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27화 (327/510)
  • 00327 겨울왕(Rex Hyemis)  =========================================================================

    바르바토스는 의외로 선선하게 떠났다.

    “섭정인 내가 놀고 있어서야 안 되니까”라고 본인은 주장했다.

    그럴듯한 변명이지만 사실은 달랐다. 환자인 나를 배려해서 일찍 일어선 것이었다. 다만 바르바토스는 그런 걸 입밖으로 표현하는 위인이 아니었으며, 나는 그녀의 그런 성격을 사랑했다.

    만일 결혼한다면 바르바토스 같은 녀석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머릿속으로 결혼 생활을 그려보았다. 꽤나 손쉽게 상상이 이루어졌다.

    자식을 낳아도 바르바토스는 절대로 자기 손으로 키우지 않겠지. 귀찮다면서 남한테 양육을 떠넘겨버릴 거다. 뻔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아이를 키우려고 하니 주변 사람들이 막아선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단탈리안 님한테 아이의 교육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하고 이구동성으로 반대할 것이다. 나는 내 아이를 내가 키우겠다는데 뭐가 불만이냐고 소리치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럼 누가 우리 아이를 키울까. 글쎄. 아마도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양육하는 형태가 되겠지.

    주로 할 일이 없어 백수짓을 하고 있는 라우라가 아이와 놀아준다. 여기에 간간히 일을 끝내고 돌아온 라피스나 데이지, 이바르가 끼어든다.

    그러다가 애가 조금 커서 머리가 굵어지면 제레미를 따라다니는 거다. 말도 안 되는 장난꾸러기가 되어서 우리 마왕군과 영지를 완전히 뒤집어놓겠지. 이바르가 도련님, 도련님! 하고 말려보지만 전혀 효과가 없다.

    바르바토스는 자기 자식을 말리지는 못할망정 낄낄 웃으면서 칭찬하겠지. 나는 옆에서 한숨만 푹푹 쉰다.

    아름다운 꿈이로군. 마왕은 자식을 낳는 것이 불가능하다. 공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어째서일까.

    사람은 커가면서 자신에게 무엇이 불가능한지 깨닫게 된다.

    나는 용사가 될 수 없다. 혁명가도 될 수 없다. 예술가도 될 수 없다. 나에게 남은 길이 무엇인지 점점 더 명확해진다. 예컨대 나는 사람들을 이끄는 제왕이 될 수 없을지라도, 사람을 선동하고 농락하고 모욕하는 자가 될 수는 있다.

    단탈리안은 선동하고 농락하며 모욕하는 자이다.

    원하든 말든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다. 너무 슬퍼할 이유도 없다. 애시당초 딱히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삶이 내가 원하지 않는 형태로 굳어져 가는 것 또한 자연스럽다…….

    그렇지만, 거기에서 이상한 생각으로 빠지는 극소수의 사람이 있다.

    그들은 '나'에서 정체성을 찾지 않는다. 눈길을 다른 곳으로 향한다. 마치 저 너머에 더 넓고 더 광활한 지평선이 존재한다는 듯이.

    그 보이지 않는 지평선에 사람들은 여러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인류.

    국가.

    세계.

    나는 타인을 농락하고 모욕할 수 있다. 얼마든지 그래도 좋다. 하지만 인류 전체가 그리하여도 좋은가. 그것이 정말로 좋은 세계의 모습인가.

    타인을 속이고, 살인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강간하며 살아간다――그것이 정말 이 세계의 올바른 모습인가.

    그것을 내버려두어야 하는가.

    이 소수의 사람들은 조용히 선언한다. '아니다'라고.

    나는 비천한 사람이어도 괜찮다. 나는 이기적인 자여도 괜찮다. 그러나 인류가 그리하여서는 안 된다. 현재의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악마적이냐와 상관없이, 미래에 다가와야 하며,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인류 전체의 모습은 정반대여야만 한다.

    이들은 자신의 비천함을 똑바로 직시하면서 그러나 동시에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 정신병자의 무리는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라고 묻지 아니하고 '인류는 어찌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눈앞에서 학살이 벌어질 때, '나는 도망쳐야 한다'라고 대답하면서 동시에 '인류는 이를 용납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대답하며, 여기서 후자의 문장을 자기 자신의 대답으로 삼아버린다.

