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31화 (331/510)
  • 00331 아네모네 향기  =========================================================================

    마왕 단탈리안 겸 합스부르크 제국 궁중백.

    나에게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주어진 호칭은 이와 같았다. 여기에 작위를 하나 더 추가하게 되었는데, 바로 튜튼 왕국의 공작이었다. 지난 외교전에서 영지를 튜튼 왕국에 바친 대가였다.

    내가 마왕성에 도착하자마자 칙서가 도착했다. 갈색 수염이 멋들어지게 뻗은 사신이 칙서를 낭랑하게 읊었다.

    “단탈리안은 종족 간의 평화와 대륙의 안녕을 위해 그간 동분서주한 바, 튜튼 왕국의 주권자인 나 게오르그 빌헬름 알베르트 알렉산더는 그의 영지를 공작령으로 봉하며, 그 이름을 <대륙의 수호자>라는 의미에서 커스토스(Custos)라 부를 것이다.”

    공작령이라는 점에서 나는 살짝 놀랐다.

    기껏해야 백작령에나 봉해주면 충분하고 넘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튜튼 왕실은 조금 다르게 판단한 모양이었다. 왕국의 백작으로 봉해본들 제국의 궁중백에 비해서 격이 떨어졌다. 외교에서도 왕국 백작보다는 제국 백작의 이름을 앞세울 터.

    그렇지만 공작은 달랐다. 명예직에 불과할지라도 그 명예가 밥을 먹여주는 것이 지금 세상. 괜히 바르바토스가 아우스테를리츠 공작이라는 간지 철철 넘치는 칭호를 가져간 게 아니었다.

    어차피 왕국의 정치에 간섭하지 않기로 비밀리에 약조해뒀으니, 튜튼에선 이왕 작위를 내려줄 거 때깔이나 화려하게 내려주자고 생각한 듯싶었다.

    “커스토스 공작 단탈리안에게 세 가지 특전을 하사하노라. 첫 번째, 과인을 알현할 때 이름을 고하지 않아도 되며, 두 번째, 의회에 입실할 때 왕가의 깃발에 경례하지 않아도 되며, 세 번째, 왕궁에 입조할 때 일체의 무구를 해검(解劍)하지 않는 것을 허한다.”

    휘이, 하고 제레미가 휘파람을 불었다.

    외교적인 자리에서 어마어마한 결례였지만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사신조차 덤덤했다. 여기 모인 사람 전원이 이것이 단지 허례허식임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상석에서 내려왔다. 사신 앞에서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단탈리안 커스토스. 삼가 명을 받아 신에게 주어진 직무에 한치의 소홀함이 없이, 위로는 여신을 모시고 아래로는 신민을 보살피겠나니. 다만 이 명예는 오직 제 주인되시는 전하에게서 비롯함이라. 여신의 축복과 신민의 칭송이 전하에게 영원할진저!”

    사신이 칙서를 건네주었다.

    원래 이때쯤에 구경꾼들이 두 손을 치켜들어 만세를 삼창해야 했다. 하지만 라피스를 비롯한 간부진만이 성의없게 손뼉을 쳤다. 내가 영지민들을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해봐라. 안 그래도 늦겨울이 한창이다. 추위 때문에 꼼짝도 하고 싶지 않은데 영주님의 행사가 있으니 모두 소집하라고? 그만큼 귀찮은 짓거리가 또 없다.

    그냥 따스한 집안에서 부부끼리 꽁냥거리도록 내버려둬라. 정 축하하고 싶으면 마음속에서 기도를 올리든지. 나는 영지민들에게 상당히 너그러운 군주이다.

    “놀구 있네. 그럼 왜 소인은 불러재꼈소?”

    ……라고 자화자찬하니 곰탱이 파르시가 투덜거렸다.

    봉공식이 끝나고 우리는 영지의 대공회당(大公會堂)에서 축제를 열었다. 돼지와 닭을 잔뜩 잡아다가 굽고 끓여대니, 어디서 냄새를 맡았는지 마을주민과 고아, 가난한 모험자가 꾸역꾸역 모여들기 시작했다.

    “네가 단순한 영지민이느냐? 내 쫄따구지.”

    “아이고, 소인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여신께서 이리 박하게 대접하시나.”

    “사냥꾼이 영주대리로 출세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는고.”

    참고로 파르시는 점점 더 얼굴에 위엄이 붙었다. 스무 살에 불과한데도 실질적으로 영지를 관리했다. 아무나 해낼 수 있는 과제가 아니었다.

    파르시가 갑자기 눈빛을 부라렸다. 꼭 반달곰이 벌꿀이라도 발견한 기세였다.

    “마침 얘기가 잘 나왔수! 마왕 나리!”

    “일단 수염에 묻은 닭국물부터 닦고 말하려무나.”

    너 정말 인간적으로 더럽다.

