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28화 (328/510)
  • 00328 겨울왕(Rex Hyemis)  =========================================================================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죽일 테면 죽여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나를 죽이는 것은 단지 하나의 개인을 죽이는 데 그치지 않는다. 평원파와 산악파, 중립파의 가교를 끊는 것이다. 마족과 인간종의 중재인을 없애는 것이다. 가미긴의 연인을 죽임으로써 무소속 파벌의 마왕을 제어할 수단이 파괴되는 것이다.

    그리고, 저 지위들을 얻기 위해서 희생된 목숨.

    아우스테를리츠에서 쓰려져간 오만의 생명과 부르노에서 허물어진 오만의 생명이 있다. 검은 산맥에서 비명횡사한 이천의 각오가 있다. 아가레스의 삶과 바알의 생애 또한 틀림없이 있었다.

    아무런 잘못 없이 죽어나간 수만의 무게가 주어져 있음은 물론이었다. 나는 명확한 의사와 판단을 가지고 모든 학살을 저질렀다.

    나는 이것이 나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더없이 긍정한다.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곳은 변명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산꼭대기이며, 고로 변명을 씨앗으로 삼아 수확되는 곡물일랑 애당초 나지 않을 토지이다. 죽은 자만이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는 망령의 묘지요, 아무것도 태어나지 않고 모든 것이 불임인 채로 얼어버린 설원이다.

    이곳을 부정하려는 자에게는 위대한 변명이 필요할지어니.

    엘리자베트처럼 인류와 국가를 주장해도 좋다. 무엇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각오가 있느냐 없느냐, 거기에 한점의 위선이 없느냐, 그뿐이다. 파이몬은 이러한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

    “제가 죽일 수 있을 리가……없잖아요…….”

    파이몬이 상처 입은 짐승처럼 폐부를 쥐어짰다.

    “저를 이해해주고……받아주고, 용서해주고.”

    껍질이 깨진다. 가슴에 파묻어두고 살아가는 알맹이가 표정에 드러난다. 얼굴이 감정의 표면이 아니라 감정의 바닥이 되어버린다. 그렇다. 그녀에게는 나와 다르게 바닥이란 것이 있다.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사람을……!

    파이몬은 울부짖었다.

    “그런 사람을, 제가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말했구나. 파이몬. 나를 죽일 수 없다고 말했다.

    좋다.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오로지 극소수의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상이, 백합의 꽃잎이 덧없이 낙화해버리듯이, 꼭 그처럼 소리없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파이몬은 자신의 이상을 위하여 묵묵하게 수백 년을 희생한 여인. 그 값어치는 대륙에 돌아다니는 금화를 전부 모아본들 감히 대적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이고 싶지 않다, 죽일 수 없다, 그런 지극히 현실적이고 강렬한 감정 아래 이상이 부정되었다.

    그렇다면 계약하자.

    나는 파이몬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저에게 당신의 신념을 맡기십시오.”

    영원히 깨지지 않는 계약을. 피의 맹약을.

    “파이몬, 당신은 결국 나 한 명을 죽이지 못합니다. 공화주의를 위해서 십만 명의 무고한 생명을 죽일 수 있느냐는 질문이 떨어지면 당신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겠지요. 그것이 당신의 한계입니다. 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단탈리안……?”

    눈물을 너무 많이 흘린 탓일까. 파이몬의 눈동자에 초점이 흐릿했다. 어딘지 불안해하는 목소리로 파이몬이 멍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무릎을 꿇어 그녀와 시선의 높낮이를 맞추었다.

    “당신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공화주의를 위해서 십만 명이 죽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수만의 목숨을 학살할 권리 따위는 어디에도 없고, 그래도 좋을 신념은 전무하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선(善)인 이상, 사람을 학살해서는 안 된다.

    대체로 수많은 이상주의자는 그것을 모른다. 알아도 외면한다.

    외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파이몬은 도리어 가장 아름다운 형태의 이상을 간직하고 있다. 나는 이제 그 아름다움에 창백한 표백제를 입혀서, 내 마음속의 박물관에 영원토록 전시해두고자 한다.

    “그러나 악한 자에게 십만이 학살되는 것은 가능합니다.”

    파이몬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단탈리안……지금, 무슨 소리를…….”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소망을 제가 대행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되도록이면 상냥하게. 무심코 기대고 싶어지도록.

    “당신이 죽이지 못하는 것을 제가 죽이겠습니다. 당신이 용납하지 못하는 희생을 제가 강요하겠습니다. 이제 그만 어깨에 진 짐을 내려놓아도 좋습니다. 애초부터 당신 같은 사람이 짊어져서는 안 될 물건입니다.”

