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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325화 (325/510)

00325 겨울왕(Rex Hyemi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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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났다가 도로 잠드는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내 의식은 바다에 떠다니는 코르크 와인 병마개 같았다. 파도에 뒤덮이면 물속으로 꼬르륵 가라앉았고 또 뜬금없이 떠올랐다. 파도와 파도 사이, 약간이지만 평온한 의식의 수면이 펼쳐졌을 때, 갈매기 울음소리처럼 드문드문 말소리가 들려왔다.

“주군의 용태는…….”

“마법사와 사제가 한 말에 따르면……필요…….”

이건 라우라와 이바르의 목소리였다.

아마도 마법을 써서 암스텔까지 왔겠지. 라우라에게는 계획을 미리 말해두었다. 구태여 올 필요가 없을 텐데도 이렇게 방문한 까닭은, 내가 정말 위급하다고 주변에 광고하려는 것이었다.

측근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병을 간호한다. 그만큼 상태가 좋지 않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줄 필요가 있었다.

라우라는 저번 전역에서 일약 전설로 떠올랐다. 지금이 한창 이목이 집중될 시기였다. 광고 효과를 누리기에 때마침 적절했다. 라우라는 내 지시대로 잘 와주었다.

“제레미 경이 보장했다마는 정말로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인가.”

라우라가 초조하게 말했다. 목소리가 흥분되어 있었다. 내가 안전할 거라는 사실을 아는 것치고 어투가 조금 지나치게 생생했다.

“주군의 안색이 어둡지 않은가. 정말로 괜찮은 것인가.”

“가장 위험한 대목은 넘어갔습니다. 군무상서, 진정해주시…….”

“웃기지 마라! 지금 주군을 보고 소녀가 진정하겠는가!”

귀가 지잉 울렸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표정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꼭 얼굴가죽 자체가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곤란하군. 나한테서 얼굴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데 말이지. 대륙과 마계의 아가씨들이 절망에 빠지지 않을까 염려된다. 이거 참, 나도 업보가 깊은 남자이다.

……멍청한 농담이 떠오르는 것을 보니 상태가 최악은 아닌 듯했다.

뭐, 마취제를 과도하게 쓴 부작용이라던가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 의식이 선명한 동시에 어렴풋했다.

“소녀는 애초부터 이 웃기지도 않은 작전에 반대했다! 이바르. 분명히 자네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자신했을 터!”

“그렇습니다. 군무상서, 소인이 제레미 경에게 전달한 재료는 확실하게 안전을…….”

“하. 주군이 정신을 차리지 못한 지 벌써 일주일이다. 일개 시녀에게는 이 상황조차 '문제'에 해당하지 않는 모양이군.”

라우라가 늑대처럼 으르렁거렸다.

“여기서 맹세하지. 만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주군께 자그마한 불행이라도 닥친다면――소녀가 직접 두 손으로 자네와 자경단장, 시녀장을 죽음의 기사들에게 던져버릴 것이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지옥을 보여주겠다!”

정신이 멍한 가운데에서 나는 조금이지만 놀랐다. 저런 라우라의 목소리는 웬만해서 듣기 어려웠다. 예전에……꽤 예전에 어디선가 들어본 느낌이 있는데 언제였더라…….

안 되겠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생각이 두뇌가 아니라 두개골 껍질에서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라우라. 아무리 이바르가 직분상 하급자라고 해도 너무 막 대한다. 이바르가 저래봬도 심성이 여린데 배려를 해줘라.

라우라는 라피스를 제외하고 딱히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우리군에 없어서 걱정된다. 바르바토스의 애인이라 그런지 다들 조금 꺼리는 분위기가 있지…….

“거기까지 해두세요, 라우라.”

“라피스 언니. 허나……!”

“이바르 시녀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습니다.”

라피스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들리는데 의미가 바로바로 이해되지 않았다. 지각과 인식 사이에 약간의 버벅거림이 끼어 있었다.

“라우라도 동의했고, 저도 동의했습니다. 무엇보다 전하께서 직접 추진하신 일입니다. 라우라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

“아니면 제레미 경의 실력과 충성심을 의심하는 것입니까.”

이상했다.

