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38화 (338/510)
  • 00338 Brave New World  =========================================================================

    모처럼 마왕들이 대륙에서 회합을 가졌다. 여기엔 제법 각별한 뜻이 있었다.

    정치적 회합이든 단순한 연회든, 마왕들은 항상 마계의 중립도시에서 만났다. 모임을 주도하는 마왕도 언제나 중립파의 수장이었다. 높은 서열의 마왕이나 낮은 서열의 마왕이나 중립지대에서 서로 동등한 군주로서 만난다……그런 의미가 강력하게 담겨 있었다.

    바알조차 암묵적인 약속을 깨부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정작 대마왕이 죽어버린 작금에 이르러서 이 오래된 관례가 간단하게 무시되었다.

    흔들리는 마차 안.

    “언제까지 '그 자'의 폐단을 용납할 속셈이오?”

    대머리에 피부가 까만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서열 제6위, 아니, 전(前) 서열 제6위의 마왕 발레포르였다. 그는 생각보다 마차가 크게 흔들리는 바람에 기분이 불쾌했다. 기실 불쾌한 이유가 그것 하나만은 아니었지만.

    “나는 바알이 죽든 아가레스가 죽든 상관하지 않소. 그러나 우리의 권리는? 회합의 전통은 어디로 사라진 거요?”

    “글쎄에. 바알과 아가레스가 사라진 그 순간부터 과거의 권리는 이미 의미를 잃어버렸지.”

    가미긴이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물이 사라지면 바다에서 물고기가 날뛰기 마련이야. 인위적인 권리가 사라진 자리엔 다시 자연적인 권리가 제 모습을 위풍당당하게 드러내기 마련이구.”

    “……가미긴이 정치철학에 관심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소. 무슨 뜻이오?”

    “승자가 모든 것을 독점해. 그것이 우리 마족의 자연권 아니겠어?”

    발레포르의 검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허우대가 승자라니! 세 치 혀가 기발한 것은 인정하겠소만, 단순히 바르바토스의 위세를 빌려서 난동을 피우는 무뢰한에 불과하오.”

    “맞아, 맞아. 진짜 재수없는 녀석이야~.”

    가미긴이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녀는 눈앞의 남자가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로 가여웠다. 아직도. 대부분의 마왕이 아직도 단탈리안이 어떤 작자인지 모르고 있었다. 아니면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무시하는 것인지.

    세간에서 단탈리안에 대한 평가는 기껏해야 바르바토스의 훌륭한 동업자 정도. 평원파의 떨거지 부하, 라는 평판에 비해서는 진일보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사람들은 단탈리안이 평원파와 산악파, 중립파를 대신하여 앞장서서 발표하고 선동하는 일종의 대변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선전부장이라고 해야 할까.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소. 바르바토스는 그렇다 칩시다. 파이몬도, 그래, 빚진 것이 있을 테니 이해하겠소. 하지만 왜 마르바스와 같은 인물이 단탈리안을 밀어주는 것이오?”

    “난들 그쪽 사정을 알고 있겠어?”

    “제기랄.”

    전제가 틀려먹었다.

    단탈리안은 단지 신생 마왕군의 얼굴 마담이 아니었다. 새로운 마왕군 자체가 단탈리안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기구였다.

    그렇다고 단탈리안이 마왕군의 지도자인가, 하고 묻는다면 가미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일 단탈리안이 지도자라면 지난 전쟁에서 가장 큰 이득을 얻는 자도 단탈리안이어야 했다. 하지만 단탈리안은 아무런 이익도 취하지 않았다.

    영지를 더 획득하지도 않았고, 약탈금을 얻지도 않았다. 단순히 정치적인 명성이 올라갈 뿐이었다. 실제로 이득을 독차지한 측은 평원파나 산악파 등의 마왕들이었다.

    설마 단탈리안은 성자와 같아서 어떠한 욕심도 없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지.’

    가미긴은 자기가 생각해놓고도 우스웠다. 아무튼 이상한 일이었다.

    이와 같은 사정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단탈리안을 우습게 여겼다. 그는 얼굴 마담에 지나지 않고 실질적으로 마왕군을 움직이는 사람은 최고위 마왕들이라고…….

    당장의 대화만 보아도 그러했다.

    “그래서 이번 회의에선 뭘 논의한다는 거요? 난 아무 얘기도 듣지 못했소.”

