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37화 (337/510)
  • 00337 아네모네 향기  =========================================================================

    라우라와 함께 누웠다. 침대가 부드럽게 우리 둘을 받아주었다.

    나는 라우라의 머리칼을 쓸어넘기면서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노래에 영 소질이 없었지만, 아주 어릴 적부터 듣고 자란 자장가쯤은 그럴듯하게 흥얼거릴 수 있었다. 어머니가 나에게 들려주던 노래였다.

    “바다가 불러주는……자장 노래에.”

    라우라가 내 가슴에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껍질을 부수고 나온 새가 이미 깨진 껍질을 찾아 그곳에 파고드는 것처럼. 꼭 딸아이가 응석을 부리는 것 같아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나는 그걸 거부하지 않고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라우라가 잠기운에 막 사로잡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주군. 흡혈귀가 되면 영원히 산다고 들었다.”

    “예. 저도 그리 들었습니다.”

    “흡혈귀에게 부탁해서 소녀도 흡혈귀가 되었으면 한다. 그러면 주군과 계속 함께할 수 있을 테니까.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내 머릿속에 얼핏 한 가지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곳에는 소녀가 있었다. 오로지 죽음만큼은 자신의 것이라고 당당히 선언하는 아이였다. 그 아이는 이제 자신의 것을 미련없이 포기했다.

    포근한 기억이었다.

    삶에서 얼마 마주치지 못할 유쾌함과 놀라움이 있었다. 나는 이제 기억에 정중히 장례식을 치루어주고자 했다. 마음속의 유리관에 기억을 살며시 내려두었고,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나중에 적당한 기회가 오면 부탁해보도록 하지요.”

    “응, 주군. 영원히 함께다…….”

    그 말을 길게 늘어트리며 라우라는 잠에 빠졌다. 손으로 내 옷자락을 꾸욱 잡은 채.

    삼십 분쯤 흘렀을까. 내가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다행히 라우라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새근거렸다. 며칠 내내 스트레스와 피로가 쌓였겠지.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숙면이었다. 나는 라우라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그리고 정처없이 걸어다녔다.

    발길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았다.

    사람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마왕성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영지에도 사람이 너무 많았다. 나는 탈출용으로 만들어둔 통로를 따라 마왕성 뒤편의 들판으로 빠져나갔다. 갈대숲이 자라난 강가였다. 기병의 추격이 어렵도록 땅이 축축한 지점에 통로를 마련한 것이었다.

    나는 강가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

    강물이 흐르면서 내는 소리가 내 가슴에 닿아 얇게 철썩거렸다. 안락한 우울이 몸을 적셨다. 나는 마음에 한 줄기의 강이 흐르는 것을 느끼면서 생각을 전환했다. 사실, 다른 무언가를 생각할 기력이 남았다는 것이 놀라웠다.

    흑사병이 거의 완전히 대륙에서 진압되었다.

    지역에 따라 심하게는 인구의 절반이 전염병에 죽어버렸다. 하지만 대체로 전체적인 피해는 총 인구의 2할~3할에 머물렀다. 본래 흑사병이 대륙 인구의 5할 이상을 앗아갈 예정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인류는 상당히 선방한 셈이었다.

    이제부터 농민의 권리가 급격하게 늘어나겠지.

    땅은 그대로 있는데 그 땅을 경작할 인원이 부족하다. 소출량이 턱없이 줄어들게 생겼으니 지주들은 막대한 돈을 써서라도 인력을 구할 것이다. 지주들 간에 경쟁이 붙는다. 더 높은 가격을 부른 지주에게 농민은 품을 판다…….

    전염병에 죽은 것은 농민뿐만이 아니다. 각종 계층에 평등하게 죽음이 내렸다. 대장장이든 곡물상이든 하다못해 신발공이든, 크게 줄어든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 출신과 신분을 묻지 않고 사람을 고용한다.

    군대를 기피하는 현상은 유례없이 확대된다.

    구태여 용병질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살 수가 있다. 피에 굶주린 미치광이가 아닌 이상에야 전쟁질 말고 다른 수단으로 밥을 벌어먹고 싶겠지. 용병단이 사라질 일은 절대로 없겠지만 최소한 몸값은 어마어마하게 불어난다.

    그 결과, 전쟁의 규모 자체가 줄어든다.

    군주와 영주가 전쟁을 벌이고 싶어도 전쟁 자금이 지나치게 막대하다. 웬만하면 직접적인 전쟁이 아니라 외교적인 방법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게 된다.

