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29화 (329/510)
  • 00329 겨울왕(Rex Hyemis)  =========================================================================

    *  *  *

    나는 또다시 드러누웠다. 이번에는 몸살까지 얻었다.

    몸이 완치하지 않았는데 무리하고 말았다. 담당 사제는 혹시나 이상이 생긴 것 아닌지 당황했다. 여자에게 키스 세례를 퍼붓느라 몸살에 걸렸습니다, 라고 곧이 곧대로 말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입을 싸악 닫았지만.

    ……바보는 약으로도 고치지 못한다던가. 딱 내 꼬락서니를 가리켰다. 하지만, 파이몬을 공략하는 대가로 겨우 몸살을 지불한 것이었다. 그 나름대로 싸게 먹힌 셈이라고 자평하고 있었다.

    “당신이란 마왕이 어떤 작자인지 아주 잘 알았어요.”

    롱그위 성녀가 질려했다. 병문안을 와서 하는 말이 저거였다.

    “자칫하면 저도 당신도 죽을 뻔했어요. 말도 안 돼요.”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 살아있지 않습니까?”

    내가 싱글거리며 두 손을 보여주었다. 어처구니가 없는지 롱그위 성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눈앞에서 사람의 몸이 터졌어요.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진귀한 경험을 시켜드린 것 같아서 기쁩니다.”

    “여신이시여. 부디 이 악마를 저주하소서……!”

    롱그위 성녀가 이빨을 바득 갈았다.

    그녀에게는 누가 테러범인지 사전에 알려주지 않았다. 롱그위 성녀의 연기력이 얼마나 괜찮을지 몰랐다. 알면서 암습을 당하는 것보다 모르면서 암습을 당하는 것이 훨씬 더 실감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까 비밀로 해두었다.

    “닷새 안에 정신을 차리는 게 원래 계획이었잖아요. 그런데 오늘로 벌써 보름이에요. 알겠어요? 보름이라구요.”

    “음. 제 체력이 예상했던 것보다 저질이더군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롱그위 성녀가 버럭 성질냈다.

    영문을 모르겠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타인이 알아먹게끔 문장으로 말해라. 고릴라처럼 쿠왕쿠왕 소리를 질러서는 고블린도 고개만 갸웃거리겠지. 이런 양반이 신학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했다니, 학력 위조가 심각하게 의심되었다.

    아니면 호감도를 20까지 올리고 와라. 내가 알아서 심리상태를 읽어주겠다. 그럼 고릴라도 편하고 나도 편해진다. 해피 엔딩이로군.

    “……당신, 또 이상한 걸 생각하고 있지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시치미를 뚝 뗐다. 내 철면피는 대륙 최강을 자랑했다. 걱정일랑 전혀 없었다.

    성녀가 거하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죽기 일보직전이었다는 걸 말하는 거예요. 마왕 단탈리안. 저와 브르타뉴 왕국은 당신에게 협력하기로 결정했습니다만……. 만일 당신의 계획이 항상 이번처럼 불안정한 요소를 안고 있다면, 우리로서는 협력을 재고할 수밖에 없어요.”

    “과연. 불안정한 요소라.”

    그건 확실히 염려할 만했다.

    브르타뉴 여왕과 롱그위 성녀는 사활을 걸고 이쪽에 협조하고 있다. 우리의 자작극으로 테러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느 쪽이든 파멸해버린다. 정치적 파트너가 자기 목숨조차 챙기지 못해서야 불안할 거다.

    조금 섭섭하군.

    “롱그위 성녀. 당신이 대화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까?”

    “예?”

    “저는 단탈리안입니다.”

    내가 빙그레 웃었다.

    “당신의 군대를 전멸시키고 당신의 여왕에게 절망을 선물한 사람입니다. 자기 자랑을 늘여놓고 싶지는 않지만, 그토록 위세가 좋았던 브르타뉴의 기사단이 모두 제 군화 아래 싸늘하게 시체로 변했습니다. 혹시 브르타뉴의 기사단은 아무한테나 당할 정도로 약했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브르타뉴의 군대는 강했습니다. 그 강력함을 신뢰한 만큼 똑같이 저를 신뢰하십시오.”

    성녀가 침묵했다. 납득하지 못했을지라도 반박할 거리가 없겠지.

    나는 헛기침을 했다. 이쯤에서 이야기의 방향을 돌리기로 했다.

    “저는 당신의 설득에 의해서 이번 범행의 배후를 밝히지 않습니다. 적어도 바깥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런 식으로 비추어야 합니다. 문제는 당신을 제외한 성녀들입니다.”

