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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332화 (332/510)

00332 아네모네 향기  =========================================================================

데이지는 성녀의 병시중을 들고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들었다.

성녀가 쾌차했으니 진즉 본래의 업무에 복귀해야 마땅했는데, 어째서인지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 재수없는 꼬맹이는 병문안을 온 적도 없었다.

나는 자뭇 불쾌함을 느끼면서 성녀에게 말했다.

“성녀님에게 시종 한 명이 대동하지 않는다니 말이 안 되는군요.”

딱히 데이지한테 문안 인사를 받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병상에 쓰러진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데이지를 보지 못한 게 처음이라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워낙에 속이 시커면 녀석이라서. 어디서 뭘 꾸미고 있는지, 원.

“착각하지 마세요. 당신과 얘기하려고 일부러 떨어트리고 온 거니까요.”

“제가 보낸 시녀는 항시 데리고 다녀도 괜찮습니다. 밀담을 엿들어도 좋은 아이입니다.”

그러자 성녀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시녀라니요? 누구를 가리키는 거죠?”

“……일전에 흑발의 여자애를 병시중으로 보내지 않았습니까? 제 양녀입니다.”

성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흑발의 여자애라면……아아. 그 아이 말인가요. 잠깐 며칠 정도 제 수발을 들다가 다른 하녀로 교체되었는걸요. 그때는 저도 정신이 없어서 얘기를 나눠볼 틈도 없었고요.”

“……듣지 못한 이야기군요.”

“그거야 당신은 아예 사경을 헤매고 있었으니까요. 시녀장에게 물어봄은 어떤가요.”

그 아이가 시녀장입니다, 라고 대답하려다 목구멍으로 삼켰다. 성녀는 든든한 협력자이기도 했지만 잠재적으로는 브르타뉴의 세작이었다. 이쪽에서 제 발로 정보를 풀어줄 필요가 없었다.

나는 성녀와 적당히 헤어지고 루크한테 다가갔다. 내가 모습을 비추자 루크를 둘러싸고 있던 일단의 마을 소녀들이 황송하다며 무릎을 꿇었다. 루크는 자경단원이었으므로, 가슴팍에 오른주먹을 갖다올려 군례만 올렸다.

내가 한껏 자상한 대부를 흉내내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 루크가 인기가 많군. 곁에 있는 아가씨들이 모두 꽃처럼 아름다우니.”

허리를 숙인 채로 소녀들이 소리를 죽여 웃었다. 대륙에서는 모욕하는 자라느니 겨울왕이라느니 하나같이 흉흉한 별명으로 불리는 나였지만, 영지민들에게는 함께 밀밭을 일구는 농사꾼 영주였다.

루크도 이제 애송이 티를 많이 벗은지라 공손하게 대답했다.

“전하의 주변에야말로 사시사철 꽃이 만발하니, 감히 소인이 대적할 길이 없습니다.”

“축제에는 임금도 없고 신하도 없는 법이야. 주군이 아니라 대부로 불러주면 좋겠구나.”

“……! 네, 아버지!”

소년이 활짝 웃었다.

열다섯 살, 루크는 한창 심장이 정의로 두근거리는 나이였다. 소년의 이성은 파괴적이지만 애매한 안개에 끼어 있었다. 무엇이 선하고 옳은지 또한 무엇이 위선인지 깨달을 정도는 되었으나, 눈앞에 서 있는 인간의 정체를 꿰뚫어볼 수준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였다.

눈앞을 보지 못하면서 먼 미래만을 내다보는 자. 이런 사람에게는 초점이 없다.

자기 자신이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다 믿기 때문에 스스로를 이성적이라 믿으며, 사실은 눈앞의 사건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기 때문에 지도자로 삼을 수 없다. 그러나 광신도 돌격대장으로 삼기에는 제격이다.

제 누이보다 한참 못한 것.

비웃음이 밀려왔지만 차가운 비아냥이 아니었다. 가슴이 따스해졌다. 귀여운 병정인형을 내려다보는 기분이었다.

“루크. 혹시 데이지가 어디 있는지 모르느냐?”

“어…….”

루크의 안색이 곤란해졌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저는 전혀…….”

“아니. 괜찮다. 요새 통 보이지 않길래 너희 부모님 댁에 갔나 싶었다.”

라피스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그렇게 넘어가려는데 루크의 몸짓이 눈에 밟혔다. 조금 과도하게 우물쭈물거리는 기색이 있었다. 이럴 때 윽박지르면 상대방은 오히려 물러서기 마련이었다.