    그런데도 굳이 전쟁을 고집할 인간 군상이 틀림없이 생긴다. 어리석은 녀석들이다.

    놈들은 자금을 마련하려고 세금을 쥐어짜내리라. 그렇지만 더 이상 농민들은 힘없는 피착취자가 아니다. 높은 임금을 바탕으로 한 실질적인 힘, 여기에 농촌 사회 특유의 단결력이 함께한다.

    농민은 자신들에게 이익이 전혀 없는 전쟁 따위를 위해 세금을 내지 않는다. 영주에게 과감히 반대의사를 표명하리라.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귀족은 이것을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영주의 탄압, 농민의 저항……대대적인 농민 반란은 거의 필연적이다……대륙은 다시 한 번 혼란에 휩싸인다.

    이런 혼란을 어떻게 이용하느냐. 여기에 향후 마왕군의 미래가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경우에 따라 공화주의를 일으킬 수 있다. 왕당파 국가들과의 연계를 강화할 수도 있다. 아니면 두 가지 전부…….

    “단탈리안 궁중백?”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롱그위 성녀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강물에 몸을 씻었는지 머리카락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여긴 어쩐 일로. 아니, 그보다 당신……?”

    롱그위 성녀가 내 얼굴을 보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잠시간 침묵이 있었다. 그녀는 마치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생명체를 본 것처럼 경악에 잠겼다.

    성녀가 몇 번이고 입술을 벌렸다가 도로 닫았다. 그리고 눈썹을 찡그리더니 자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혹시 여신 앞에서 참회하고 싶은 후회가 있다면, 제가 대신 들어드리지 못할 것도 없어요. 이래 봬도 성녀라는 자리에 있으니까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도 내 삶은 어차피 후회가 가득할 것이라는 비아냥인가 싶었다.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감사합니다만 사양하지요. 반성할지라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것이 제 격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명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무슨 헛소리인지…….”

    작아서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성녀가 중얼거렸다.

    어차피 쓰잘데기 없는 내용이겠지. 이 성녀의 정치적 감각에 대해서는 이미 검증이 끝났다. 파르시보다 못했다. 딱히 얘기를 나눌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목욕재계를 막 끝낸 성녀님, 이라는 풍경은 확실히 진귀합니다만 아쉽게도 더 지켜보다간 여신께 천벌을 받을 듯싶군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잠깐만요.”

    성녀를 지나쳐서 걸어가려는 데 상대방이 제지했다. 조금 귀찮았다. 혼자 있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는 말없이 시선을 돌려 성녀를 빤히 노려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그것이……하아. 진짜 웬 오지랖이람.”

    롱그위 성녀가 주홍색 머리를 박박 긁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이윽고 마음을 먹었는지, 그녀가 눈가에 힘을 팍 넣었다.

    “궁중백. 저에게 아주 귀한 술이 몇 병 있습니다. 오늘 술을 마시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이 궁색한 영지에는 저와 잔을 나눌 사람이 없군요. 궁중백이 함께 처리해주면 고맙겠습니다.”

    “예?”

    너무 어이가 없어서 쉰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아무나 골라잡으면 될 것을.”

    “사람들은 성녀라는 여자가 술을 입에 대는 것 자체를 경원시해요. 웬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서는 대작도 할 수 없죠. 그리고 전 이제 막 당신의 영지에 와서 친분이 전혀 없고요.”

    “그야 그렇겠습니다만.”

    나는 제정신이냐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저랑 마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정말 본의가 아니지만 당신밖에 사람이 없는 걸 어떡하겠어요.”

    성녀는 끔찍하다는 얼굴이었다. 영문을 모르겠다. 혼자 마시면 될 것을 왜 날 초대하는가. 무언가 다른 의도가 숨겨진 것이 분명했다.

    “당신의 여왕 전하가 귀띰한 것이라도 있는지?”

    “네, 뭐. 그런 걸로 해두죠.”

    상당히 애매모호한 대답이었지만 딱히 술자리를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림으로써 별로 달갑지 않은 승낙을 표시했다. 그러자 성녀가 다짜고짜 땅바닥에 양털 수건을 넓게 깔고 앉는 것이었다.

    “롱그위 성녀. 설마 여기서 술판을 벌일 생각입니까? 제 눈이 고장나지 않았다면 여기엔 술은커녕 유리잔 하나…….”

    “클라우스트롬.”

    성녀가 마법영창을 읇자 그녀의 손목에 새하얀 아우라가 펼쳐졌다. 꼭 허공에 보이지 않는 주머니가 있는 듯, 성녀가 팔을 빛무리에 집어넣고 이리저리 휘저었다. 잠시 뒤에 그녀는 빛무리에서 술병 일곱 개와 유리잔 두 개를 꺼내었다.

