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24화 (324/510)
  • 00324 겨울왕(Rex Hyemis)  =========================================================================

    단탈리안이 중상을 입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엘리자베트는 재빨리 좌중을 둘러보았다. 뒤늦게 도착한 신전 사제들이 부상자 사이를 돌아다니며 치료를 행하고 있었으며, 상처가 가볍거나 없는 사람들은 일어서서 여전히 자신에게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구석진 자리, 나무에 기대어 앉은 남자가 한 명.

    한눈에 봐도 상태가 심각했다. 복부에 핏물이 흥건했다. 평범한 사제의 치료가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는 마왕이기에, 사제들은 이도저도 못하고 단지 소수의 치료 마법사에게 일을 넘겼다.

    남자가 가늘게 눈을 뜨고 있었다. 그 눈동자와 엘리자베트는 시선을 마주쳤다. 남자, 단탈리안은 처음부터 이쪽을 비스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갔다.

    박수 소리마저 한없이 느릿해졌다. 엘리자베트는 온몸의 신경이 정지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계획된 것인가.’

    ‘말씀하신 그대로.’

    그녀는 단탈리안의 대답이 선명하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지레짐작이 아니었다. 단탈리안은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으나 검은색 눈동자만큼은 선명하게 빛났다. 그것이 말보다 더 확실한 말을 건네주고 있었다.

    ‘무도회장에서 당신과 내가 나가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은 꽤 많습니다.’

    ‘그중에서 본녀만이 사고 현장에 돌아왔고, 그대는 난데없이 중상을 입은 채로 발견되었다.’

    ‘누구라도 의심해볼 만한 대본이 완성되었군요.’

    사람들이 손뼉을 두들겼다. 짜악, 짜악, 하고 박수가 종소리처럼 둔중하게 울렸다. 단탈리안과 그녀를 제외하고 무엇이든 느려져 있었다.

    ‘당신은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하필 자기가 없는 자리에서 사고가 터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혹시라도 범인으로 의심받을 수 있다.’

    ‘아아. 조금이라도 빨리 현장에 합류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설령 의심하는 사람이 나타날지라도, 구조를 진두지휘한 본인을 대놓고 비난하기는 힘들다.’

    ‘실로 당신은 훌륭하게 구조를 이끌었을 테지요.’

    그렇기에 엘리자베트는 단탈리안보다 서둘러 현장에 도착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뒤늦게 도착한 사람에게 의심이 집중되기 마련이었다. 누구는 사건이 터지자마자 황급히 달려와서 사람들을 도왔는데, 왜 당신은 늦장을 부리며 이제야 도착했는가. 혹시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 아닌가.

    성녀가 생존함으로써 단탈리안의 의도가 좌절되었다.

    단탈리안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구조에 참여함으로써 명분까지 얻었다.

    이야기는 여기서 종료되었을 터였다.

    ‘나는 당신이 성공할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단탈리안이 부상을 입은 상태로 발견되지만 않았더라면.

    ‘성녀를 목표로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나까지 당했습니다. 단순한 일개 암살범이 꾸밀 만한 사건이 아닙니다. 테러범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본인에게 의심이 집중된다.’

    단탈리안과 함께 무도회장을 벗어났다. 그 자체로 이미 용의선상에 올랐다.

    게다가 엘리자베트는 조금 지나치게 구조를 능숙하게 해냈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모두가 당황하고 있었는데 오직 엘리자베트만이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고 냉정하게 대응했다. 사람들은 자문하겠지. 그렇게까지 냉정한 것이 정말로 가능한가?

    사건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당신에게는 범행 동기가 충분히 많습니다. 브루노 평원에서 개인적으로 진 원한이 있지요. 무엇보다, 바로 얼마 전에 당신은 성녀와 저한테 외교전에서 참패했습니다.’

    ‘외교전의 보복으로 두 사람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것인가.’

    엘리자베트가 이빨을 갈았다.

    ‘동기가 지나치게 뻔하다. 본인이 범인이라기에는 수법이 어수룩하다.’

    ‘하지만 의심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

    사람들은 생각하겠지. 엘리자베트가 흑막이라고 하기에는 일이 너무 어설프다. 그러나 가능성은 있다. 가능성이 남아 있는 한 사람들의 의심 또한 사라지지 않는다…….