라피스는 라우라와 사정이 다르다. 라우라야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솔직히 방구석폐인이나 마찬가지이다. 할 일이 없으니까. 마왕성을 비우고 이곳에 병문안을 와도 괜찮다.

하지만 라피스는 매일마다 업무에 시달리고 있다. 라우라에 비해 명성이 전무하므로 여기 와봤자 딱히 광고라고 할 만한 효과도 발생하지 않는다. 왜 괜히 방문해서…….

“아니다. 제레미 경을 의심하지는 않는다……하지만, 제레미 경이 직접 독약을 전달하지 않았다. 중간에 시녀장이 끼었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시녀장은 틈만 나면 주군을 독살하려는 종자이다!”

“라우라. 데이지 시녀장은 노예각인 때문에 결코 반항하지…….”

“무슨 농단을 부렸을지 누가 아는가!”

라우라가 악을 쓰듯이 소리쳤다.

다 좋은데, 여기가 환자실이라는 사실을 슬슬 유념해줬으면 한다.

“주군은 괜찮다고 웃어 넘기지만 예전부터 불안했다……이런 사고가 터질 줄 알았다. 그 아해가 약초를 잘못 전달한 것이다. 틀림없다. 소녀가 시녀장을 죽여버리겠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

드물게도 라피스가 언성을 높였다. 겨울바람처럼 차갑고 뚜렷한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하지만 라우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부정하지 마라! 언니도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을 터이다. 아니라면 왜 성녀의 시중을 시녀장한테 맡기고 정작 주군의 병간호를 신입 시녀한테 맡겼는가.”

“…….”

“시녀장은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아해이다. 그리 생각해서 라피스 언니도 직무를 거꾸로 배분한 것이다! 소녀가 틀렸다면 어디 반론해보아라!”

무서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라우라가 씩씩거리는 숨소리만이 방안을 메웠다. 모두가 불안하게 침묵하고 있었다.

나는 입을 열어서 타박을 주고 싶었다. 멍청한 라우라, 군무상서 주제에 우리 마왕군의 탑인 라피스한테 대들어서야 본보기가 서겠습니까.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사과하십시오. 아니, 무릎을 꿇고 라피스의 발가락을 핥으십시오.

“시녀장을 이곳에 불러라.”

“……라우라. 정말로.”

“라피스 라줄리 국무상서.”

라우라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소녀는 지금 주군 전하의 한낱 애첩으로서가 아니라 단탈리안 마왕군 서열 제3위, 군무상서로서 간하고 있다.”

“…….”

“제레미 자경단장이 약속한 기한은 사흘이었다. 그리고 현재, 사흘히 한참 넘어 일주일이 되었지만 주군 전하께서는 용태에 차도가 없다. 물론, 전하께서 내일이라도 아무 문제없이 깨어나실 수도 있다. 하지만 예정이 틀어졌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문책의 소지가 되어야 한다.”

라피스가 한숨을 쉬었다.

“단탈리안 님께서 지금 당신의 모습을 보면 많이 실망하실 것입니다.”

“상관없다. 주군의 이해자는 라피스 언니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

라우라가 말했다. 목소리에 어두운 독기가 서려 있었다.

“소녀는 주군의 검이다. 만에 하나라도 주군 전하께 위협이 될 요소가 있더라면 망설이지 않고 베어버리겠다.”

“……주인의 명령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병기에는 가치가 없습니다.”

“주군께서는 소녀에게 스스로 생각하는 병기가 되라 명령하셨으며, 실로 모든 것이 주군께서 명하신 바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라피스의 한숨이 깊어졌다.

“라우라. 당신은 위험할 정도로 단탈리안 님에게 광신적입니다. 전하 앞에서 항상 태연하고 나태함을 가장하는 당신이 실상 가장 악독한 광신도라니. 전하 본인께서도 모르시겠지요.”

“소녀는 단지 주군의 곁에 있을 뿐.”

라우라가 즉답했다.

“진정한 광신도는 오히려 언니 쪽이다. 소녀는 알고 있다. 언니가 왜 주군과 더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지.”

“…….”

“서큐버스는 첫사랑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성향을 지녔다고 들었다. 독점욕이 지나쳐서 자칫 상대방을 파멸로 몰아넣는다고 했던가.”

라우라가 비웃듯이 말했다.

