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40 Brave New World =========================================================================
황금 옥좌에 앉은 황제가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짐은 제국을 재건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경들이 얼마나 지극한 충성을 보였는지 십분 이해하오. 그중에서도 특히 공로가 큰 분이 있으니, 그분들에게 제국의 이름으로 합당한 칭호를 내리고자 하오.”
진짜 인간처럼 몸동작이 자연스러웠지만 잘 보면 표정이 단순하여 변화가 적었다. 이는 그러나 황제라면 마땅히 표정에 절도가 있어야 한다는 상식에 어울려서 쉽사리 무시되었다.
불쌍한 인간이다,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내장과 살이 썩어문드러지지 않기 위해 연금술사들은 매일마다 각종 시약을 황제의 온몸에 발랐다. 행여나 물약의 냄새가 풍길까봐 강한 향수를 뿌렸다.
흔히 사람들이 살아도 산 것 같지 않다고 불평하지만, 루돌프는 어떨까.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 삶을 모욕당하는 것보다 죽음을 모욕당하는 것이 훨씬 더 참혹하다.
나는 몰래 숨을 죽여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찌 희극적이지 않겠는가. 친족을 살해하고 강간하면서까지 그토록 황제의 자리에 오르길 바랐으니 어찌보면 소망을 이룬 것이리라.
“바르바토스.”
“예, 폐하.”
“존귀한 그대에게 보헤미아의 왕관을 하사하오.”
몇몇 마왕이 헛숨을 들이켰다.
합스부르크 제국 산하에는 왕작이 네 개 있었다. 하지만 개중 두 개는 황제에게 장식품처럼 딸려 있었고, 실질적으로 제국에 복속한 왕국은 보헤미아 왕국과 판노니아 왕국 두 개뿐이었다. 이는 제국에서 황제 다음으로 보헤미아 왕이 가장 서열이 높음을 의미했다.
바르바토스가 한쪽 무릎을 꿇자, 황제가 계속해서 말했다.
“아울러 아우스테를리츠의 대공이자 제국의 영원한 대리 장군으로 임명하오. 보헤미아의 왕은 짐을 대신하여 제국의 국정을 도맡아 보살필지어니, 그대는 명예롭게도 카이사르의 칭호를 쓸 자격이 있소. 신민들은 앞으로 그대를 카이사르-바르바토스라 부르게 될 것이오.”
“황공합니다.”
바르바토스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황제에게 왕관과 검을 수여받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바르바토스는 등을 돌려서 어전을 훑어보았다.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가 그녀의 입가를 씨익 끌어당겼다.
그 순간에는 어리버리한 무소속 마왕들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명분론에 불과하며, 실제로 그들이 복종하게 될 대상은 저 꼭두각시 황제가 아니라――역사상 유일무이하게 마족의 왕이자 인간의 왕으로 군림하게 된 소녀임을.
바르바토스가 황제의 옆에 기립했다. 다음 차례를 황제가 호명했다.
“마르바스.”
“부르셨습니까, 폐하.”
머리칼에 드문드문 흰색이 섞인 마르바스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목소리에 존경심 따위는 눈꼽만치도 없었지만 몸짓이 어찌나 우아한지, 자칫 마르바스가 진심으로 황제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비출 정도였다.
“존귀한 그대에게 판노니아의 왕관을 하사하오.”
“과분한 영광에 부끄럽지 않도록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또 하나의 왕작이 내려지자 어전의 공기가 확실히 부산해졌다. 그런 분위가와 동떨어진 듯 마르바스는 덤덤하게 고개를 한층 더 낮게 숙였다.
“짐은 판노니아의 왕을 언제 어디서나 의부(義父)로 받들겠소. 사사롭게는 짐에게 아부(亞父)라 불릴 것이요, 공적으로는 황실의 인척에서 문중 어른으로 떠받들 것이니, 아부는 명예롭게도 세바스토크라토르의 칭호를 쓸 자격이 있소.”
이곳에 만일 인간계의 관직에 정통한 마왕이 있다면 지금쯤 전율을 느끼겠지.
바르바토스가 황제의 대장군이 됨으로써 실권을 가져갔고, 마르바스는 황제의 아버지로 받들여짐으로써 가장 명예로운 호칭을 제수받았다. 제국의 서열에서 카이사르는 세바스토크라토르보다 격이 한 단계 낮았다.
평원파와 중립파가 사이좋게 이권을 나눠가진 것이었다.
“제국의 신민은 앞으로 그대를 세바스토크라토르-마르바스라 칭송할 것이오.”
“성은이 망극합니다.”
마르바스가 예를 다하고 일어섰다. 바르바토스가 황제의 오른편에 섰고, 마르바스는 황제의 왼편에 기립했다.
이 다음으로 누가 불릴지는 여기 모인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다.
“파이몬.”
“신 파이몬, 부름을 받사와요.”
파이몬이 어전의 정중앙을 걸어나갔다. 그녀는 화려하리 만치 붉은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다소곳하게 들어올렸다.