    ‘외교 무대에서 당신의 평판은 썩 좋지 않습니다. 아니, 합스부르크 황가 자체가 별로 신용을 얻지 못하는 혈통입니다. 여러 악질적인 소문이랑 얽혀 있으니까요. 더군다나 당신은 둘째 오라비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습니다.’

    실력은 둘째치더라도 인격을 신뢰하기는 어렵다. 그것이 엘리자베트 통령에 대한 외교적 평판이다.

    ‘친오라비를 죽인 사람이 테러를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의심은 두고두고 남아서 당신을 압박할 것입니다.’

    ‘…….’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엘리자베트에게 웃으면서 박수를 보냈고,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다. 인파에 가려서 단탈리안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내일은 어떻게 될까? 머리가 진정되고 차분히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이 엘리자베트한테 의심이 향할 것이다. 그때 가서 엘리자베트에게 쏟아지는 것은 칭송과 호의가 아니라 의심과 경멸이리라.

    ‘그렇지만.’

    사람들과 악수하면서 엘리자베트가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장이 흘러나올 지경까지 자신의 배를 찌르다니.’

    엘리자베트가 떠나고 나서 단탈리안은 홀로 정원에 남겨졌다. 그곳에서 단탈리안은 칼을 빼어들어 스스로 자해했다.

    한두 번 찔러서 생겨난 상처가 아니었다. 다섯 번이 넘도록, 열 번이 넘도록 저 남자는 자신의 배를 칼끝으로 쑤신 것이었다. 아무도 없는 장소에서. 주변에 어느 누구도 없는 가운데. 고통과 신음을 참으면서 묵묵하게 칼날을 찍었다.

    그 광경을 상상하니 엘리자베트는 온몸이 서늘해졌다.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으면서 자해했는가.

    어떤 삶을 살았기에 그런 짓이 가능한가.

    ‘아아. 정반대인가.’

    엘리자베트는 재차 깨달았다.

    ‘그런 짓이 가능하기 때문에 약자인가.’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공화주의 대표회의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  *  *

    엘리자베트의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지나친 고통에 시야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왜인지 엘리자베트는 비교적 선명하게 비추었다. 신기한 일이로군.

    아까웠구나, 엘리자베트. 너는 내 수법과 성격을 간파한 것 같다마는 아쉽게도 딱 한 발자국이 모잘랐다.

    나는 너에게 정면승부를 걸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정면에서 앙리에타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나다. 너는 앙리에타보다 세 배는 무섭다. 도망치는 것이 득책이다.

    그러니까 아예 판 자체를 뒤엎었다. 성녀가 죽을 뻔한 것이다. 회의는 이대로 무산된다. 행여나 일부 인간종과 마족이 공화주의라는 이름 아래 집결하는 일은 없어졌다. 적어도 나중으로 미루어졌다…….

    여기까지는 엘리자베트, 너도 알아차렸겠지. 그러나 내가 자해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알겠는가? 약자란 단순히 도망치는 자가 아니다. 도망칠 곳이 남아 있다면 아직 지옥까지 떨어져본 사람이 아니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을 낭떠러지 끄트머리라고 생각하는 자. 낭떠러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자. 그것이 약자이다…….

    아무런 희생 없이 너 같은 괴물을 상대하는 게 가능할 리 없다. 팔 한짝이나 다리 한짝쯤은 가볍게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 배때기 몇 번 쑤시는 것으로 때울 수 있다면야 오히려 횡재에 가깝다.

    이걸로 자해하는 것은 두번째인가.

    가미긴을 위협할 때는 마취용 연초를 사용했다.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마법사가 도처에 깔렸다. 마취제를 쓰면 그들이 알아볼 가능성이 농후했다.

    어째서 습격을 받은 자가 마취되어 있는지 의심을 받겠지. 아무런 마취 없이 내 배를 스스로 찔러야만 했다…….

    처음에는 이바르의 인형을 이용하자고 생각했다. 내가 엘리자베트를 상대하는 동안 인형이 무도회장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폭발에 휘말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엘리자베트 혼자 무도회장을 떠난 셈이 된다. 혐의가 보다 짙어진다.

    문제는 무도회장의 경비가 생각보다 엄하다는 것이었다.