    “미안하지만 나도 전혀 모르겠는거얼.”

    “허. 당신에게도 알리지 않다니, 벌거숭이 녀석……!”

    가미긴이 속으로 비웃었다.

    ‘나는 딱히 너희들 편이 아닌데 말이야.’

    그녀는 능숙하게 표정을 연기하며 슬쩍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마차는 마을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재빠르게, 가는 길 위에 우연히 마을이 있다는 듯이. 마차는 기병대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 마을 아이들이 길변으로 우르르 도망쳤다.

    아이들은 말발굽이 당장 자기네 눈앞까지 튀어오를까 두려워하면서도, 기병의 늠름한 행군을 끈질기게 지켜보았다. 어떤 아이는 깃발을 향해 경례했다. 기병이 답례를 하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깃발 자체에 대한 경례였다.

    깃발은 지금 자기가 어디로 향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처럼, 또 그곳에로 너희 역시 데려가겠노라고 약속하는 것처럼 펄럭였다.

    여느 약속과 마찬가지로 깃발은 순식간에 마을을 지나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옅은 먼지구름이었다. 아이들은 먼지구름을 헤집으며 마저 뛰어다녔다.

    ‘하지만 결국은.’

    가미긴이 무감정한 눈동자로 먼지구름 속에서 펼쳐지는 그림자 연극을 바라보았다.

    ‘단탈리안은 누구의 편도 아니겠지.’

    *  *  *

    “가미긴 전하, 발레포르 전하 드시오!”

    호족(虎族) 시종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발레포르가 입술을 실룩거렸다.

    두 마왕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궁에 발을 들였다. 무소속 마왕인 그들에게 있어 이것은 사실 굴욕적인 처사였다.

    제국을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마왕들은 중립파와 산악파, 그중에서도 평원파에 속했다. 대다수의 무소속 마왕은 제국과 연관이 없었다. 황궁이란 장소는 엄격한 중립지대에서 거리가 멀었다.

    헌데도 단탈리안은 일방적으로 회합 장소를 황궁으로 결정했다.

    무례한 결정의 배후에는 명확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 신생 마왕군에 복종하든지 반항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도발적인 양자택일의 권고였다.

    물론 마왕들은 이미 전원 새로운 마왕군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러나 단탈리안은 이 복종을 명확하고 공식적인 사실로 박아두려는 것이었다.

    마왕들에게 허락된 호위병은 고작 열다섯 명. 사실상 모든 무장이 해제되고 발가벗은 채로 제국의 황도에 초대받았다.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황도에서 암살당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무소속 마왕들은 이빨을 바득 갈았다.

    “당장 허리를 굽혔다고 해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파벌 놀이 따위에 놀아나는 놈들 주제에……!”

    “우리도 서로 협력할 필요가 있다.”

    본래 정치를 혐오하여 아무런 파벌에도 가입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닥쳐오는 위협에 대해서는 싫어도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집결의 중심지가 된 마왕이 바로 가미긴이었다.

    “오오. 가미긴 님, 오셨습니까.”

    “가미긴 님의 미모는 하루가 다르게 만개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전에 미리 도착한 몇몇 마왕이 친근한 척 가미긴에게 접근했다. 가미긴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단탈리안은 의도적으로 마왕들의 착각을 이끌었다. 예컨대 무도회에 참석해서 가미긴이 아니라 바르바토스를 대놓고 칭찬한다든지. 꼭두각시 전쟁에서 유독 가미긴에게만 별동대를 맡겨 독립적인 작전권을 보장한다든지…….

    겉으로 보기에 단탈리안과 가미긴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그 관계란 의외로 아슬아슬해서 언제든 무너질 것처럼 불안했다.

    어째서 단탈리안은 가미긴과 불화를 일으키는 양 연기하는가?

    ‘나보고 소속이 없는 마왕을 제어하고 조종하라는 의미겠지.’

    가미긴이 웃으면서 생각했다.

    처음에 그녀는 단탈리안이 단순히 자신을 바르바토스보다 못한 여자로 취급하는 것이라고 여겼고, 마음속 깊이 분노했다. 그렇지만 무소속 마왕들이 점점 자신을 중심으로 집결하는 것을 보며 깨달았다.

    ――노렸구나.