    “……다른 성녀들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우리의 대본에 따르면 당신이 지나치게 '착한 성녀'가 되어버립니다.”

    전쟁과 전염병에 지친 민중들에게 있어, 자클린 롱그위 성녀는 지긋지긋한 종족 전쟁의 재발을 막아세운 위인이다. 하루가 다르게 그녀를 칭송하는 소리가 커질 것이다.

    “다른 성녀들이 보기에는 별로 재미있는 사태가 아닙니다.”

    “설마, 성녀들이 저를 질투라도 할까봐요?”

    롱그위 성녀가 코웃음을 쳤다.

    “당신 같은 악인은 모르겠지만 성녀는 엄격한 심사에 의해서 선발됩니다. 인성과 신심, 모든 면에서 월등하게 뛰어나야만 성녀의 직위를 얻고 유지할 수 있어요. 질투라니. 쓸데없는 걱정이에요.”

    “오, 성녀님. 세상에 쓸데없는 걱정이란 별로 없습니다.”

    내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엄격한 심사를 거치시고 아테네의 성녀가 된 자클린 롱그위 성녀이시여. 그대는 얼마나 대단한 인격자이길래 지금 마왕과 함께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까?”

    “……저는 브르타뉴를 위해서!”

    “똑같습니다. 다른 성녀들도 저마다 그럴듯한 변명을 찾아내겠지요. 자기에게 알맞은 옷을 골라입듯이 사람이란 매일 변명을 갈아입는 존재입니다.”

    기침이 나왔다. 이건 진짜 기침이었다.

    “구태여 성녀들이 수고스럽게 제 손으로 옷을 입을 필요도 없습니다. 롱그위 성녀. 당신이 범대륙적인 인기를 얻게 되면 아테네 신전의 인기도 덩달아 높아집니다. 다른 신전의 사제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

    “설령 성녀가 침묵하고 싶어도 주변에서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당신을 방해하려고 나설 겁니다.”

    특히 몇몇 성녀는 엘리자베트와 협력했다. 이게 문제였다.

    엘리자베트가 테러의 배후로 의심받고 있는 현재, 대놓고 그녀에게 협조하진 않겠지만 암암리에 공세를 취할 가능성은 충분히 높다. 틀림없다. 엘리자베트라면 '이미 한배에 탔다'라는 식으로 신전들을 협박한다.

    성녀가 한숨을 쉬었다.

    “좋은 방법이 있나요?”

    “간단합니다. 전부 들러리로 세워주면 됩니다.”

    나는 약하게 기침하면서 말했다.

    “알다시피 합스부르크 제국에는 국교가 없습니다. 성녀도 월맹군 전쟁에서 사형되었지요. 국교가 없다는 점을 역으로 이용합니다. 모든 신전을 국교로 예우하는 것입니다.”

    “예?”

    성녀가 무심코 눈을 깜빡거렸다. 꽤 귀여운 동작이라서 나도 모르게 아빠 미소가 그려졌다.

    “인류와 마족이 화합하는 상징. 앞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은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종족차별이 없는 대지에 종교적인 차별이 있으면 이상합니다.”

    롱그위 성녀가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신전들에서 제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어요.”

    “이유가 없으면 만들어냅니다. 모든 신전에게 남작령에 해당하는 영지를 무상으로 하사하겠습니다. 그래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습니까?”

    성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좋습니다. 이 제안을 가지고 각국의 대신전을 설득해주십시오.”

    안타깝게도 나한테는 종교계에 인맥이 전무했다. 롱그위 성녀가 수고해줄 필요가 있었다.

    “우리에게 우호적인 대신전부터 시작하세요. 헤스티아 대신전과 헤파이스토스 대신전은 반드시 마지막에 가서 교섭하고요. 우리한테 협력하길 주저할 겁니다. 그럼 당신들만 고립될 것이라고 협박해서…….”

    그때 기침이 연이어서 크게 튀어나왔다. 바싹 매마른 기침이었다. 젠장, 이러니까 환자 같아서 불쾌했다. 실제로도 환자였지만 말이다.

    롱그위 성녀가 얼굴을 찡그렸다.

    “정말로 몸이 괜찮은 것 맞아요?”

    “몸은 대체로 전부 나았습니다. 심리적인 문제이겠지요.”

    마왕의 신체는 어째서인지 심리적인 요인에 따라 쉽게 몸이 아팠다. 가령 이 세계에 떨어진 직후 허벅지에 화살을 맞았을 때, 상처 자체는 금방 치유했음에도 한두 달 동안이나 오른발을 절뚝거렸다.

    “아무튼, 이건 브르타뉴에도 나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제국에서는 당신에게 명예 공작의 직위를 내릴 것입니다.”