이전에 부름을 받은 두 마왕과 다르게 파이몬은 어조에서나 예법에서나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다만 황제에게 불린 것이 아니라 꼭 가면무도회에 초대받은 기분이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
“고귀한 그대에게 룩셈부르크 공국을 하사하며, 여기에 더해 룩셈부르크 공국을 대공국으로 승격하오. 아울러 팔츠 선제후령을 룩셈부르크 대공국에 편입시키는 바요.”
“황공하옵니다. 위로는 폐하를 돕고 아래로는 신민을 보살펴 제국을 수호하겠습니다.”
“음. 파이몬 대공에게 황궁에 대한 관리를 일임하는바, 그대는 명예롭게도 프로 파라코이모메노스의 칭호를 쓸 자격이 있소.”
차례대로 관직이 정해졌다.
관직은 철저하게 파벌의 논리에 따라 분배되었으며, 이는 서열이 가장 높은 자들을 열거해보면 곧바로 명확하게 파악되었다.
보헤미아의 왕, 황제의 대리장군, 평원파 바르바토스.
판노니아의 왕, 황제의 의부, 중립파 마르바스.
룩셈부르크의 대공, 제국의 대시종장, 산악파 파이몬.
모라비아의 공작, 제국의 해군사령관, 무소속 가미긴.
작센의 선제후, 평원파 제파르.
마인츠의 선제후, 산악파 시트리.
쾰른의 선제후, 무소속 바싸고.
모두 다해서 일곱 명. 황제가 꼭두각시인 이상, 이들은 명실상부 제국을 마음대로 호령할 수 있는 장본인이 되었다.
이들 일곱 제후에게는 황제를 선거로 선출할 수 있는 권리까지 주어졌다. 이른바 선제후(選帝侯)라고 불리는 직위였다. 누가 황제가 되는지는 이제 일곱 명의 선제후한테 달렸다.
파벌의 구도를 살펴보자면 평원파 2표, 산악파 2표, 중립파 1표, 무소속 2표가 된다. 얼핏 꽤나 공정하게 작위가 분배된 것처럼 보이지만……실상은 다르다.
바싸고는 외로운 늑대처럼 홀로 독야청청하는 애늙은이인지라 이름표가 무소속일 따름이지, 어느 특정한 집단의 마왕들을 대표하지 않는다. 시류에 따라 이편에도 붙고 저편에도 붙는다.
달리 말해, 현재 거의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무소속 마왕들은 바싸고 입장에서 전혀 매력적이지 못하다. 차라리 평원파나 중립파와 함께하려 들겠지. 바싸고는 무소속 마왕들에게 도리어 적대적인 것이다.
즉……파벌로 뭉친 마왕들이 7표 중에서 자그마치 6표를 독점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쯤에서 다시 한번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겠지.
시대가 바뀌었다.
무소속인 바알, 마찬가지로 무소속인 아가레스가 마왕군을 쥐락펴락하던 시절은 종결되었다. 새로운 시대의 정점은 누가 뭐라 해도 바르바토스-마르바스-파이몬으로 이어지는 파벌의 수장들이다.
그런데도 어전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이 정도면 그래도 공평하다’라는 것이 무소속 마왕들의 분위기였다. 당장 겉으로 보이는 평등함에 무소속 마왕들은 안도하고 있었다. 가미긴에게 1표가 떨어져서 다행이라 생각하는 것일까. 한없이 우둔했다…….
“하겐티를 크니프하우젠 남작에 봉하오.”
“……감사합니다.”
“알로켄을 마르티니츠 남작에 봉하오.”
“황공합니다.”
한 사람씩 황제에게 호명되어 부복했다.
이들도 알고 있겠지. 사실상 황제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단상에 올라서 있는 세 명의 마왕, 바르바토스-마르바스-파이몬한테 복종하는 것이다. 잘 보면 재미난 점이 있다.
평원파에 속한 마왕은 은근슬쩍 바르바토스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산악파에 속한 마왕은 슬그머니 파이몬을 향해서 고개를 숙인다. 반면에 무소속 마왕은 이도저도 아니고 떨떠름하게 부복한다.
“…….”
“…….”
마왕들이 차례대로 불리고 돌아올 때마다 이상한 침묵이 어전을 휘감았다. 그들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몰래 내 쪽을 쳐다보고는 했다. 하나같이 눈동자에 의문이 담겨 있었다. 나는 시선을 무시하며 느긋하게 작위식을 구경했다.
그렇다. 내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
제파르 형님이 선제후로 임명되는 순간, 수십 명의 마왕이 일제히 나를 훔쳐보았다. 분명히 제파르 형님은 바르바토스의 오른팔이기는 했다. 하지만 최근 평원파에서 압도적으로 큰 공로를 세운 사람은……반박의 여지가 없이 나 단탈리안이었다.
