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33화 (333/510)
  • 00333 아네모네 향기  =========================================================================

    더 이상 표정을 관리할 자신이 없었다.

    아직 분노가 얼굴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얼마나 버틸지 몰랐다. 시민들이 불안해하고 저기 승냥이 같은 성녀가 냄새를 맡겠지.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데이지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예.”

    라피스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내가 화를 내장에 도로 집어넣고 어깨를 두들기자, 그제서야 라피스는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대공회당에서 빠져나와 마왕성으로 향했다. 몇몇 간부가 우리를 눈치채고 따라오려 했지만, 내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마왕성에 도착할 때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간부진의 숙소가 마련된 지하 10층이 아니라 생뚱맞게 지하 9층으로 이동하는 것 아니겠는가. 내가 눈쌀을 찌푸렸다.

    “여기는 데이지의 방이 없어.”

    “…….”

    그렇군. 어찌된 일인지 몰라도 자기 숙소에서 격리까지 당했다 이거지. 나는 그만한 조치를 당한 데이지에 관해서 단 한 장의 보고서도 받지 못했고. 점입가경이로군.

    정점은 라피스의 발길이 멈춘 순간이었다.

    “이곳입니다, 단탈리안 님.”

    내가 말없이 눈앞을 바라보았다. 라피스가 멈춰선 곳에는 철창으로 된 문이 하나 있었다. 건축업자들이 대충 작업해놓은 것이 빤히 보일 정도로 벽이 다듬어지지 않았다. 동굴이나 다름없었다.

    지하감옥.

    “이……이……!”

    나도 모르게 이빨을 갈았다. 목에서 핏대가 뻗쳤다. 라피스가 자물쇠를 여는 것과 동시였다. 쾅, 하고 나는 철창을 걷어치웠다. 감옥에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동굴벽에 쉼없이 물이 흐르고 있었고, 감옥 안은 불길한 습기로 먹먹했다.

    그곳에 데이지가 걸려 있었다.

    구역질 나리 만치 짙은 혈향을 풍기면서.

    “…….”

    너무 분노한 나머지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데이지는 십자가 형에 처한 사람처럼 벽에 사지가 묶였다. 정신을 잃었는지 고개를 숙였다. 몸을 가려주는 천조각 하나 없었다. 새하얀 살결에 흉측한 상처들이 벌렁거리고 있었다.

    상처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수십 번, 수백 번, 끊임없이 채찍을 내리친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아 있었다. 어느 상처는 핏덩어리와 함께 검붉은 딱지가 징그럽게 굳어졌다. 어느 상처는 채 아물지 않아 핏물이 진득하게 흘러내렸다.

    인간이라기보다 차라리 넝마에 가까웠다.

    “……설명해라, 라피스.”

    라피스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시녀장이 암살을 획책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간부진 일부에서 제기되었습니다.”

    “정확하게 이름을 고하라!”

    내 목소리가 지하감옥을 강하게 때렸다. 마왕의 마력이 담긴 사자후였다. 동굴벽이 가볍게 진동했다. 라피스가 고개를 더더욱 낮게 숙였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군무상서와 이바르 로드브로크 시녀입니다. 특히 군무상서는 시녀장이 독약을 운반하는 과정에서 농간을 부린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여, 전하께서 의식이 없는 동안 시녀장에게 개인적인 처벌을…….”

    “감히!”

    내가 고함을 터트렸다.

    “감히 군부의 수장이 내궁부의 일원을 사적으로 처벌하다니!”

    “성녀의 병시중을 들던 데이지를 비밀리에 불러들여 암스텔의 모처에 감금하였으며.”

    라피스의 말이 빨라졌다. 내가 완전히 폭발해버리기 전에 필요한 정보를 모두 주려는 것이었다.

    “이후로는 마왕성으로 이송하여 지하감옥에 투옥, 채찍질과 담금질을 비롯하여 각종 고문을 가하였고,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겠으니 비밀로 부쳐둘 것을 각 간부에게 청했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라우라!”

    나는 분노로 포효했다.

    시녀장이자 양녀인 아이가 반시체가 되어 걸레처럼 벽에 널렸다. 이 세계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신은 차가운 동굴바닥에 무릎을 꿇고 죽음을 청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웠던 장군이, 언제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던 충신이 나를 기만했다.

    내 머리는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다.

    “당장, 가신단을 여기로 불러모아!”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루크를 제외하고! 이번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새끼도! 한 명도 남김없이, 당장!”

    라피스가 감옥에서 나갔다.

    나는 품속에서 포션을 꺼내들어 데이지의 상처에 바르려고 했다. 그러나 문득, 상처가 치유된 모습을 가신들에게 보여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참담한 풍경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야만 했다.

