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26 겨울왕(Rex Hyemis) =========================================================================
부상을 당하고 열흘째.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했다.
입술이 움직이고 눈짓을 건넬 수 있었다.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시간문제이겠지. 하루에 스무 시간은 의식을 잃고 있었던 게 빠르게 줄어들었다. 이제는 하루에 여섯 시간은 제정신을 차렸다.
내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사람은 라피스였다. 라피스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고, 마치 이렇게 될 줄 예상했다는 듯이 치료 사제를 불렀다.
“놀랍군요. 거의 기적에 가깝습니다.”
나이가 지긋하게 든 사제가 연신 감탄을 쏟아냈다.
“궁중백께서 인간이셨다면 분명히 기운을 차리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마왕의 신체에 대해 소문으로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만 과연…….”
“전하께서는 쾌차하신 것입니까?”
사제의 얘기가 길어지려고 하자 라피스가 칼같이 끊었다. 사제는 자신이 느낀 감상을 아름답고 장황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이 불만스러운지 입맛을 다셨다.
“예. 다만 너무 오랫동안 의식을 잃고 계셨지요. 체력을 회복하시는 데 시간이 제법 걸립니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앞으로는 회복하실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라피스가 두 손을 바르게 모아서 정중하게 인사했다.
나는 물론이고 노사제도 깜짝 놀랐다. 라피스는 더 이상 일개 마족 상인이 아니었다. 마왕군에서 실세를 차지하고 있는 군주의 측근이었다. 그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간단하게 허리를 숙였다.
“허, 허리를 들어주십시오. 소인은 평민 태생입니다.”
“목숨이란 신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만인에게 하나뿐입니다. 목숨을 구해주고 치료해주는 분에게 신분은 무의미합니다.”
라피스가 허리를 숙인 채로 말했다.
“저 라피스 라줄리. 단탈리안 전하의 국무상서로서 약속드립니다. 그대가 도움을 청한다면 무엇이든 전력으로 돞겠습니다.”
“허허.”
사제가 어이없다는 듯이, 반쯤은 기쁜 기색으로 웃었다.
“소인은 그저 정부에 잠시 고용된 의사에 불과합니다. 소인에게 감사를 표하기보다는 바타비아의 정부에 감사를 표할 일이요, 그러나 정부에는 무도회장의 경비를 게을리 한 책임이 있으니, 결국 누구에게도 감사를 표할 필요가 없습니다. 허리를 들어주십시오.”
“제 의사는 변함이 없습니다.”
라피스의 강요 아닌 강요에 사제가 백기를 들었다. 노인은 방을 나서면서 허탈하게 말했다.
“신하를 보면 군주가 보인다고 했습니다. 오늘 라줄리 님을 뵈오니 마왕이신 궁중백께서 어찌하여 브르타뉴의 성녀와 함께하실 수 있는지 능히 짐작됩니다. 부디, 아르테미스의 미소가 끊이지 않기를.”
참고로 이제까지 대화는 고대제국어로 이루어졌다.
마법사야 고대어가 기본 소양이니 그렇다 쳐도, 하층민 출신에다 상인으로 살아온 라피스가 모국어마냥 고대어를 써재끼는 것은 대체 어찌 된 노릇일까. 라피스 너무 유능하다.
두 사람만 남자 라피스가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
“…….”
라피스가 물끄러미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있기도 뻘쭘한지라 손가락으로 라피스의 눈가를 가리켰다. 거기엔 다크서클이 짙게 져 있었다. 손짓으로 대화해야 했기에 의미가 단락적으로 이어졌다.
‘너 지금, 눈 밑, 기미가 장난이 아님.’
그러자 라피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너무했다. 나 나름대로 여성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해준 말이었다. 약간 상처를 입었지만 문득, 저것이 열흘 동안 사경을 헤메다가 깨어나자마자 처음으로 표현한 의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음. 나란 놈도 하여간 물건은 물건이야.
* * *
“야. 네 재상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년이냐.”
바르바토스가 병문안을 와서 다짜고짜 투덜거렸다.
“왜, 라피스가 어때서?”
내가 쓰러진 지 보름이 흘렀다. 그동안 체력이 많이 회복되어 나는 목소리만 높이지 않는다면 꽤나 평범하게 대화할 수가 있었다.
“너는 모르겠지만 쟤가 아주 애들을 꽉 잡고 있었거든.”
바르바토스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다리를 꼬고는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잔뜩 좁혔다.
“너 새끼가 쓰러졌다는 말 듣고 내가 튀어왔겠냐, 안 튀어왔겠냐? 와보니까 문앞에서 파이몬 그년이 서성이고 있는 거 아니겠어. 안으로 좀 보내달라고 부탁하는데 네 재상이 떠억 가로막고 절대로 안 비키는 거야.”