    “하아. 마왕이 내려주는 작위 따위는 받아도 기쁘지 않습니다.”

    롱그위 성녀는 단칼에 거부했다. 명예직이라곤 하나 공작씩이나 되는 작위였는데.

    “섣부르게 선물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브르타뉴 왕국에 나쁜 이야기가 아니라고.”

    성녀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낙재생을 자상하게 이끌어주는 선생님이 된 기분으로 말했다.

    “제국의 작위를 받으면 롱그위 성녀, 당신은 더 이상 브르타뉴의 성녀일 뿐만이 아닙니다. 제국의 귀족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요?”

    “브르타뉴 왕국은 우리와 맺은 조약에 따라 군사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국의 공작인 자클린 롱그위는 경우에 따라 군대를 동원할 수 있겠지요.”

    “……!”

    성녀가 눈을 크게 떴다.

    “구, 군사적인 행동을 허용해준다는 말인가요!”

    “경우에 따라서 말입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예를 들어, 그렇군요. 합스부르크 제국의 이익에 상반되지 않으면서 브르타뉴의 이익에도 걸맞는 경우라면 예외적으로 인정해드리겠습니다.”

    “…….”

    롱그위 성녀가 엄지 손톱을 깨물었다.

    브르타뉴 왕국은 향후 14년 동안 프랑크 제국의 영토를 침범할 수 없다.

    그런데 프랑크 제국을 제외하고, 브르타뉴에서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육로는 전무하다. 지난 전쟁에서 브르타뉴의 해군은 사실상 전멸했다. 즉, 브르타뉴는 14년 동안 꼼짝없이 군사적인 행동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여기서 내 제안을 받아들이면 브르타뉴가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통로가 새로이 생겨난다. 여차하면 무력을 동원해서 대륙에 간섭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성녀에게는 악마적으로 달콤한 제안이겠지.

    그러나.

    “우리가 군대를 움직이기 위해서는……합스부르크 제국의 승낙을 거쳐야 한다는 말이군요.”

    “정확합니다.”

    “제국의 외교는 단탈리안, 당신에게 달려 있지요.”

    롱그위 성녀의 눈빛이 음울하지만 형형하게 빛났다.

    “우리는 당신에게 종속되는 신세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군사를 움직일 때마다 당신에게 알려주고, 당신의 허락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고……결국 그렇게 되는 거잖아요.”

    내가 미소를 짓고 조용히 되물었다.

    “그래서 거부하시겠습니까?”

    롱그위 성녀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한동안 불온한 침묵이 흘렀다.

    성녀가 울분을 참으며 말했다.

    “언제나 이런 식이네요. 상대방에게 유리한 것처럼 보이게 제안을 건네지만, 사실은 당신에게 얽히고 또 얽히게 되어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들어요.”

    “저는 겁쟁이라서 말입니다. 좀처럼 타인을 믿지 못합니다.”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서로가 서로한테 얽히면 배신하기도 힘들어집니다. 어떻습니까, 저절로 신뢰가 생겨나지 않는지?”

    “……그런 걸 신뢰라고 부르는 시점에서 이미 당신은 사람으로서 끝장났어요.”

    나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므로.

    성녀는 앙리에타 여왕과 상의하고 다시 방문하겠다면서 떠났다.

    당연하지만 나중에 돌아온 대답은 '예스'였다. 앙리에타는 대륙으로 진출하는 데 어마어마하게 집착하고 있었다. 설령 우리의 통제를 받더라도 상관없다 여길 정도로.

    이로써 유사시에 써먹을 수 있는 군사적 카드가 하나 주어졌다.

    우리는 미리 계획한 바에 따라 차근차근 연극을 진행했다.

    바르바토스가 군사소집령을 내렸고,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긴장감이 대륙을 뒤덮었으며, 이에 성녀가 나를 개인적으로 만나서 설득했고, 나는 성녀에게 감화되어 테러의 범인을 영원히 비밀로 남겨두기로 결정했다.

    롱그위 성녀를 비롯하여 모든 성녀는 '위대한 결정'이라고 입을 모아서 칭송했다.

    이것과 더불어서 합스부르크 제국은 '모든 대신전의 평등'을 선언. 사람들이 보기에는 진실로 완벽하게 평화로운 결말이 이루어졌다.

    테러가 일어난 지 한 달째.

    나는 <대륙의 평화를 위해 자신에 대한 암살조차 넘어가는 선구자>라는 호칭을 가진 채 나의 마왕성으로 돌아왔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나 단탈리안이 평화의 아이콘이 된 것이었다.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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