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41화 (341/510)
  • 00341 제국의 심처에 머무르는 자  =========================================================================

    “트란실바니아 방면에 적군이 집결하고 있습니다.”

    “왕실의 근위기사단이 목격되었다는 보고도 들어왔습니다, 군단장.”

    “적군의 숫자는 확실치 않으나 최소한 일만칠천이 넘을 것입니다.”

    군막사.

    네 명의 마왕과 열댓 명의 마족 지휘관이 각탁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중 가장 지위가 높은 이가 중얼거렸다.

    “양익기사단……붉은색과 하얀색의 사도(使徒)인가.”

    마왕 마르바스. 신중하고도 노련한 시선이 지도를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마르바스의 옆에서 중립파 마왕 한 명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대륙 최강을 자처하는 기사단 중 하나이지요. 브르타뉴의 장미가 지난 번에 떨어졌으니 확실히 최강이라 인정할 만합니다.”

    “음.”

    회백색 눈동자는 좀처럼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으나 항상 무언가를 직시하고 있었다. 중립파에 소속된 마왕들은 마르바스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마치 고요한 숲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감정적이지 않다. 그런데도 뚜렷하다. 때때로 차분함이 격정보다 더욱 강렬할 수 있다. 그 사실을 마왕들은 마르바스라는 거목을 통해서 몇 번이고 실감했다.

    그래서겠지. 중립파에 적게나마 계속해서 마왕이 모여드는 까닭은. 단순히 중립파의 이념에 공감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 남자, 누천년이 넘도록 흔들림 없이 시대들을 거쳐온 마르바스의 인격에 반한 것이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보니 마르바스의 시선이 자신한테 향하고 있었다.

    “푸르손. 본인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는가?”

    “아.”

    아차, 하고 중립파 마왕이 속으로 자신을 책망했다. 너무 뚫어지라 마르바스의 얼굴을 바라보고 말았다. 마왕은 어떻게 변명할까 머리를 재빨리 굴리다가 그냥 솔직히 대답하기로 했다.

    “군단장께서 지나치게 차분하셔서 말입니다. 무심코 탄복했습니다.”

    “자네가 말한 대로 우리는 브르타뉴의 장미를 꺾은 적도 있지 않은가.”

    “그때는 마왕군 전체가 움직였습니다. 반면에 지금은 우리 중립파만이 전선에 나와 있지요. 상황이 다릅니다.”

    현재, 합스부르크 제국은 폴리투니아 왕국과 국경분쟁에 놓였다.

    원인은 제8차 월맹군에 있었다. 월맹군이 합스부르크 제국을 함락시키고 난 뒤로도, 중립파는 방향을 비틀어 폴리투니아 왕국으로 침공했다. 아주 큰 성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다섯 개의 백작령을 함락했다.

    마르바스는 지극히 정치적으로 판단하여 왕국을 침략했다.

    먼저 평원파에게만 '멋진 역할'을 넘겨줄 순 없다는 이유가 한몫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자면 제8차 월맹군은 평원파의 독무대였다. 더 정확하게 표현해서는 단탈리안이 기획해서 단탈리안이 연출하고 단탈리안이 연극한 한 편의 전쟁극이었다. 향후 마계인들 사이에서 평원파가 압도적으로 인기를 끌 위험이 있었다.

    마계인들은 비난하겠지. 평원파가 홀로 노력하고 피를 흘릴 때 나머지 파벌은 무엇을 했느냐. 말이 중립파일 뿐이지 실상은 개인의 안전과 보신만 노리는 기회주의자 집단이다, 하고.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마르바스는 왕국을 침공했다.

    결과적으로 마르바스의 판단은 탁월했다.

    무리하게 추격전을 펼치던 평원파는 엘리자베트 통령의 매복에 걸려 패퇴했다. 반면에 폴리투니아로 방향을 돌린 중립파는 소소하게 이득을 얻었다.

    마족들 중 명분론에 흥분하는 이들은 평원파를 칭송했지만, 현실적인 시각을 지닌 자들은 마르바스의 신중함을 상찬했다.

    ─ 평원파의 이상은 올바르며 마인이라면 무릇 지지해야 마땅하다.