“와우.”
가볍게 감탄했다. 그러니까 마족 중에서 기생으로 취급받는 서큐버스, 그중에서도 하프 서큐버스라 더더욱 천대받는 라피스가 무려 서열 제9위의 마왕인 파이몬을 막아섰다는 것 아닌가.
“뭐. 우리 라피스가 배짱이 좀 있지.”
“거기에 나까지 끼어들어서 보내달라고 했거든? 그래도 안 된대. 짜증나서 지배력을 쓰려고 했지. 그러니까 걔가 하는 말이 가관이야.”
단탈리안 전하께서 쓰러지신 지금, 단탈리안 마왕군의 책임자는 저입니다.
제 의사를 무시하는 것은 곧 단탈리안 마왕군의 총의를 짓밟는 행위입니다.
그래도 상관없으시다면, 부디 이곳을 지나가십시오.
“어이가 없더라니까.”
바르바토스가 투덜거렸다.
“그래서 무시했냐?”
“흥. 제깟놈이 그렇게 나오겠다면 어디 계급장 떼고 한판 붙자 이거야.”
바르바토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는 옷가슴에 손을 집어넣더니 목걸이를 꺼냈다. 내 왼손 손가락 두 개가 매달린 목걸이였다.
“내가 이거 보여주면서 말했지. 개 같은 분홍녀야, 난 지금 마왕이 아니라 저기 문 너머에서 곯아떨어진 새끼랑 수백수천 번 떡친 여자로서 찾아온 거다. 네 년이 재상이든 뭐든 시발 떡정을 막을 권리는 없다고.”
“푸하.”
뭐라고 해야 할까. 정말 바르바토스다웠다.
“시발, 그랬더니 들여보내주더라. 하다하다 하급 마족한테 허락을 받고 살아야 하냐, 내가? 으이구. 진즉에 뒈져버렸어야 하는데 뭔 광명을 보겠답시고 여태 꾸역꾸역 살았는지 몰라.”
나는 실실 웃었다.
“라피스 미워하지 마. 내가 좋아하는 녀석이야.”
“네가 하는 거 보고.”
바르바토스가 눈빛을 바꾸었다.
“그래서, 이게 본론이다만. 누가 범인이야?”
“…….”
“잠깐 애들 풀어서 조사해봤더니 통령 그 쌍년이 범인이라고 수군거리던데.”
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바르바토스는 사건의 내막을 몰랐다. 순전히 부외자 시점에서 사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즉, 바르바토스의 생각이 곧 제3자가 공통적으로 지니는 의견이라 봐도 무방했다.
현재 정치계와 사교계는 이번 암습 때문에 한창 시끄러웠다.
겨울의 외교전으로 인하여 내가 인기인이 된 시점이었다. 안 그래도 이름값이 정점을 찍었을 때 암살 미수가 터졌다. 내가 죽을 것인가 안 죽을 것인가, 범인은 누구인가, 사건의 여파가 어디까지 퍼질 것인가……화제거리는 수없이 많았다.
각국의 대표단은 바타비아 공화국을 거세게 비난했다.
유명인사들이 모인 자리에 폭발범과 암살범이 끼어들었다. 심지어 암살범은 누구인지 밝혀지지도 않았다. 아무도 공화국의 실력을 신뢰할 수 없겠지. 그냥 본국으로 돌아가버린 대표단도 꽤 많았다.
이로써 공화주의 대표회의가 열릴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졌다……적어도 바타비아 공화국이 주최하게 될 일은 없다. 파이몬은 실패했다.
바타비아가 안 된다면 이제 대륙에 남은 공화국은 합스부르크 공화국이지만, 이건 더더욱 불가능하다. 엘리자베트 통령 자체가 암살범 내지는 암살범의 배후로 의심되고 있다. 게다가 공화주의자들 중에는 엘리자베트를 독재자로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마지막 한 개의 퍼즐만이 필요했다.
“바르바토스.”
“응?”
“이번 사건, 이대로 덮자.”
그러자 바르바토스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일단 물어볼게. 왜?”
“우리가 저번에 말했지. 우리 마왕군이 대륙 정벌에 나서기에는 아직 오십 년이 이르다고. 이번 사건을 키우면 전쟁이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그년이 한 짓이 맞구나.”
바르바토스가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다.
“평범한 놈이 범인이라면 전쟁까지 갈 이유가 없지. 전쟁을 벌이지 않고는 복수할 수 없는 인간이 범인인 거야. 그렇지? 응?”
“아니야.”
“그럼 어떤 개새끼가 널 찌른 건데!”
순간, 방안이 건물째로 진동했다.