    “영주대리인지 뭔지 잘난 감투를 준 것은 그렇다 치겠소. 헌데 왜 소인에게 매파 한 명이 오지 않는 거외까!”

    “설마……너 아직도 약혼 안 했냐?”

    “약혼은커녕 추파를 던지는 처녀도 없수다!”

    야생의 반달곰이 포효했다.

    “소인이 이래봬도 근력이 장사이고, 응? 숲에 나가면 사슴이든 토끼든 꼭 한 마리씩은 잡아오는 사냥꾼에다 한 마을의 촌장이고, 이젠 영주대리이기도 하지 않소. 그런데도 여자가 한 명 없다니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오!”

    약간 의외이긴 했다. 얘가 생긴 건 조금 거시기해도 제법 유능한 남자인데.

    스무 살 주제에 면상이 무슨 사오십 대 아저씨처럼 생기긴 해도.

    온몸에 털이 북실북실해서 인간이 아니라 어디 산골에 굴러다니는 오크처럼 보이긴 해도.

    예법이라곤 쥐뿔도 몰라서 치킨 스프를 떠마시는데 아주 턱수염이 국물에서 자유영을 즐기는 수준이긴 해도.

    ……어라. 왠지 결혼하지 못하는 요소밖에 안 보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파르시, 너 정도면 상당히 괜찮은 신랑감이다만.”

    “이게 전부 루크 꼬맹이 때문이오.”

    루크? 여기서 왜 루크 얘기가 나오는가.

    “그놈이 과년한 처자들은 죄다 후리고 다니는 것 아니겠소! 마을에 처녀란 처녀는 죄다 그놈이랑 거사를 치뤘거나 치룰 예정이라고 하니 도대체 여신들께서 그놈을 홀라당 불태워버리지 않고 뭐하시는 것인지!”

    “아.”

    루크가 희대의 바람둥이가 되었다는 소문은 여러 번 들었다. 이제 열네 살 열다섯 살인 주제에 색욕의 화신이 되어 여자들을 사냥한다지, 아마.

    슬쩍 고개를 돌려서 공회당 저편을 바라보니, 루크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루크는 원래 게임의 남자 주인공이었다. 당연하게도, 화전촌 출신이라곤 믿기 어려울 정도로 미모가 빼어났다.

    그리스 조각상이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부드러운 곱슬머리, 매끄러운 이마, 오똑한 콧날. 쾌활하면서도 언제든 진지해지는 혁명가의 눈동자.

    입가에는 당신에게 이제부터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주겠노라고 약속하는 듯 특별한 기운이 희미하게 감돌았고, 변성기를 지나쳐온 목소리는 기분 좋은 중저음을 만들어냈다.

    몇 년 동안 제레미에게 '개인 교습'을 받아 밤일까지 능숙했다. 심지어 마왕인 나의 총애를 받아 영지 자경단에서 부단장을 맡았다. 열다섯 살 주제에.

    음. 그림으로 그려낸 먼치킨이로군.

    우리 영지의 처녀들은 어릴 적부터 저런 루크를 보고 자란 것이었다. 평범한 남자로는 눈에 찰 리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눈앞을 쳐다보았다. 반면에, 소위 루크의 대항마라 할 수 있는 파르시는…….

    “뭐요? 왜 이상한 눈으로 소인을 쳐다보오?”

    온몸에 털이 복실하다 못해 적이 부담스러운 곰탱이가 한 마리.

    ……이 마왕님이 웬만해서 눈물이 안 나는 사람인데 눈물이 나오는구나.

    “나리. 이대로 총각으로 살다 죽게 생겼수.”

    파르시가 절박하게 애원했다.

    “소인이 뒈질 때 뒈지더라도 토끼 같은 딸내미는 품에 안아보고 황천길에 들고 싶소! 제발 어디 먼 곳에서 소인의 단짝 좀 알아주십쇼!”

    “파르시. 너의 영주가 아니라 한 명의 남자로서 충고해주마.”

    나는 파르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포기하면 편하다. 그 왜, 비미날레 언덕에 창관이 으리으리하게 들어서지 않았냐. 거기서 애인이나 두어 명 사귀어서…….”

    “으아아아아!”

    파르시가 결국 광분을 토해냈다. 동정의 분노였다. 그렇다. 동정이었다. 파르시는 저렇게 생겼으면서 의외로 정조관념이 투철해서, 첫경험은 부인이 될 여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고집했다……불쌍한 녀석. 고생을 사서 하는군.

    그때, 옆에서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민에게 공공연히 유곽을 권고하는 군주라니. 도덕이 땅에 떨어졌군요.”

    자클린 롱그위 성녀였다. 새하얀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모처럼 친구와 떠들썩하게 대화하는 도중에 방해받은 기분이라,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잔치는 잘 즐기고 있습니까.”

    “예. 주인의 됨됨이에 비해서 영지민이 무척 유쾌하고 신심이 깊은 곳이라 놀랐습니다.”