    내가 가까이 다가섰기 때문일까. 데이지가 미약하게 꿈틀거렸다.

    “……아, 버님……?”

    그건 목소리가 아니라 단지 허덕임에 불과했다. 나는 이빨을 바득 갈았다.

    “멍청한 년, 평소에 가신들한테 얼마나 밉보였으면 네 년을 지지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느냐. 국무상서마저 침묵했다면 너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별로, 대단한 일도.”

    온몸이 피멍으로 범벅이 된 와중에도 강한 척인가. 어이가 없었다.

    데이지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 작은 몸짓 하나를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머리와 목이 떨렸다. 초췌하고 또한 처참했다. 새까만 눈동자에는 초점이 흐릿했으며 입술은 핏물로 터졌다.

    “제기랄. 젠장……!”

    육두문자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나는 데이지를 숭고한 피해자 따위로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데이지를 향한 악의는 오로지 나한테서 비롯해야 했다. 이 여자아이는 나의 작품이었다. 내가, 다만 나의 손길에서 태어나는 악의 꽃이었다!

    데이지가 세계에 대해 지니는 악의는 오직 나에 대한 악의여야 한다! 그녀에게 허락된 세계는 나밖에 없다……그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해서도 안 된다!

    이 아이는 나의 것이다!

    나만을 바라보고, 나만을 증오하고, 나를 통해서 복수가 무엇이고 관계가 무엇인지 배우며, 그리하여 이 아이를 통해서만 나는 온전히 긍정되거나 부정될 수 있다! 이 아이는 나의 산 증인, 유일한 변호사, 유일한 판사이고, 마지막에 가서는 나를 대리할 인간이다!

    나의 작품을――.

    내 숭고한 심판자를, 제멋대로 다루다니!

    “…….”

    소리없이 끓고 있는 나를 데이지가 힘겹게 바라보았다. 데이지가 작게 웃었다. 왜 웃느냐는 식으로 노려보자, 데이지는 마치 땅바닥에 내던져진 물고기가 아가미로 호흡하는 것처럼 띄엄띄엄 입술을 움직였다.

    “아버님……뭘 생각하는지, 너무 빤해서…….”

    “…….”

    “그런 생각을……말로 주고받지 않아도……알아들어……우스워…….”

    나는 데이지의 입을 조용히 손바닥으로 가렸다.

    “복수를 행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하아.”

    웃음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숨소리를 남기고 데이지의 고개가 떨어졌다. 혹시나 싶어서 맥을 짚어보았다. 그저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괜찮았다. 데이지는 이보다 더 고통스러운 수술도 겪었다. 아직 시간은 남아 있었다.

    잠시 뒤.

    간부들이 속속 감옥에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데이지의 모습을 보고 숨을 들이키는 간부도 있었고,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기만 하는 간부도 있었다. 후자에 속하는 인물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전원.”

    와야 하는 사람이 모두 오자 내가 입을 열었다.

    “무릎을 꿇어라.”

    명령과 동시에 가신들이 동굴바닥에 부복했다. 라피스, 라우라, 파르시, 제레미, 이바르, 총 다섯 명이었다. 저 멀리서는 블링이와 요정들이 불안한 시선으로 이쪽을 훔쳐보고 있었다.

    “라피스.”

    “예, 전하.”

    “고개를 들어라.”

    라피스가 천천히 얼굴을 들어올렸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녀의 뺨을 후려갈겼다. 차악,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라피스가 바닥에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라피스 본인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단지 주변에서 경악에 잠기는 숨소리가 들렸다.

    라피스가 나의 총애를 거의 독차지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런 라피스를 때린 것이었다. 다른 가신들은 차마 입도 뻥긋거리지 못하고 고개를 더 깊이 조아렸다.

    “일어서라.”

    라피스가 몸을 일으켰다. 나는 곧바로 뺨을 때렸다. 라피스의 몸이 비틀거렸다.

    냉혹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명령했다.

    “일어서라.”

    반복.

    라피스는 한 번도 신음을 뱉지 않았고, 나 역시 건조한 명령 이외에는 어떠한 말도 입에 담지 않았다. 끔찍한 폭행의 소리만이 지하감옥을 을씨년하게 울렸다.

    정확하게 서른 번을 때리고서 손을 거두었다. 봐준 것은 없었다. 나는 전력을 다해 라피스의 뺨을 쳤다. 그건 라피스의 어깨가 소리없이 떨리는 것만 보아도 명확했다.