“아름다운 프로이라인들. 미안하지만 그대들의 아도니스를 잠시 나에게 빌려주지 않겠나.”

마을 처녀들이 꺄르르 웃으며 뒷걸음질하여 물러났다. 자연스럽게 루크와 나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다가서지 않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나는 네가 무엇을 말해도 기꺼이 경청하겠다, 라는 아우라를 풍기고 느긋하게 기다려주었다.

저어, 하고 루크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사실 데이지가 저희 집에 발길을 끊은 지 오래됐어요.”

“오래되다니. 얼마나?”

“이 년……아니, 거의 삼 년 정도요.”

나는 놀랐다. 이 년에서 삼 년이면 거의 영지에 정착했을 때부터 발길이 뜸하다는 소리였다.

“이상하구나. 데이지는 항상 휴가를 꼬박꼬박 받아갔다. 그때마다 집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었느냐?”

“처음에는 그랬지만요. 으, 이거 데이지가 절대 말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루크가 곱슬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 년쯤 됐어요. 데이지가 저희 가족이 다 모인 곳에서 갑자기 절연을 선언했어요. 자기는 이제 부모님의 딸도 아니고, 제 여동생도 아니라고…….”

“허어.”

흥미가 들었다.

데이지의 심리가 손바닥 눈금 들여보듯 훤했다. 직접 살결을 맞닿은 것이 아닐지라도 간접적이나마 데이지는 친오라비와 근친상간을 저질렀다. 더 이상 어떤 얼굴로 부모님과 오빠를 봐야 하는지 몰랐겠지. 그렇기에 절연을 선언했으리라.

이렇게 재미난 사건을 그간 숨겨왔다는 것인가. 데이지 녀석, 양아버지에 대한 예의가 눈꼽만치도 없군.

내가 짐짓 걱정스러운 어조를 꾸며냈다.

“대체 어찌된 일이더냐.”

“그게, 저도 모르겠어요. 당연히 부모님들은 노발대발해서 무슨 말이냐고 혼냈지만……아시잖아요. 걔가 입을 다물면 아무도 못 당하는 거요.”

루크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어머니가 울면서 제발 이유라도 말해달라 애원했는데도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더라구요. 결국 아버지 쪽에서 너 같은 딸내미는 필요없다고 먼저 쫓아냈어요. 어휴, 정말 무슨 생각인지.”

바로 너 때문이란다, 루크.

나는 마음속으로 히죽 웃었다. 데이지를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아넣는 작업은 내 눈길이 닿지 않은 곳에서도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던 모양이었다.

데이지는 지킬 것이 있으면 놀랍도록 악독해지는 소녀였다.

마을사람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고작 10살 무렵 내 앞에 나섰다. 자존심을 지키고 복수하기 위해서 나를 암살하려 들었다. 이런 부류의 인간은 웬만해서 제어할 수 없었다.

유일한 해법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지옥까지 떨어트리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 쓰레기이며, 무언가를 지킬 자격도 없고, 무언가에 의해 지켜질 자격도 없다……그렇게 질척한 자괴감이 필요했다.

마음이 썩어서 문드러지게끔.

오라비와 간접적으로 성교를 시키고 포로들의 고문을 일임했다. 악독한 짓거리 중에서도 가장 질나쁜 업무만을 맡겼다. 장차 영웅이 될 소녀가 어둠에 잠식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불쌍한 마음은 일절 들지 않았다.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려면 상대보다 내가 강하거나 적어도 동급이어야 한다. 나는 데이지를 나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인간으로 인정하고 있다. 내가 열 살 때 얼마나 어리버리한 꼬마였는지 떠올려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나는 마왕이며, 데이지는 용사가 되기로 예정되어 있던 소녀이다.

방심하면 이쪽이 물린다.

“알겠다. 이미 늦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한번 찬찬히 얘기해보마.”

“부탁드립니다, 아버지.”

루크가 애절한 얼굴로 말했다.

“데이지는 제 소중한 가족이에요. 부모님에게는 당연히 둘도 없는 딸이고요.”

“나에게도 데이지는 하나뿐인 양녀란다. 걱정하지 말고 나에게 맡겨두렴.”

루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헤헤, 하고 루크가 방실거렸다. 투명한 사육장에서 길러지는 햄스터처럼 귀여웠다.

