대왕 또한 주변국에 어떠한 명분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저 폴리투니아 국왕의 이름으로 병사를 이끌었다.

국제적인 논란으로 야기시키기 싫다는 의미이며, 현재 대륙의 외교적 판국을 어지럽힐 의사가 없다는 뜻이다. 바토리 대왕은 명백히 승리가 아니라 협약을 노리고 있다.

우리와 적당한 화해를 원하는 이유는 간단.

“당신께서는 공화국과 서서히 거리를 벌리고자 원하시고 있습니다.”

썩은 동앗줄을 버리고 새로운 줄로 갈아타려는 것.

바토리 대왕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대의 말대로 짐이 휴전을 바란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더더욱 전투를 치러야지 않겠는가? 아무런 명목도 없이 휴전을 맺기란 불가하다. 짐에게도 최소한의 체면이 필요하니 말이다.”

일국의 대왕답게 말귀가 빨랐다.

말인즉슨, 휴전을 원하지만 영토를 빼앗긴 채로 순순히 협정에 들어가면 주변에서 유약한 군주라고 깔볼 것이니 조금이라도 전쟁을 치를 필요가 있다. 최소한의 체면이 보장되지 않는 이상 전쟁은 불가피하다. 그런 얘기였다.

나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우리가 친구가 되는 방법이 있나이다, 대왕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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