“언니는 두려운 거다.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게 될까봐.”

“……지레짐작입니다.”

“주군께서는 스스로 오롯하게 서는 존재자를 사랑하신다. 자기 감정조차 제어하지 못하고 휘둘린다면 주군께 경멸을 받게 되겠지. 언니는 그게 무서운 것이다. 비겁자! 그렇게 자신의 감정에서 도피하는 것이야말로 주군이 증오하는 짓거리임을 모르다니!”

짜악, 하고 살결이 부닥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까 전보다 한층 더 짙은 침묵이 자리했다.

그 속에서 라우라의 목소리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당신은 크게 착각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진실로 단탈리안 전하를 믿는다면 이렇게 난동을 피울 리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설마 실수로 시녀장한테 약품의 배달을 맡겼다고 생각합니까. 단탈리안 님은 그럴 분이 아닙니다.”

“…….”

“자기 감정에 휘둘리는 것은 당신입니다, 라우라. 전하에게 만약의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될지 불안하고 또 불안해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심하군요.”

아, 라피스였다. 저게 라피스였다.

나는 눈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그녀가 예의 싸늘한 무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위기의 순간에 드러납니다. 전하께서 부재하신 지금, 라우라는 감정에 잡아먹힌 괴물 덩어리가 되어 사방에 분노를 발산하고 있습니다. 제정신이 아니군요. 이래서야 당신을 군무상서로 임명한 단탈리안 님의 안목이 의심될 지경입니다.”

“무슨…….”

“그리고 두 번째.”

라피스는 상대에게 반론할 틈을 주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거부하는 것은 결코 도피가 아닙니다.”

“…….”

“저는 제 감정을 똑바로 직면하고, 숙고하고,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돌이켜보고, 앞으로 살아갈 삶을 미리 내다보며, 그리하여 결정을 내립니다. 그 결론이 설령 제 감정을 멈춰 세우는 것일지라도 그건 도피가 아닙니다. 그것이 저입니다.”

라피스가 무감정하게 말했다.

“올바른가 올바르지 않은가. 자연스러운가 자연스럽지 않은가. 그런 질문은 순번이 잘못되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결정한 올바름이고, 이것이 제가 받아들인 자연스러움입니다. ……문제는 단 한 가지. 저의 올바름과 자연스러움을 용납해줄 사람을 만날 수 있느냐 없느냐. 그뿐입니다.”

라우라가 입을 다물었다.

미안하지만, 라피스는 내가 이 대륙에서 유일하게 말싸움으로 이길 자신이 없는 인물이다. 라우라한테는 다소 버겁다.

“라우라. 당신은 지쳐 있습니다. 벌써 닷새가 넘도록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라피스 언니……소녀는……나는.”

“전하를 간호하는 것은 좋습니다만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두세요. 오늘밤은 제가 간호를 맡겠습니다.”

짧게 박수 소리가 들렸다.

“군무상서를 객실로 안내하세요.”

“아, 예. 알겠습니다.”

“이바르.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일 정오까지 수면을 취하십시오.”

라우라와 이바르가 뭐라고 반박하려는 것 같았지만 라피스는 끄떡하지 않았다.

“전하께서 병들어 주무시는 환자실에서 떠들고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런 정신상태로 환자를 돌보겠다니 어불성설입니다. 이건 명령입니다. 더 이상 추태를 부린다면 군법으로 다스리겠습니다.”

결국, 잠시 뒤에 문소리가 났다. 두 사람이 병실을 나선 것이리라.

마침내 방안이 조용해졌다. 그제서야 내 의식은 안심하고 수면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벌써 얘네가 떠든 내용이 기억에서 잘 떠오르지 않으려 하고 있었지만, 뭐. 무슨 상관이겠는가. 정말로 중요한 내용이었다면 저절로 기억에 남겠지. 나는 내 기억력을 신뢰했다.

감각이 끊기려는 찰나에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걱정끼치지 말아주세요.”

그 목소리는 잔소리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부드러워서.

만약 온몸이 마취되어 있지만 않았더라면 나도 모르게 대답해버릴 것 같은, 그런 목소리였다.

============================ 작품 후기 ============================

군주가 없어지면 단탈리안 패밀리는 곧바로 저렇게 되어버립니다.

화기애애해서 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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