    “국무상서는 내궁을 철저히 감독하여 각 부서끼리 월권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철저하게 감시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직무를 방치, 군무상서의 독단을 제지하지 못하였으니 그 죄가 무겁다. 국무상서의 녹봉을 이 년 감한다.”

    “너그러운……처벌에, 감사드립니다…….”

    라피스가 떨리는 몸으로 허리를 숙였다. 두 다리가 그녀의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침묵과 공포가 감옥을 짓눌렀다.

    나는 어느 때보다 차가운 혓바닥으로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예, 주군.”

    “마지막으로 변호하라.”

    라우라가 이마를 바닥에 붙였다.

    “천녀는 대역죄를 범하였나이다.”

    “좋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변명이 없다는 뜻이었다.

    “제레미. 죄인을 천장의 사슬에 매달아라.”

    “예, 위대한 존재이시여.”

    제레미는 평소와 달리 장난기가 일절 없었다. 표정과 말투, 몸짓, 모두 감정이 거세된 암살자의 것이었다. 제레미는 즉각 일어나서 라우라의 두 손을 사슬에 묶었다. 정육점 고깃덩어리처럼 라우라는 천장에 매달렸다.

    “군무상서는 과인이 묻지도 않은 죄를 감히 독단으로 판단하여 시녀장을 문책하였다. 공정한 재판을 거치지 않음으로써 율법을 어겼으며, 과인의 의중을 멋대로 짚었으니 군신의 도리를 어겼고, 타 부서의 장을 처벌함으로써 국본을 어지럽혔다.”

    나는 감옥 한켠에 준비된 채찍을 쥐어들었다.

    “이에, 라우라 데 파르네제를 군무상서에서 파하고 백의종군을 명하는 바. 편형(鞭刑) 삼십 대에 처한다.”

    “저, 전하!”

    파르시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이중에서 선처를 요구해도 괜찮을 정도로 연관이 없는 사람은 파르시 한 명뿐. 다른 간부진과 다소 동떨어져 영지를 감독하는 역할이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막역한 친구마냥 대화하던 파르시는 사람이 바뀐 것처럼 예법에 따라 고했다.

    “아녀자의 몸으로 편형 서른 대는 감당하기 어려운 처벌이옵니다! 차라리 소신들 전원을 균등하게 벌하여주시옵소서!”

    “그대들 전원을 반 년의 감봉에 처한다. 허나 죄인에게 감형은 불가하다.”

    “전하!”

    파르시가 고개를 들었다.

    “……!”

    시선을 마주친 순간, 파르시는 동작이 멈추었다. 우악스러운 얼굴이 무언가 봐서는 안 될 것을 목격한 듯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파르시는 내 눈가를 잠시간 멍하게 바라보더니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채찍을 단단하게 쥐었다.

    “죄인의 등을 드러내라.”

    “예.”

    제레미가 라우라의 상의를 벗겼다. 새하얀 목덜미와 등이 드러났다.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눈 여자의 몸이 그곳에 있었다.

    채찍이 바람을 날카롭게 갈랐고, 살갗이 파이는 소리가 터졌다.

    라우라가 비명을 질렀다.

    나는 쉴 틈을 주지 않고 채찍을 가했다. 두 대째에 이미 피부가 완전히 터졌다. 채찍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새빨간 핏물이 튀었다. 그 핏물을 내 얼굴로 받으면서 나는 팔을 휘둘렀다.

    아홉 대를 때렸을 때 라우라가 혼절했다. 나는 제레미에게 눈짓했다.

    “깨워라.”

    제레미가 라우라에게 찬 물을 쏟아부었다. 물이 상처에 스며들었다. 끔찍한 고통과 함께 라우라가 강제로 의식을 차렸다. 나는 다시 채찍을 휘둘렀다.

    몇 번이고.

    몇 번이나.

    라우라는 일곱 번 정신을 잃었다. 등 근육이 모조리 넝마짝이 되었다. 피가 피를 씻어 바닥에 흘러내렸다.

    숨이 헐거웠다. 라피스와 라우라를 연속으로 처벌한 내 체력은 바닥을 찍었다. 그만큼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음이라.

    내가 숨을 헐떡이며 얘기했다.

    “신하가 잘못을 저지름에 있어 그 책임은 군주에게 있다. 나 단탈리안은 직무에 어울리지 않는 인재를 군무상서라는 요직에 올렸으며, 국무상서가 죄를 저지름에도 알아채지 못했고, 시녀장이 고문을 당함에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제레미에게 채찍을 건네주었다.

    “과인이 과인에게 형벌을 정함이니. 자경단장은 지금 즉시 과인에게 편형 예순 대를 집행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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