    “자.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요.”

    “……어디에서 꺼내왔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대신전 창고요. 제가 원할 때마다 언제든지 창고 물품을 가져올 수 있죠.”

    요컨대 방금 롱그위 성녀는 아테나 대신전에 사람들이 바쳐다 놓은 술을 무단으로 탈취했다. 나는 양털 타올에 앉으면서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성녀가 사사로이 신전의 물품을 빼돌리다니. 당장 여신께서 천벌을 내려도 이상하지 않군요.”

    “어차피 여신께선 드시지도 못할 술인걸요. 도리어 여신을 대신해서 제가 마시면 잘했다고 칭찬해주시겠죠.”

    롱그위 성녀가 천연덕스럽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했다. 과연. 단순히 성깔이 있는 성녀일 뿐만이 아니라 인격에 하자가 있는 여인이었는가. 하긴, 미치지 않고서 성녀라는 말도 안 되는 직책을 감당할 리도 없었다.

    우리는 흐르는 강물을 옆에 두고 포도주를 주고받았다.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나 기다렸지만 성녀는 이상하게 하찮은 질문만 입에 담았다. 어쩌다 이곳 영지를 다스리게 되었는지, 마왕군의 참모가 되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이상한 여자였다. 의도를 알 수 없어서 그냥 대충 대답해줬다.

    “꺄악!”

    해가 빨갛게 질 무렵이었다. 늑대 한 마리가 술자리에 다가왔다. 나는 성녀에게 안심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 늑대에게 손짓했다.

    늑대가 얌전하게 다가와서 내 품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나는 녀석의 털을 손바닥으로 쓸어주었다. 늑대가 기분 좋다는 듯 갸르릉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성녀가 아연해졌다.

    “구, 궁중백. 그건 대체…….”

    “제가 지닌 마력에 홀려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다른 마왕들처럼 마력이 무시무시하게 많다면 되레 겁을 먹고 도망치겠지만, 저는 딱 적당하게 있어서요. 어째서인지 동물들이 좋아하더군요.”

    “하아…….”

    롱그위 성녀가 얼빠진 얼굴로 늑대를 바라보았다. 유리창 너머에 전시된 장난감을 바라보는 꼬맹이의 시선이나 진배없었다.

    내가 피식 웃었다.

    “성녀도 만져보시겠습니까?”

    “네? 저기. 그래도 안전한가요?”

    “당신이 절 죽이지 않는 이상 안전할 겁니다.”

    성녀가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는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늑대의 털을 만졌다. 늑대가 슬쩍 고개를 돌려 성녀를 쳐다보았다. 성녀는 멈칫했지만, 곧이어 늑대가 기분 좋게 울었다.

    성녀의 얼굴이 밝아지면서 본격적으로 늑대를 쓰다듬었다. 늑대는 아예 배까지 벌렁 드러내며 여인의 손길을 만끽했다.

    “헤에. 마왕의 마력이란 뭔가 신기하네요.”

    “마계의 학자들은 이것이 보통 동물과 마물 사이의 관계를 밝혀주는 단서일지 모른다고 추측하더군요. 뭐, 어려운 이야기라 저에겐 생소합니다.”

    술자리가 길어졌다. 해가 떨어지고 밤하늘이 되어도 성녀가 꺼내오는 술병은 그치지 않았다.

    그동안 사슴과 토끼, 여우, 열댓 마리의 동물이 내 마력에 꼬여서 다가왔다. 녀석들은 성녀와 내 주변을 빙그레 둘러쳐서 얌전히 앉았다. 성녀는 그 광경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내 앞에서 좀처럼 보이지 않던 미소를 한바구니 흘렸다.

    결국 새벽이 넘을 때까지 성녀가 암시한 '중요한 얘기'는 코빼기도 등장하지 않았다. 성녀가 먼저 술에 취해서 땅바닥에 엎어진 것이었다.

    “음냐, 더는 못 마셔요…….”

    눈앞에서 드르렁 코를 걸며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음을 뛰어넘어 헛웃음이 나왔다. 도대체 뭐였을까. 뭐, 이런 날도 있는 것인가.

    내가 성녀를 들어올렸다. 그녀를 늑대에게 태워서 마왕성까지 갔다. 손님용 침실에 그녀를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다음, 나는 내 침실로 돌아왔다.

    술기운 덕분인지 마음에 우울한 기색이 없어져 있었다.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오늘은 악몽을 꾸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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