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39화 (339/510)
  • 00339 Brave New Worl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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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부 마왕들이 동요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장난치지 마라! 서열을 없앤 장본인은 네놈이지 않는가! 하고 대놓고 삿대질을 하는 마왕도 있었다. 어전의 공기가 순식간에 어수선해졌다. 하지만 내 눈길을 끄는 사람은 시끄러운 깡통들이 아니었다.

    “…….”

    바싸고. 이 영악한 만년생리증 환자는, 별안간 입을 꾸욱 다물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주도적으로 질문하던 양반이 말이다.

    나는 재밌어서 무심코 미소를 지었다. 과연, 눈치가 빨랐다.

    대리석 기둥이 화려하게 알박은 어전. 갑작스러운 폭발 선언이 떨어졌건만 부산스럽게 항의를 쏟아내는 마왕은 의외로 많지 않았다. 아니, 확실하게 적었다. 파벌에 속한 마왕들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오직 소속이 없는 예닐곱 명만이 바쁘게 입방아를 찧어댔다.

    나는 목격했다. 바싸고는 내 선언이 이루어지자마자 순간적으로 어전 전체를 쑥 훑었다. 거기서 알아챘겠지. 바르바토스도, 파이몬도, 마르바스도, 모두 덤덤하게 무표정을 짓고 있음을.

    이것이 사전에 철저히 계획된 일이라는 사실을 바싸고는 안 것이었다. 지금 나에게 삿대질을 치켜드는 것은, 달리 말해 마왕군 내부의 모든 파벌을 적으로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

    바싸고는 곧바로 한 발자국 뒤로 내뺐다. 치고 빠지는 솜씨가 가히 예술적이었다. 눈치만으로 능히 바퀴벌레 싸다구를 연속으로 후갈길 법했다.

    “단탈리안. 자네는 틀림없이 새로운 마왕군에는 서열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네. 헌데 이제 와서 서열을 부활시키겠다니, 자네의 머리에 정신이란 게 박혀는 있는가?”

    모든 마왕이 바싸고처럼 처세술에 능숙한 것은 아니었다. 전 서열 제6위, 마왕 발레포르가 시꺼먼 뺨을 씰룩거리며 다그쳤다.

    절대적인 지배력을 발휘하며 만마(萬魔)의 위에 군림하는 마왕은 도리어 처세라는 단어와 거리가 매우 멀었다. 명령만 내리면 어떤 마족이든 복종한다. 그런 처지에서는 정치술을 익히고 다듬을 필요조차 없었다.

    특히나 무소속 마왕들은 정치에 환멸 내지 경멸을 느껴서 스스로 은둔한 이들. 천 년이 넘도록 치열하게 파벌 싸움을 벌여온 평원파나 산악파에 비하면 애송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나한테 속수무책으로 말린 것이다만, 저들은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다.

    “물론입니다. 모든 마왕은 동등한 자격을 지니고 마왕군에 참석합니다.”

    “자네,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 알고나 있는가?”

    발레포르가 비웃으면서 주변 마왕들에게 눈짓으로 동의를 구했다. 그에 동조해서 몇 명이 악의적인 비웃음을 흘렸다.

    “없앤다고 공언한 제도를 다시 부활시킨다니. 모순이 어떤 의미인지 내 굳이 설명해야겠는가.”

    “모순도 무엇도 없습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저는 마왕이지만 동시에 제국의 궁중백입니다. 예를 들어, 마왕이라는 측면에서 저는 바르바토스와 동등합니다. 그러나 제국의 일원이라는 측면에서는 공작이자 섭정인 바르바토스에게 뒤쳐집니다. 꽤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발레포르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모처럼 선심을 써서 자상하게 알려주자. 나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의외로 좋아한다. 상냥하니까 말이야.

    “마계의 일은 마계에, 대륙의 일은 대륙에, 라는 것입니다. 발레포르.”

    “무슨 소리를…….”

    “이제부터 자기 멋대로 대륙을 휘젓는 만용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모든 마왕은 무조건적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에 편입되어야 합니다. 마왕군이 대륙에 간섭하느냐 마느냐는, 오로지 제국의 의회를 통해서 결정됩니다.”

    발레포르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의회……? 편입……? 단탈리안, 제정신인가.”