    ─ 그러나 대저 이상을 논함에 있어 우리의 두 발은 단단히 땅을 내딛고 서 있어야 한다. 중립파는 이상과 현실의 중도가 무엇인지 극히 모범적인 사례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마계 지식인들의 대체적인 의견이었다. 그중에는 평원파가 중립파를 도와서 함께 왕국에 침공했다면 더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을 거다, 하고 오히려 평원파를 비판하는 시민도 꽤 있었다.

    비록 폴리투니아와 국경을 분쟁하게 되었으나, 중립파 입장에선 매우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장에게 아낌없는 신뢰와 지지를 보내었다.

    마르바스가 짧게 다듬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여차하면 적군에게 패배해도 좋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네.”

    “예?”

    마왕이 놀라서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나머지 중립파 마왕들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슨 말씀입니까, 군단장. 몇 년에 걸쳐서 겨우 얻어낸 영토를 포기하다니요?”

    “자네들이 아까워하는 것은 십분 이해한다. 허나 벌써 잊었는가.”

    마르바스가 마왕들을 쓰윽 둘러보았다.

    “우리가 전쟁을 통해 얻으려고 한 것은 명분이었다. 결코 조그마한 땅덩어리가 아니야. 우리는 이미 기존에 수립한 작전 목표를 달성했네.”

    “하지만……명분이란 것도 성과에서 비롯하기 마련입니다. 이제 와서 영토를 도로 잃어버린다면 마계 사회에서 우리를 비난하지 않겠습니까?”

    주위의 마왕들이 반박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마르바스는 조용히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정반대다. 마계는 우리가 아니라 평원파와 산악파를 비난할 것이다.”

    “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얼이 빠졌지만 마왕은 또 다시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입니까. 군단장의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자네가 아까 전에 지적하지 않았는가. 예전과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말일세.”

    마르바스가 외알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닦았다. 그는 마치 당연한 사실을 읊조리는 것처럼 안경을 닦으며 자연스럽게 얘기해나갔다.

    “예전에 우리는 독립적인 군단이었다. 고로 영토를 함락시킨 것 또한 온전히 우리 중립파만의 공로였으며, 월맹군 전체의 공로로 취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어떠한가? 우리는 거대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원이다.”

    “아……!”

    마왕들이 마르바스의 저의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렇군요. 이번에 우리가 영토를 잃어버려도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에게 원군을 보내지 않고 수수방관한 제국 중심부의 책임이 되어버립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평원파와 산악파의 책임이 된다.”

    마르바스가 외눈 안경을 고쳐 썼다.

    “우리 중립파가 힘들게 벌어놓은 성과를 시기한 나머지 단 한 명의 원군도 보내지 않았다. 파벌 싸움에 정신이 팔려 대의를 망각했다. 그렇게 여론이 조성되겠지.”

    “과연……패배함으로써 승리하는 것입니까…….”

    마왕들은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마르바스의 말을 듣고나니 탁자에 올려진 전쟁 지도가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비추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점점 집결하고 있는 왕국의 군대를 막을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런 고민을 품고 끙끙거리며 지도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즉 어떻게 해야 '최선을 다해 게릴라전을 펼쳤지만 여력이 부족하여 후퇴한 것'처럼 사람들 눈에 비출지 고민하게 되었다. 작전 목표 자체가 변경된 것이었다.

    “……전면적인 농성전 대신에 소규모 분대를 파견해서 끊임없이 왕국군을 괴롭혀야겠군요.”

    “음. 또한 영토 안에 거주하는 마인들을 서둘러 피난시켜야 한다.”

    “옳습니다, 옳습니다……그래야 우리들이 끝까지 시민들을 위해 싸웠다는 인상을 강하게 남겨줄 수 있습니다!”

    마왕들 사이에 기묘한 열기가 번졌다.

    승리할 가망이 적은 전쟁을 감내한다는 생각에서 전술적 패배, 전략적 승리의 전쟁을 치룬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전자에 비한다면 후자는 명백히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고 의미도 넘쳐났다.

    “어차피 별로 비옥하지도 않은 땅이다. 우리가 얻을 정치적 이득에 비해서는 한없이 가치가 낮다.”