대륙의 열국으로 하여금 외교적으로 제국을 인정받게 만든 사람도 나였다. 선제후에 오를 만한 인물로 이만큼 적당한 사람이 없겠지. 그런데도 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다…….
마왕들이 호명되면 호명될수록, 남은 마왕의 숫자가 적어지면 적어질수록, 알게 모르게 나한테 집중되는 시선이 늘어났다. 아무도 소리를 내어 이 이상한 현상을 지적하지 못했다.
마침내.
모든 마왕이 작위를 수여받고 오직 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침묵의 한가운데에서 황제가 입을 열었다.
“이중에 제국을 수호했을 뿐만 아니라 마족과 인간종의 평화를 위하여 동분서주한 분이 있소. 과인은 상찬과 큰 상을 내리고자 했으나, 그분은 겸양의 말로 한사코 은상을 거부했소. ……단탈리안.”
“예.”
나는 허리를 피고 걸어나갔다.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흐뭇해하는 눈길, 칭찬하는 눈길, 의심하는 눈길, 증오하고 질투하는 눈길. 그 모든 것이 마치 망토처럼 내 몸을 감싸고 돌았다.
이 망토가 벗겨질 날은 앞으로 영원히 없겠지.
“과인은 그대에게 제국의 법무상(法務相)을 제수하오.”
“제국에서 살아 숨쉬는 모든 이들을 위해 제 혼과 몸을 다 바치겠습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지나치게 담백한 대화에 마왕들이 웅성거렸다.
나는 등을 돌려서 천천히 어전을 둘러보았다. 바르바토스, 마르바스, 파이몬, 가미긴, 제파르 형님, 시트리, 바싸고. 그들과 한번씩 눈을 마주친 다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르바토스는 나의 우군이다. 호감도로 따지면 50. 즉, 바르바토스가 가진 1표 중에서 절반은 내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0.5표.
마르바스는 나에 대한 호감도가 거의 50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우리는 정치적인 동맹을 맺고 있다. 그가 지닌 1표 중에서 절반은 역시 내 것이다.
1표.
가미긴 또한 50의 호감도를 갖고 있으며, 그녀의 불길과 같은 소유욕 때문인지 호감도 이상으로 나한테 집착하고 있다. 어찌되었든 그녀가 가진 1표 중에서 절반은 나의 것이다.
1.5표.
제파르 형님은 바르바토스에게 복종한다. 실제로는 하수꾼이다. 바르바토스와 똑같이 형님의 권리 중 절반은 내 의사에 따라 움직인다.
2표.
시트리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3표.
파이몬은 나에 대한 호감도가 50을 넘었고, 사실상 내 의도대로 그녀의 권리를 행사할 수밖에 없다. 점점 더 그렇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녀가 가진 1표는 온전히 나의 것이다. 그녀의 오른팔인 시트리의 권리와 하나로 묶인 채.
4표.
――7표 중에서 4표.
정확하게 과반수 이상이 나의 수중에 떨어져 있다.
이것이 오늘 열린 작위식의 배후에 진정으로 감추어진 본질이다.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그 시대는 비단 세 명의 마왕과 세 개의 파벌에 의해 통치되고 조율되는 시대를 뜻할 뿐만이 아니라, 일찍이 제71위라는 서열에 머물렀던 한 명의 마왕에 의해 조종되는 시대가 펼쳐졌음을 의미한다.
나 단탈리안이.
다른 누구도 아니라 내가 이 시대를 집행한다.
제국은 마족과 인간종의 연합체라는 명분을 유지할 것이고, 이는 제국이 언제든 마족의 이름으로, 혹은 인간종의 이름으로 대륙에 간섭할 수 있다는 걸 가리킨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틀림없이 향후 대륙의 역사를 지배한다.
그 제국을 지배하는 자는 나다.
다만 전면이 아니라 뒤편에서. 양지가 아니라 음지에서 움직인다.
따라서, 커스토스의 공작이자 제국의 궁중백이요, 한때 서열 제71위였던 자에게 어울리는 차례는 맨앞도, 중간도 아닌, 마지막 중에서도 마지막일 수밖에 없으니. 나는 언제나 최후의 인물이었고 언제까지나 최후의 인물로 남을 것이다.
마왕들을 향해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짝, 하고 박수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바르바토스가 손뼉을 친 것이겠지. 그러자 뒤이어 대부분의 마왕이 갈채를 보내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박수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내가 곧 제국이다.
============================ 작품 후기 ============================
비잔틴-로마의 관직과 칭호를 참조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영지를 참조하느라 평소보다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비잔틴-로마의 관직 같은 경우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혼재되어 있어서 작중에선 때때로 라틴어가 쓰이는가 하면 때때로 그리스어가 쓰였습니다. 이것 역시 조사가 미흡한 탓이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특히 여성명사를 따로 취급해줘야 했는데 제가 라틴어에 완벽하게 무지한 탓에 몇몇은 그대로 남성형으로 남아 있습니다.)
각종 명칭은 추후에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