    “저는 언제나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마왕의 긍지를 인간종이 세운 제국에 갖다 팔아먹을 생각이냐!”

    발레포르를 비롯해서 여러 마왕이 떠들었다. 배신이라느니 반역이라느니, 듣기 안 좋은 단어란 단어는 죄다 쏟아냈다. 비난의 폭풍이 몰아닥쳤다.

    폭풍은 저절로 잦아들었다. 얼굴을 붉히고 목청을 돋우던 마왕들은 잠시 뒤,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이 극소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발레포르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동조해주지 않았다…….

    기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 한가운데 나만이 변함없이 미소를 지었다.

    “마왕의 긍지는 안중에 없습니다. 제국에 갖다 팔아먹을 생각이냐고 말씀하셨습니까? 좋습니다. 어차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긍지입니다. 제값을 받고 팔 수 있다면 오히려 이득이겠지요.”

    “말도 안 되는 폭언을……자네 미쳤는가!”

    발레포르가 노성을 질렀다. 그러나 방금 전과 다르게 얼굴에 초조함이 떠올라 있었다.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이제야 직감한 것일까. 미안하지만 이미 늦었다. 수레바퀴는 돌아갔으며, 시대는 바뀌었다. 서열 제6위라는 간판 따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절감하도록.

    “바알도 마왕의 긍지를 논했습니다. 아가레스도 마왕의 긍지를 울부짖으며 죽었습니다. 도대체 그 긍지란 것이 무엇입니까? 월맹군을 사지에 몰아넣어 전멸시키는 것, 쓸데없이 내전을 일으키는 것, 이런 것들이 긍지입니까?”

    내가 웃었다. 발레포르는 얼굴이 붉그락푸르락 달아오르고 있었다.

    “동족을 죽인 주제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긍지를 논합니다. 정말 대단한 긍지로군요. 실례합니다만 그 따위 긍지, 공짜로 준다고 해도 이쪽에서 사양하겠습니다.”

    “네놈…….”

    “착각하지 마십시오. 마왕에게 허락된 긍지는 단 하나. 만마를 위하여 지상낙원을 건설한다, 그것뿐입니다.”

    나는 발레포르의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헤라클레스의 용맹이 대륙을 호령하던 시절은 옛날옛적에 끝났습니다. 동족과 아군도 알아보지 못한 채 폭주하는 행동 따위를 긍지이니 뭐니 치장하는 시대는 끝장났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냉철한 판단력 그리고 단호한 단결력입니다.”

    나는 단상에서 몇 발자국 아래로 내려갔다.

    “제2차 월맹군에서 우리는 대륙의 삼분지일을 얻었습니다. 그런데도 실패했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우리가 약하기 때문입니까? 마족이 인간종보다 열등하기 때문입니까?”

    천천히 어전의 정중앙을 거닐면서 주위의 마왕들에게 또박또박 소리높여 말했다. 이것은 이미 발레포르 한 사람을 상대하는 논쟁이 아니었다. 모두를 확실하게 설득해내는 연설이었다.

    “결코 아닙니다. 아군의 성공을 방해하는 자가 내부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참람하게도 배신 행위에 불과한 짓거리를 마왕의 긍지라고 치장했습니다……웃기지도 않는 농담입니다.”

    “하, 제국에 편입되는 것이 진정한 마왕의 긍지라는 말인가!”

    발레포르가 소리쳤다. 성난 황소마냥 흥분해 있었다.

    “그럼 어디 합스부르크 제국의 깃발을 꺼꾸러트리십시오.”

    내가 차갑게 발레포르를 바라보았다.

    “모든 인간종을 적대하겠노라고 선포해보십시오. 당장에 인간종들이 단합해서 이곳으로 처들어오겠지요. 연이은 내전으로 피폐해진 우리 마왕군이 간단히 이겨낼 것 같습니까?”

    “전쟁을 앞에 두고 사사로이 패배를 운운하다니, 그야말로 겁쟁이의 사고방식이다! 마왕군은 언제나 승리한다!”

    내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이해하고 계시는 겁니까? 우리가 공식적으로 인간종을 적이라 선언해버리면 그때는 월맹군의 재래입니다. 적당한 승리도, 적당한 패배도 없습니다. 마족이나 인간종 어느 한쪽이 전멸하는 그 순간까지 전면전을 펼쳐야만 합니다.”