“라피스. 이리로.”

나는 루크를 보내고 라피스를 불러들였다. 촌장들과 무언가 중요한 대화를 나누는 듯했는데, 내 부름을 받자 촌장들한테 꾸벅 고개를 숙이고 곧바로 걸어왔다. 라피스는 모든 간부진의 일정을 꿰고 있으니 쉽게 의문을 해소해줄 터였다.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 데이지를 골려줄까. 슬라임 오나홀을 슬슬 두 개로 들리는 방안을 생각해보고 있었다. 배덕감도 두 배, 자괴감도 두 배. 합쳐서 네 배의 효과를 이룩할 수 있었다. 엄청나군. 난 천재였다.

라피스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단탈리안 님.”

“응. 내가 대화를 방해한 건 아니겠지?”

“시덥잖은 잡담밖에 나누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라피스가 무표정하게 촌장들을 까내렸다. 라피스다운 언사였다.

내가 장난기를 섞어 투덜거렸다.

“다른 게 아니라 요즘 데이지가 보이지 않는걸. 성녀한테 시종으로 있는 줄 알았더니 아니라 하고, 제 부모님이랑 같이 있는가 싶었더니 그것도 아니라고 하네. 어디서 농땡이를 부리고 있는 거야?”

“…….”

라피스가 별안간 침묵했다.

얼굴에 여전히 표정이 없었지만 다년간 라피스를 관찰해온 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라피스는 지금 무표정하게 곤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라피스 전문 감별사인 내가 보증하는 것이니 틀림없었다.

“라피스?”

“……단탈리안 님께서 병상에 누워계신 시간이 예기치 않게 길어지자, 가신단 내에서 동요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라피스가 한껏 목소리를 낮추어서 속삭였다.

다소 불길했다. 내 질문에 라피스가 직접 대답하지 않고 에둘러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직문직답이 라피스가 내세우는 화법이었는데, 이는 그녀의 원칙과 매우 거리가 멀었다.

나는 곧바로 오른손 약지에 낀 반지의 마법을 발동했다. 반경 3미터 가량에 장막을 둘러쳐 소리를 엉망으로 굴절시키는 마법이었다. 이로써 행여나 목소리가 새어나가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가 눈초리를 진지하게 가다듬었다.

“계속 말해. 한점의 누락 없이.”

“단탈리안 님께서 반드시 쾌차하리라 믿는 가신도 많았습니다만, 만약의 사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두려움에 떠는 가신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겁쟁이로군.”

싸늘하게 비웃었다.

“나를 믿지 못하고 걱정함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걱정함이다. 나를 잃어버리면 자신이 어떻게 되어버릴지, 어떻게 몰락할지 두려워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의 감정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하는 것이니 내 가신으로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군무상서가 특히나 심각했습니다.”

내가 멈칫했다. 뭐라고?

나는 말도 안 된다는 의미로 기이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라우라는 우리 중에서도 발군의 정신력을 자랑한다. 나보다 윗줄이야. 뭘 잘못 파악한 것 아니야?”

“단탈리안 님.”

라피스가 각오를 정한 눈빛으로 나를 정면에서 쳐다보았다.

“예전부터 보고드리고 싶은 바가 있었습니다. 지금에서야 고함을 용서하지 말아주십시오. ……가신들이 단탈리안 님께 내비추는 모습은, 그들의 진정한 모습이 아닙니다.”

“무슨 소리를……?”

“단탈리안 님께 쓸데없는 심려를 끼쳐드리기 싫었습니다. 내궁(內宮)은 제가 통제할 수 있고, 또한 통제해야 옳다고 여겼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판단이 잘못되었습니다.”

나는 입이 벌어졌다.

라피스가 절망을 느끼고 있었다. 슬퍼하고 있었다. 자책하고 있었다. 그 뚜렷하면서도 실타래처럼 얽힌 감정이 나한테 뚜렷하게 전달되었다. 나는 경악과 더불어서 분노에 휩싸였다. 무엇이 라피스를 절망하게 만드는가.

“……데이지는?”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질문에 아직 답하지 않았어. 데이지는 어떻게 된 거야?”

그러자 라피스가 대답하는 대신에 고개를 숙였다. 차마 면목이 없다는 듯이. 라피스가 저런 모습을 보여준 적은 단언컨대 한번도 없었다. 내 위장에서 순식간에 노기가 격화되어 치밀어올랐다.

도대체 나의 군단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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