    정신병자이다.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인류 전체, 세계 전체 따위를 호명하면서 그것이 마치 실제로 있는 것처럼, 더 나아가 그것이 나의 정체성인 것처럼 행동한다. 이게 정신병자의 망상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거기에 병적인 아름다움이 있을지어니. 말하자면 그것은 세계의 질병으로서 사람들은 유사 이래 이 전염병을 앓고 있다…….

    “단탈리안.”

    내가 두 개의 눈을 뜨자, 그곳에는 새하얀 공간이 끝도 모르게 펼쳐져 있었다.

    어느새 잠들어버린 것일까. 나는 이곳이 꿈속임을 알았다. 예전에 한번 초대된 적이 있었다.

    “……파이몬.”

    붉은 머리의 여인이 어렴풋하게 미소를 지었다.

    “혹시 피곤한데 소녀가 방해한 건 아닌지 걱정이네요.”

    “괜찮습니다. 요 열흘 동안 평생 잘 잠을 전부 자버린 기분입니다.”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머지 잠은 훗날 무덤에 들어가서 영원히 보충하도록 하지요.”

    “…….”

    어라. 가볍게 농담하는 느낌으로 말을 꺼내들었는데 파이몬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슬퍼하는 것 같기도, 무언가를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바타비아 공화국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졌고,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궁지에 몰렸어요. 프랑크의 신생 정부에는 대륙을 결집시킬 만한 힘이 부족하지요. 공화주의자들을 이끌 세력은 이제 어디에도 없어요. ……단탈리안, 당신이 바라던 대로.”

    “…….”

    “어째서인가요.”

    파이몬의 눈동자가 물기로 흐려졌다.

    “단지 평화를 바랄 뿐인데, 그 식상한 단어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광경을 보고 싶을 뿐인데……누구보다 당신이 제일 잘 알 텐데……왜, 어째서.”

    엉망진창인 목소리에 엉망진창인 얼굴이었다.

    그렇기에 어떤 어조와 표정보다 직설적이었고, 나는 날카로운 화살촉과 같은 감정의 공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자기 자신을 헤치다니, 정말로 그런 방법밖에……저는, 당신을 상처입히고 싶지 않은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파이몬.”

    내가 조용히 그녀를 향해서 발걸음을 내딛었다.

    “당신이 상처입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과 바르바토스가 서로를 죽이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다가오지 마세요!”

    내 발끝이 멈칫했다.

    “당신은 치사하고 제멋대로예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정작 전부 알고 있고……수십 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주제에 왜 저 같은 여자의 죽음은 넘어가지 않나요! 소녀가 마음대로 죽도록……어리석게 자멸하도록 내버려두면 되잖아요……!”

    잠시 동안 울음소리만이 적막하게 내려앉았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갈 수도 없고 말을 건넬 수도 없었다.

    내가 자해했다는 소식을 듣고 파이몬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파이몬은 고결하지만 마음이 여리다. 괴로웠겠지. 자신의 계획이 무너졌다는 것보다 내가 자해했다는 사실에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파이몬이 괴로워하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니 알고 있으므로 복부에 단검을 쑤셔넣었다. 그녀로 하여금 죄책감에 휩싸이도록. 그래서 마왕군에 분열을 일으킨다는 계획을 스스로 단념하게끔.

    이것이 나이다.

    상대방의 신념을 우롱하고 모욕하는 자이다.

    “…….”

    나는 조용히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들었다. 저번에 깨달은 것이지만 이 꿈속에서는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옷차림으로 내 모습이 나타났다. 나는 언제나 단검 한 자루쯤은 품에 지니고 다녔다.

    “……단탈리안?”

    내 몸짓에서 수상함을 느꼈을까. 파이몬이 울음 섞인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나는 단검을 역수로 쥐었다. 정확히 내 목덜미를 향해서 칼끝을 세웠다. 파이몬의 눈동자에 경악이 번져갔다. 그녀가 나한테로 손을 뻗었다.

    “안돼!”

    파이몬의 손끝이 내게 닿기 전에 나는 칼날을 목 정중앙에 힘차게 박았다. 의외로 고통은 얼마 없었다. 혀가 위로 밀려오고 눈동자가 어디론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새하얀 공간이 사라졌다. 이곳은 내 진짜 몸이 누워 있는 방이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괜히 목을 쓰다듬으며 침대에서 힘겹게 일어났다.