    “말도 안 되요!”

    파이몬이 소리쳤다.

    “저, 저는 그런 걸 원하지 않아요……원한 적도 없어요……!”

    “거짓말입니다. 적어도 한 번쯤은, 아니, 수만 번은 소망했습니다.”

    나는 확신을 담아 파이몬의 보석같이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그곳은 어제와는 다른 세상이어서 마족과 인간종의 구분도 없다……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분명히 절규하는 심정으로 바랐을 것입니다. 틀립니까?”

    “아, 아…….”

    그녀의 입이 열리고 닫히기를 두어 번 반복했다. 입술의 틈새에서 그저 언어가 되지 못한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이건 계약입니다. 당신은 지금부터 모든 이상을 버리십시오. 저 하나 따위도 죽이지 못해서야 당신에게는 그런 이상을 입에 담을 자격이 없습니다……파이몬. 단순한 한 명의 여인으로 전락하세요.”

    무언가가 옳기 때문에 생애를 바쳐서 원한다.

    그 무언가를 위하여 사람들을 죽이면, 더 이상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이상가라면 누구나 처해버리는 역설이 여기 있다.

    그러나 애시당초 악한 자가 살육을 일으키면 어떠한가.

    학살이 일어난다. 수많은 사람이 죽는다. 그것을 일으킨 범인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는다. 어느새 눈치를 채보니, 대륙에는 '결과적으로' 공화주의가 퍼져 있다.

    이렇게 되면 살육의 책임을 확실하게 물을 수 있다. 동시에 공화주의도 달성된다. 범인은 결코 공화주의를 위해서 살육을 일으켰다고 말하지 않으므로, 공화주의는 죄악과 무관한 채로, 순수한 모습 그대로 남는다.

    그 세계에 영웅은 없으나 희생자 또한 없다.

    악한 자만이 선명하게 존재한다.

    사람들은 어떠한 의심도 의혹도 없이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은……당신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저를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저는 이미 십만 명을 죽였습니다. 거기에 파이몬이 하나 더해진다고 해봤자 별로 차이도 없습니다.”

    나는 유쾌하게 웃었다. 아직 상처가 낫지 않아 사지가 삐꺽거렸다. 그래도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선은 무능하고 악은 유능하다. 어찌된 일인지 세상은 그렇게 되어 있다. 유머 센스가 있는 사람이라면 여기에서 웃어야 마땅하다.

    “저를 염려해주는 것은 고맙습니다만 솔직히 주제를 아십시오. 설마 저를 구원하겠다느니 하는 생각을 머릿속에 품고 있다면 당장 쓰레기통에 처박으세요. 저는 그런 걸 원하지 않습니다.”

    “저도 당신한테 짐을 맡기는 짓 따위는, 바라지 않아요!”

    내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지만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직 모르겠는가. 나는 상대방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동의를 구하면 상대방과 공범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진정한 실력자에게 공범 따위는 필요없다.

    네가 나를 죽이지 못한다고 말해버린 순간 모든 것이 이미 끝났다.

    이제 필요한 것은 단 한 마디의 거짓말이다. 그것만 더해지면 눈앞에서 정신없이 울고 있는 여인의 영혼을 빼앗아올 수 있다.

    그걸 지금부터 보여주겠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파이몬.”

    “아……?”

    파이몬이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반걸음 앞서, 그녀에게 키스했다.

    파이몬의 눈동자가 커졌다. 약간의 저항이 있었다. 내 몸을 밀쳐내려고 그녀가 발버둥쳤다.

    나는 내가 환자라는 사실을 십분 이용했다. 파이몬이 움직이자 마치 몸이 아픈 것처럼 가볍게 눈썹을 찡그린 것이었다. 파이몬이 아, 하고 화들짝 놀라면서 저항을 멈추었다. 내가 중상자라는 걸 상기했겠지.

    그 틈을 이용했다.

    파이몬이 물러섰으므로 나는 더 거칠게 키스를 강요했다. 그녀는 나를 밀쳐내려는 듯 조심스럽게 내 몸을 어루만졌지만, 그런 장난스러운 반항은 오히려 우리의 두 몸을 얽히게 만들었다. 몸짓의 강도가 점점 사그라들었다.

    결국 남은 것은, 서로의 몸을 부드럽게 안은 자세뿐이었다.

    “……, …, …….”

    파이몬이 서서히 눈을 감았다.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면서 그녀의 볼에 미끄러졌다.

    그것과 동시에 이제는 음울하게 들리기까지 하는 효과음이 울렸다.