바르바토스의 황금빛 눈동자가 살기로 충혈되었다. 마왕인 나조차 경직해버릴 정도로 숨 막히는 마력이 그녀의 몸에서 검게 피워올랐다. 방안의 공기는 바르바토스에게 공포로 떨었다.
아아, 이래서 바르바토스한테는 말하지 않았다…….
봐라. 만약 내가 스스로 배를 찔렀다고 말한다고 해보자. 바르바토스는 틀림없이 왜 그랬냐고 묻는다.
나는 파이몬을 막기 위해서라고 솔직히 대답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 누구보다 파이몬을 증오하는 바르바토스한테 말이다. 바르바토스가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고작 손가락 하나 잃어버렸을 때도 빡 돌아버린 바르바토스이다. 이번엔 얄짤없이 내전이 터져버린다.
그렇다고 바르바토스한테 거짓말을 하기는 싫으니까 나로서는 대답을 회피하는 게 최선이다.
“바르바토스,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 내가 너에게 부탁할 게 하나 있어.”
“부탁……?”
“그래. 부탁이야. 잘 봐. 너는 이제부터 약간 연기를 해줘야 돼.”
계획은 이러하다.
내 방을 나서고 바르바토스는 분기탱천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에 돌아간다. 그 다음, 바르바토스는 당장 어느 국가로 쳐들어갈 것처럼 군대를 소집한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공식적으로 범인을 밝히겠노라고 선언한다. 그 선언과 함께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면서.
그걸 보고 사람들은 정말로 범인이 엘리자베트 통령이었구나 싶겠지.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며 두려움에 떨 것이다. 전 대륙이 긴장에 휩싸이리라.
그때, 성녀가 나를 방문한다.
성녀와 나의 만남은 밀담으로 이루어진다. 두 사람이 만났다는 기록이 남을 뿐이지 정작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발표되지 않는다. 단지 반나절이 넘도록 밀담은 길게 이어질 필요가 있다.
직후에 내가 다시금 발표한다.
――대륙의 평화를 진심으로 열망하는 성녀에게 감명을 받아, 지난 암살의 범인은 밝히지 않겠다고.
전쟁 직전까지 긴장이 고조되었다가 극적으로 해소된다. 대륙 만민이 브르타뉴의 성녀를 칭송하겠지. 여기에 편승해서 나도 '대륙 평화'라는 웃기지도 않은 표어를 진심으로 주장하는 척 위장할 수 있게 된다.
암살을 받았음에도 끝까지 평화를 울부짖은 롱그위 성녀.
역시 암살을 받았음에도 성녀에게 감화되어 전쟁을 무마시킨 마왕.
우리의 이미지는 완벽하게 세탁된다.
“바르바토스. 저번에 우리가 대화했지. 앞으로 오십 년 동안은 전쟁을 벌이지 않아야 한다고. 이렇게 되면 충분히 오십 년을 뻐팅길 수 있어.”
“…….”
“너는 주전파인 척 연기해. 그리고 내가 반전파인 척 연기할게. 대륙에서 무슨 사건이 날 때마다 너와 내가 대립각을 세우는 것처럼 인간들에게 보여주고, 결국에는 너를 억누르는 연극을 보여주는 거야.”
사람이란 간사하다.
상대방이 아무런 이유없이 평화를 주장하면 좀처럼 믿어주지 않는다. 하물며 상대방이 지난 수천 년 동안 전쟁을 일삼은 마왕의 족속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런 의심을 없애려면 연극이 필요하다. 성녀라는 등장인물을 내세워서, 실제로는 있지도 않았던 암살의 범인을 조작하여, '평화를 주장하는 마왕'이라는 허울을 만들어야 한다.
만약 내가 엘리자베트를 범인으로 지목하면 증거 싸움으로 번진다. 이쪽엔 당연히 증거가 없다. 진실을 말하게 되는 마법이라도 검증에 들어가면 필패이다.
그러나 정반대로, 만약 내가 엘리자베트를 범인으로 지목하지 않은 채 내버려둔다면――역설적으로 의심이 계속해서 남게 된다.
범인은 엘리자베트. 그러나 평화를 사랑한 성녀와 마왕의 자비에 의해서 그저 조용히 넘어갔다. 그런 시나리오가 완성된다.
바르바토스가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가 불쑥 물었다.
“단탈리안. 설마 나와 평원파를 위해서 일부러 범인을 말하지 않는 건 아니지?”
“물론이야.”
나는 어디까지나 나를 위해서 침묵할 뿐이다.
그걸로 납득했는지 바르바토스가 한숨을 쉬었다.
“좋아. 이번에는 연극에 어울려주겠어……하지만, 나중에는 꼭 똑바로 말하라고.”
내가 빙그레 웃었다.
너랑 파이몬이 사이가 좋아지면 말해주마.
아마도 그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