    마왕군에는 발레포르처럼 단탈리안에게 불만을 가진 무소속 마왕이 제법 되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가미긴 주변을 얼쩡거렸다. 그 숫자는 예닐곱에 이르렀다. 인원이 적었지만 결코 무시할 만한 집단도 아니었다.

    ‘단탈리안이 가장 무서워하는 건 집단이 아니라, 마왕 개개인의 돌발 행위야.’

    집단에 소속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개인을 구속한다.

    개인끼리 맺은 약속은 쉽게 깨진다. 하지만 집단과 집단이 체결한 조약을 아무렇게나 깨트리기란 어렵다. 단탈리안은 무소속 마왕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두기를 원했으며, 그 대표자가 가미긴이 되도록 유도했다.

    가미긴이 미소를 지었다.

    ‘제정신이 아니지.’

    자기 자신에게 적대적인 인물들을 일부러 집결시킨다. 도저히 평범한 정신머리를 가진 사람이 획책할 만한 노림수가 아니었다.

    오로지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진 자만이 이런 미친 짓거리를 벌였다. 너희가 아무리 모여들어서 집단적으로 대항해도, 나는 그것을 제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

    무소속 마왕들 중에서 극소수만이 이것을 눈치챘다.

    그중 한 명이 전 서열 제3위의 마왕 바싸고였다. 그는 가장 강력한 무소속 마왕임에도 불구하고 집단에 가입하길 진즉부터 거절했다. 그는 어리석은 벌레를 내려다보는 눈빛으로 다른 마왕들을 비웃었다.

    “자발적으로 인형놀이에 참여할 생각은 없다.”

    그것이 바싸고가 동료들한테 유일하게 건넨 조언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전 서열 제7위 아몬. 그녀는 철저하게 방관자의 자세를 취하며 동료들과 멀어졌다. 무소속 마왕들은 두 사람의 태도를 이기적이며 무책임하다고 비난했지만, 아는 사람이 보기에는 더없이 훌륭하게 처세한 것이었다.

    지금도 바싸고는 어전 저편에 외로이 혼자 서 있었다. 가미긴이 그와 눈빛을 마주치자, 바싸고는 가만히 입끝을 들어올렸다. 가미긴은 자뭇 기분이 나빴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위대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주이시자 유일무이한 주권자이신 황제 폐하 드시오!”

    마왕들이 전부 모이자, 기다렸다는 듯 시종이 소리쳤다.

    화려하게 금빛 옷을 입은 루돌프 황제가 걸어들어와 옥좌에 앉았다. 그 좌우에는 자연스럽게 바르바토스와 단탈리안이 기립했다.

    일부 마왕들이 조용하게 투덜거렸다.

    “어차피 꼭두각시 황제이거늘 뭐 의례를 지킨다고…….”

    “애당초 왜 우리의 회합에 인간 황제가 끼어드는지 이해할 수 없구려.”

    “정말로 무슨 생각인지!”

    불쾌한 구도였다. 옥좌는 살짝 높은 곳에 위치했고, 당연하게도 바르바토스와 단탈리안은 다른 이들을 내려보게 되었다. 마왕들 사이의 평등을 강조해오던 전통에 어긋났다.

    마왕들의 목소리가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단탈리안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여러분을 소집한 것은 논공행상을 다시 철저하게 따지기 위해서입니다.”

    “논공행상이라니?”

    바싸고가 눈썹을 찡그렸다.

    “니블헤임에서 이미 전부 정당하게 몫을 분배하지 않았더냐.”

    “그것은 마계에서, 마왕으로서 몫을 분배한 것입니다. 제국의 일원으로서 응당 받아야 할 몫은 여전히 미정인 채로 남아 있지요.”

    “……본인은 딱히 제국의 일원이 된 기억이 없다마는?”

    바싸고가 뭔가 께름칙한 표정으로 말했다.

    단탈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부터 마왕군과 합스부르크 제국은 일심동체가 되어 움직여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오늘 이 자리에서, 공로와 허물을 철저히 되물어 여러분들 사이에 제국 내 서열을 확고하게 정해두고자 합니다.”

    “…….”

    바싸고가 할 말을 잃었다.

    서열을 다시 정립한다.

    여느 파벌과 다르게 아무런 공로가 없는 무소속 마왕들에게 이는 청천벽력과 같은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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