    열흘이 넘도록 주구장창 누워만 있었다. 당연히 몸이 내 명령을 제대로 따라줄 리 없었다. 나는 거의 방바닥에 굴러서 떨어지면서 침대를 벗어났다.

    아직 움직이면 안 된다, 라고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일어서지 못했다. 다행히 근처에 적당한 막대기가 있었다. 커튼을 걷을 때 써먹는 은제 막대기였다.

    “끄윽…….”

    나는 그것을 막대기로 삼아 반쯤 몸을 일으켰다.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그래. 이 정도는 괜찮았다. 이것보다 상태가 심했을 때도 있었다.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나는 비틀거리면서 방문으로 향했다. 서큐버스는 가까이 있는 상대방에게만 꿈을 보여줄 수 있었다. 파이몬이 꿈속에 나타났다는 것은, 그녀가 이 저택 어딘가에 있다는 뜻이었다.

    침대에서 방문까지 가는 데만 다섯 번은 넘어졌다. 차라리 기어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었지만, 지금 방바닥에 누워버리면 정말로 정신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의식을 유지하며 나아가고 또 나아갔다.

    그리고 방문을 열자――.

    그곳에 파이몬이 주저앉아 있었다.

    어쩔 줄 몰라해서. 눈물로 엉망이 되어버린 얼굴로, 나를 멍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예쁜 얼굴이 얼마나 일그러졌는지 그만 웃음이 나왔다. 힘이 없어서 미약하게 입끝이 올라갔을 뿐이었지만.

    지팡이에 몸을 기대어서 간신히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었다.

    “당신은……겁쟁이입니다, 파이몬.”

    “…….”

    “저를 직접 만나는 게 무서웠겠지요. 어떻게 사과하면 좋을까, 어떤 얼굴로 만나면 좋을까……그걸 모르겠으니까 꿈으로 건너온 것입니다.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겁쟁이입니다…….”

    나는 알고 있다. 그녀의 본질은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이상주의자였다면 다른 사람한테 자기 신념을 마음껏 강요했겠지. 브루노 평원에서 당신은 자신의 마력을 잃어가면서까지 나를 구했다. 어째서인가.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행했는가.

    “당신은 아무도 희생시키고 싶지 않습니다……그게 마족이든, 저이든……그러니까 차라리 자기 자신을, 마왕이라는 종족 자체를 없애버리자고 결심했습니다.”

    “…….”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마왕이란 이질적인 존재가 있기 때문……그렇다면 나를 희생해버리자고 생각했겠지요.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 않으니까……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것이 서큐버스라는 계급에서 비롯한 강박관념인지, 아니면 파이몬의 천성에서 비롯한 성향인지는 알 수 없다.

    “오십 년 후에는 평원파가 강대해질 테니 그 전에 분란을 일으켜야 한다……좋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딱히 승리할 자신도 없을 겁니다. 당신을 제외하고 모든 마왕이 결집할 게 분명합니다. 그들을 이길 수 있습니까?”

    “저, 저는…….”

    “이기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테지요. 패배하면 자신이 혼자 몰락하면 그만이다. 당신은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월맹군 전쟁에서도 그러했다.

    만일 내가 파이몬의 입장에 있었다면 절대로 바르바토스한테 유예의 시간을 주지 않았다. 엘리자베트와 연합해서 거의 곧바로 협공에 들어갔을 것이다. 명분은 얼마든지 조작해낼 수 있다.

    그런데도 며칠이나 바르바토스에게 항복을 고민할 시간을 주었다. 예전에는 파이몬이 승리의 확신에 도취해서 자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이상을 남들한테 밀어붙일 배짱이 없을 뿐이다……학살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도 학살을 저지를 수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가 옳다는 절대적인 확신이 없으니까.

    원래 게임의 시나리오에서도 똑같았겠지. 용사를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도 놓쳤다. 왜인가. 용사가 고결한 인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마족을 위해서는 용사를 죽여야 함을 알면서도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으로 대신했다.

    파이몬. 너는 대륙을 피로 물들이기에는 너무나 자상하다.

    “아니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죽이십시오.”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맹세하건대 저는 당신의 행보를 앞으로도 가로막을 것입니다. 저야말로 당신의 가장 큰 방해물이자 걸림돌입니다……저를 죽여서라도 당신의 이상을 실현시킬 자신이 있는지, 어디 증명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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