    「깊은 애정! 상대방이 당신에게 진심으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 애정으로 인하여 상대방에게 새로운 칭호가 생성됩니다.」

    호감도 50. 첫 번째 호감도락이 파괴되었다.

    파이몬을 공략하는 첫 조건은 다름아니라 파이몬의 이상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인가. 그야말로 악질적인 농담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는 충분히 납득하는 내가 있었다.

    호감도 50이란 아마도 단순한 수치가 아니다. 의미가 있다. 바로 히로인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또한 연인을 사랑하는 수치이다. 절묘한 균형을 나타낸다.

    호감도가 50보다 적으면 자신의 신념과 연인이 눈앞에 주어졌을 때 신념을 선택하겠지. 호감도가 50보다 높으면 연인을 우선해버린다. 50은 정확하게 이것도 저것도 택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 의미에서, 공략은 결코 좋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를 만나기 전에 파이몬은 그녀 한 사람으로서 완성되어 있었다. 달리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만나버리고 그녀에게는 신념과 동등한 무게를 가진 무언가가 생겨버렸다.

    신념이란 그 사람의 정체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공략은, 상대의 정체성을 뿌리부터 파괴하는 짓거리이다.

    라우라는 그녀 자신의 세계관을 포기하고 내 곁에 머물 것을 선택하게 되었다. 가미긴은 사랑에 집착하는 여자가 되어버렸다. 이바르에 이르러서는 아예 수천 년 동안 쌓아올린 정체성을 잃고 내 시녀로 몰락했다.

    그렇다. 몰락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그것을 몰락이라 부른다.

    “아, 읍……흐읏.”

    한층 더 부드럽게, 파이몬에게 키스한다.

    이제 그녀에게 저항의 의지는 파편조차 남지 않았다. 나를 그대로 받아들일 따름이었다. 파이몬은 몰락해버린 것이다.

    유일하게 안타까운 점은 지금 내가 정말로 몸이 아프다는 사실이었다.

    몸만 성했다면 당장 파이몬을 침대로 끌고가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줬을 텐데. 키스만으로는 약간 부족한 감이 있었다. 하긴, 이빨이 없으면 잇몸으로 대신하는 수밖에.

    사랑한다고 말한 여인과 입술을 맞추면서 이런 걸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말도 안 되는 놈이었다. 별로 새삼스러운 진실은 아닌가…….

    앞으로 파이몬은 내 의사에 따라 움직이겠지. 아직 이상의 잔재가 남아 제멋대로 행동하려 들지도 모르지만, 내가 강력하게 요구하면 거절할 수 없다. 그것이 공략이 진행된 히로인의 말로이다.

    바야흐로 마왕군은 전적으로 나의 통제 아래 놓였다.

    바르바토스는 내 조언에 따라 움직이고, 파이몬과 가미긴은 나에게 함락되었으며, 마르바스는 스스로 눈에 띄게 움직일 의사가 없다. 훌륭한 결말이다.

    이런 얘기를 라피스한테 들려주면 틀림없이 혼나겠지만, 글쎄.

    적어도 키스하는 동안 다른 여자를 떠올리는 건 아무리 나라도 예의가 아님을 인식하고 있다. 알고 보면 나는 매너로 이루어진 남자다. 매너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파이몬의 입술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집중했다.

    조용해져버린 밤을 느끼면서.

    ============================ 작품 후기 ============================

    어제 덧글란에서 긴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덧글란에 전혀 간섭하지 않습니다!

    다만 (1) 다른 작품이나 다른 작가를 욕하는 덧글, (2) 다른 독자를 욕하는 덧글은 삼가해주시길 바랍니다. 그 이외의 모든 덧글은 허용됩니다.

    욕이란 단어가 애매하다면 예시를 들겠습니다.

    '오, 당신께서는 참으로 멍청하셔서 제가 다소 놀라고 말았습니다. 마치 자연이 우연하게 만들어낸 기적을 목격하고 우리가 때때로 놀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멍청함은 저에게 일종의 경외감을 안겨주는군요.' → 허용

    '씨○ ○나게 ○○하네, 두개골에 그딴 ○같은 뇌수를 집어넣은 채로 어떻게 숨은 쉬고 있냐? ○발 자연의 기적을 목도하는 것 같아서 ○나 지려버림.' → 불허

    요컨대 최소한의 포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포장은 의례적인 존댓말이어도 좋고, 재치있는 유머여도 좋습니다.

    참고로, 글쓴이 본인에 대한 욕설은 예외적으로 허용됩니다. 부디 안심해주시길. 저는 안전한 마조히스트입니다.

    소설의 본문이 글쓴이의 공간이듯이 소설의 덧글란은 독자의 공간이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 주어진 공간을 자유롭게 이용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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