    “놀랍습니다, 군단장. 어째서 이제야 저희에게 고견을 들려주신 것입니까?”

    마왕들이 아쉬워하는 눈빛으로 마르바스를 쳐다보았다.

    “진즉에 말씀해주셨다면 저희도 그에 맞추어서 이런저런 준비를 해둘 수 있었을 텐데요.”

    지금처럼 마르바스는 자신의 속내를 말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마르바스에 대한 존경심이 높은 중립파 마왕들에겐 아무래도 서운한 처사였다.

    회의에서 처음으로 마르바스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왜냐하면 이 작전은 실패할 것이기 때문일세.”

    “……예?”

    마르바스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진심으로 즐겁다는 기색이 섞여 있어서 마왕들은 어리둥절했다. 작전이 실패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되레 웃어버리다니 어찌된 영문인가.

    “작전이 성공하면 중립파는 마계의 여론을 확실하게 휘어잡을 계기를 얻게 된다. 평원파와 산악파의 인기는 추락하지. 우리가 제국의 향방을 결정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라네.”

    “예, 그렇습니다만…….”

    “하지만 저들 중에 누구도 이쪽의 속내를 간파하지 못했을 경우에만 그러하지.”

    마르바스가 한쪽 눈을 가볍게 찡긋했다. 마르바스의 근엄한 얼굴에 그런 장난스러운 눈짓이 의외로 잘 어울렸다.

    “우리 제국에는 각별한 후각을 가진 이가 있다. 이런 '냄새'를 그자가 맡지 못할 리 없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우리를 승리하게끔 뒤에서 획책할 것이야.”

    “……군단장.”

    마왕이 다소 어이없는 어투로 말했다.

    “바로 전선에 서 있는 저희조차 군단장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군단장께서 애당초 의중을 바깥에 드러내지 않았으니 실상 우리는 어떠한 행동도 옮기지 않은 셈입니다. 실현된 적도 기획된 적도 없는 의중을 그 누가 간파한다는 말씀입니까?”

    “세상에는 거의 본능적인 후각의 소유자가 있는 것이다, 푸르손.”

    마르바스는 여전히 기분이 좋아보이는 표정이었다.

    “전쟁을 승패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고 철저하게 정치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본다. 그걸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그렇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는 것이야. 본인부터 그러하지 않은가.”

    “하오나…….”

    그때 막사에 전령이 들어왔다. 마왕들의 시선이 전령에게 쏠렸다. 전령은 몇 번이나 받아도 익숙치 않은 시선의 집중을 감당하면서 한쪽 무릎을 털썩 꿇었다.

    “각하. 보고를 올립니다.”

    “허락한다.”

    “황도에서 사신이 파견되었습니다. 현재 사신은 군중에서 각하의 접견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마르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으로 들라하라.”

    “……알겠습니다.”

    전령이 약간 주저하며 대답했다. 보통이라면 누가 사신으로 왔는지, 어떠한 행색이며 목적은 무엇인지 물어보기 마련이었다. 질문에 대비해서 전령은 수십 번 대답을 연습하고 준비했다. 그런데 흔쾌히 출입을 허락하니 다소 의아스러운 것이었다.

    전령이 떠나가자 마르바스가 피식 웃었다.

    “양반은 아니로군. 얘기를 꺼내자마자 오는 걸 보니.”

    “설마 황실에서 군단장의 계획을 알아채고 사신을 보냈다는 말씀입니까?”

    마르바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마왕들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얼굴이었다. 주변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상관없이 마르바스는 느긋하게 손님을 기다렸다. 잠시 뒤, 막사의 휘장을 걷어내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유독 등이 구부정한 남자는 순식간에 막사 안을 훑어보더니 그 다음에야 마르바스를 바라보았다.

    무엇보다 주위의 상황을 먼저 파악하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것이겠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자의 변치 않는 습관에 미소를 지으면서 마르바스가 환영의 인사를 건네었다.

    “이런 외딴 변경에 무슨 일이신가, 법무상.”

    “변경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검은 남자, 단탈리안이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저는 지금 제국의 중심에 방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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