    파이몬은 이번 회의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 분명했다. 이중삼중으로 기사와 마법사가 대기하는 바람에 도저히 인형을 몰래 침투시킬 수가 없었다. 결국 자해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지옥과 같은 짓거리였다. 내게 마왕의 재생력이 없었다면 진즉에 죽었겠지. 솔직히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고 싶다.

    하지만 아직은 안 된다. 조금 더 사람이 모여야 한다……제기랄, 눈이 점점 침침해졌다. 더 이상 엘리자베트가 보이지 않는다. 고통이 극심하니 도리어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군.

    “궁중백 각하! 괜찮으십니까!”

    드디어 왔는가.

    주변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이 아득하게나마 느껴졌다. 나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실권자 중에 한 명이었다. 응당 사람들이 몰려와서 난리를 부려야 마땅했다.

    “마법사, 각하의 용태는 어떠한가!”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하지만 상처에 독이 배었습니다. 각하께서는 재생력이 높으십니다만, 독이 그걸 방해하고 있습니다.”

    마법사가 침중하게 말했다. 사람들이 아연해하는 소리가 들렸다. “독이라니.” “악랄한 수법을.” 건물이 무너질 정도의 파괴에 연이어서 암살까지 곁들었다. 원투 펀치라도 맞은 기분이리라.

    “철저하게 재생력을 방해하는 독입니다. 인간에게는 별다른 쓸모가 없겠지요. 암살자는 처음부터 궁중백 각하를 노린 것이 틀림없습니다.”

    “큰일입니다. 성녀께서도 상태가 위중하시다 들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너무 소란을 피우는군. 걱정하지 마라. 딱 죽기 직전까지만 가도록 독을 조절했다. 내가 아니라 제레미가 수고한 것이지만……아마도 안 죽을 거다.

    “두 분은 인류와 마족을 잇는 가교나 마찬가지이다. 두 종족이 모두 폭주해버릴 수도 있어……마법사!”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마법사도 안 되었다. 하필이면 내 치료를 전담하게 되었으니까. 인간과 마족은 치료법이 상당히 달랐다. 마법사는 지금 익숙하지도 않은 마왕의 치료를 맡게 되어 죽고 싶은 심정이겠지. 내가 죽으면 실제로 사형될 것이다, 이 노인네.

    적당히 사람이 모였는가. 이제 마지막으로 연기할 순간이다.

    “끄으……으…….”

    “각하! 정신이 드십니까, 각하!”

    크게 소리치지 마라! 머리가 울리지 않는가! 환자를 상대할 때는 조용히 하라는 것도 배우지 못했는가. 세상에는 멍청이가 너무 많다. 그 멍청이를 지금은 써먹어야 할 때라는 것이 문제로군.

    내가 입을 열었다.

    “……님은.”

    고통이 아득하게 느껴질 따름이지 상태가 내 생각보다 심한 모양이었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정신을 입술과 혓바닥에 집중했다. 마치 지금까지 자동으로 움직이던 신체를 수동으로 일일히 작동시키는 느낌이었다.

    “성녀……성녀님은……?”

    “……! 성녀께서는 무사하십니다! 상처를 입으셨지만 문제 없습니다!”

    누군지 몰라도 다급하게 대답해주었다. 조금 덜떨어지는 발언이었다. 문제가 없다니. 성녀가 상처를 입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엄청난 문제였다. 아마도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과장해서 말하려다 실수한 것이겠지.

    바보 같아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가……다행이군…….”

    여기까지다.

    나는 온힘을 다해 유지하던 정신을 그만 놓아주었다. 의식이 급속도로 멀어졌다. 허세를 부리면서 고통을 참아보았지만 그것도 힘들어졌다. 그걸 주변에서는 달리 착각했는지 하나같이 비명을 질렀다.

    “가, 각하! 안 됩니다.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누가 범인입니까! 범인을 말씀해주십시오!”

    “단탈리안 전하!”

    멍청이들. 죽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너희는 얌전히 내가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도 성녀의 안위를 걱정했다고 증언하면 된다……그것이 너희에게 주어진 임무이다. 내 무죄를 입증해주는 것이다. 행여라도 잊지 마라…….

    그리고 나는 의식이 어두워졌다.

    정말이지, 마왕도 못해먹을 직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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