    인류가 지금 마왕군의 대륙 점유를 인정하는 까닭은 겉으로나마 합스부르크 제국의 가면을 쓰고 있는 덕분이다. 아직도 그걸 모르는 녀석들이 있다.

    “신중에 신중을 기울여도 부족한 판국에 아무런 보장도 없이 승리를 호언장담한다. 패전의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는 겁쟁이라고 매도한다…….”

    내가 입끝을 비틀었다.

    “왜 월맹군이 여태껏 실패했는지 알 만합니다. 당신과 같은 마왕이 지휘관으로 있어서야 승리할 전투에서도 전멸하기 십상이겠지요.”

    “뭐, 뭐라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머저리는 신생 마왕군에 필요없다고 말했습니다.”

    지나친 모욕에 발레포르는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신경쓰지 않고 시선을 좌중으로 돌렸다.

    “무엇이 마족을 위한 지상낙원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의견이 다릅니다. 여러분 중에는 평원파처럼 마족의, 마족에 의한, 마족을 위한 국가야말로 정답이라 믿는 분도 계십니다.”

    나는 한차례 평원파를 바라보고 천천히 눈길을 옮겼다.

    “여러분 중에는 인간종을 완전히 제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믿는 분도 적지 않습니다. 인간종과 적당히 타협해서 마족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적인 해답이라 생각하는 것이지요.”

    “…….”

    “혹은, 현재까지 우리가 차지한 영역이라도 보존하는 것이 최선이라 여기는 분도 틀림없이 계십니다.”

    차례대로 평원파, 산악파, 중립파의 중론을 언급한 것이었다.

    “저는 어느 한 쪽이 진정한 해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 지성을 크게 뛰어넘는 판단입니다. 다만, 어느 쪽을 지지할지라도 합스부르크 제국의 가면을 쓰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렇다.

    어느 파벌이든 제국의 이름을 필요로 한다.

    “평원파는 인간종을 정벌하는 데 있어 적절한 명분이 필요합니다. 순전히 마왕군의 이름을 걸고 출진하면 인간종이 지나치게 단단히 단합해버립니다. 반대로, 이쪽이 제국의 이름을 내걸 경우엔 잘만 하면 인간종의 분열을 획책할 수 있습니다. 전략적인 관점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이름이 필수적입니다.”

    이에 평원파의 마왕들이 납득했다.

    “산악파는 인간종과 타협하는 데 있어 명분이 필요합니다. 마왕군을 정면에 내세우는 것보다 제국을 정면에 내세우는 편이, 단연코 인간종과 협상하는 걸 수월하게 만들어줍니다. 외교적인 관점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이름은 절실합니다.”

    이에 산악파의 마왕들이 납득했다.

    “이리하여 양파벌이 같은 제국의 일원이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서로 대립할 뿐만이 아니라 때때로 협력하는 관계를 제도적으로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중립파의 입장에서도 합스부르크 제국은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되어줍니다.”

    이에 중립파의 마왕들이 납득했다.

    그처럼 지난한 설득을 바탕으로, 나는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서로 마음에 품은 열망은 다를지라도 우리는 타협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헛된 마왕의 긍지가 끼어들 틈새는 전무합니다. 오로지 냉철하고 뚜렷한 현실적 사고만이 허용됩니다. 알겠습니까, 발레포르?”

    내가 고개를 돌려 발레포르를 쳐다보았다.

    “우리들 전원이 어떻게든 마족을 위한 사회를 건설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왕의 긍지입니다. 그것이 왕의 의무입니다. 쓸데없이 추상적인 단어 따위는 개한테나 던져버리세요.”

    “…….”

    유일하게 방해되는 세력은 마족의 이상사회라는 꿈에 얽매여 있지 않은, 무소속 마왕뿐.

    나는 싸늘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지를 찾는다면, 좋습니다. 얼마든지 찾으십시오. 다만 그럴 경우 모든 파벌을 적으로 돌릴 각오 정도는 해주시길. 몽상가를 위한 자리는 더 이상 마왕군에 없습니다.”

    “…….”

    발레포르는 이빨을 바득 물었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하긴, 바알과 아가레스의 최후를 생각한다면 당연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루돌프 황제 쪽을 돌아보았다.

    “서열을 발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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