    이 아가씨는 파르시가 보는 앞에서 왜 이러는가.

    대외적으로 성녀와 나는 굳건한 혈맹으로 맺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아무리 파르시가 가신이라 해도 사이 나쁜 모습을 보여서야 위험했다. 내가 맹렬하게 눈짓을 보냈다.

    롱그위 성녀는 딴청을 피우며 파르시한테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파르시 님이라고 하셨나요? 저는 아테나 여신님을 모시는 자클린 롱그위라고 합니다. 파르시 님은 젊으신데도 불구하고 영지 전체의 대소사를 중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평소부터 그 위명을 익히 들어 흠모했어요.”

    “흐, 흐, 흠모라니요?”

    파르시가 화들짝 놀랐다.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동정 녀석. 예쁘장한 미인이 칭찬 한 마디를 건네주었다고 아주 천둥벌거숭이가 되는구만.

    “당치도 않습니다! 소인은 그저 단탈리안 나리의 하수인에 불과합니다. 말씀을 낮추십쇼, 성녀님.”

    “후후. 본의 아니게 전하와 나눈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성녀가 한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그걸 파르시가 머엉하게 지켜보았다. 아이고. 저거 빠져도 단단히 빠졌다.

    “소녀 또한 결혼 이전에는 마땅히 순결을 지켜야 한다고 믿습니다. 파르시 님께서는 인세의 책무를 훌륭하게 이행하실 뿐만이 아니라 신들께서 우리에게 내려준 의무에도 충실하시니, 저도 모르게 감탄했어요.”

    “저기. 소인은, 그러니까…….”

    파르시는 볼이 빨개지다 못해 얼굴 자체가 사과가 되어버렸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아, 하고 말했다.

    “초, 촌장들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 말입니다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파르시가 헐레벌떡 뛰어갔다. 맙소사. 파르시, 정말로 그게 최선의 핑계거리였냐. 네 두뇌는 그보다 조금 더 괜찮은 변명을 생산하지 못한 거냐. 주군으로서 매우 부끄럽구나…….

    내가 한숨을 쉬었다.

    “순수한 청년을 괴롭히니 즐겁습니까?”

    “당신 같은 마왕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즐겁네요.”

    “쯧. 파르시는 건들지 마십시오.”

    롱그위 성녀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모른 척하는 것인가.

    “행여나 파르시를 브르타뉴의 앞잡이로 키울 생각은 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파르시가 순둥이로 보여도 나 단탈리안이 영주대리로 임명한 남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보기보다 만만치 않다고.”

    내가 입끝을 들어올렸다.

    “파르시가 정말로 결혼을 못해서 저러는 거라고 생각합니까? 본인의 위치를 자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파르시가 마을의 유력자 가문과 혼인해버리면 해당 마을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순결을 지키는 것이지요.”

    “하지만 당신에게 하소연하던 건…….”

    “외부에서 짝을 찾아달라는 청원이었습니다.”

    아무런 연이 없는 곳에서 아내감을 찾아달라. 파르시는 장난스럽게 투덜거렸지만 그건 원래 녀석의 성격이었다.

    유력자 집안과 결혼하기는 싫다. 평범한 마을주민과 결혼하고 싶은데, 그런 집안의 처녀는 죄다 루크한테 홀려 있다. 억울하다. 자기가 못난 게 뭐냐……얘기의 맥락은 그러했다.

    “'어디 먼 곳'에서 단짝을 물색해달라고 말했지요. 우연히 튀어나온 단어가 아닙니다.”

    성녀가 입을 다물었다.

    롱그위 성녀는 나를 따라서 영지에 왔는데, 여기엔 정치적인 이유가 숨어 있었다. 나에게 멋대로 휘둘리느니 차라리 옆에 바짝 붙어서 날 감시하겠다는 의도였다. 앙리에타 여왕이 지시했겠지.

    대외적으로는 우리 영지에 아테나 여신의 신전을 짓고 거기에 성녀가 부임하는 식이 되었다. 나야 성녀씩이나 되는 종교적-정치적 상징물이 제 발로 찾아온다니까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아까 전에 파르시한테 은근슬쩍 추파를 던진 것도 그렇고, 내 영지에서 약점이 될 만한 부분을 건드리고 싶겠지. 얕보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나는 아무나 가신으로 삼지 않는다.

    “뭐, 우리는 성녀를 환영합니다. 오늘만큼은 모략을 잊고 즐기십시오. 그리고 영지민을 축복해주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역할입니다.”

    “……좋아요.”

    내가 술잔을 내밀었다. 거기에 쨍, 하고 성녀가 조심스레 유리잔을 부딪혔다.

    “여신의 광명을 위하여.”

    “신민의 안위를 위하여.”

    나는 포도주를 마시면서 회당을 둘러보았다. 문득 간부진 중에서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크를 본 덕분에 알아챈 것이기도 했다.

    그러고보니, 아까부터 데이지가 안 보이는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