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23화 (323/510)
  • 00323 겨울왕(Rex Hyemis)  =========================================================================

    “크읏!”

    엘리자베트가 나를 추월해서 뛰어갔다. 부상자를 도우려는 속셈이겠지. 테러가 일어난 상황에서 혼란에 빠지지 않고 곧바로 몸을 움직이는 점이 과연 대단했다.

    은발이 멀어지는 광경을 나는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자는 어서 정원으로 향하라, 하고 그녀가 소리치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오러를 사용하여 성량을 확대한 것이리라.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응원했다.

    *  *  *

    엘리자베트가 서둘러 무도회장에 뛰어들었다. 폭발의 여파 때문일까, 건물 일부가 무너져 있었다. 먼지가 잔뜩 피워올라 시야가 어두웠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자는 어서 정원으로 빠져나가라!”

    엘리자베트가 망설이지 않고 소리쳤다. 재난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2차 피해였다. 건물이 완전히 무너져내려 출입구가 막혀버리거나 추가적인 테러가 일어나거나.

    무엇보다도 시야가 어둡다는 것이 좋지 않았다. 인간은 시각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동물이었다. 지금과 같이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을 때 시야마저 좁다면 사람은 간단하게 집단 패닉에 빠졌다. 그걸 막아야 했다.

    “곁에 중상자가 있다면 경비병을 불러라! 경비병, 구조 요청에 호응하여 움직여라! 반드시 두 사람이 함께 행동하도록.”

    경비병들이 아직 혼란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멍하게 엘리자베트를 바라보았다. 엘리자베트는 의도적으로 분노에 찬 표정을 연출하며 버럭 소리 질렀다.

    “형편없는 놈들! 그러고도 네놈들이 군인인가! 어서 대답하지 못할까!”

    “아, 알겠습니다!”

    엘리자베트가 제일 근처에 있던 경비병의 엉덩이를 발로 찼다. 그녀는 여린 외견과 달리 제2급 무사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우락부락한 경비병이 간단하게 바닥에 넘어졌다.

    “천치놈들, 대답만 하면 뭐하는가! 움직여라! 도움을 요청하는 부상자들을 정원으로 옮기는 것이다!”

    “예!”

    먼지 구름 사이사이로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대부분은 신음을 흘리면서도 간신히 일어섰다. 충격에 비해 피해는 생각보다 적은 것 같았다. 천만다행이었다. 여기서 대량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면 대표회의 따위 무산되었겠지…….

    “상처가 없는 분은 경비병을 도와주시오!”

    엘리자베트가 내심 안도하며 구조 작업을 지휘했다. 혼란이 사라지고 엘리자베트를 꼭대기로 한 임시적인 조직이 생겨났다.

    그녀가 대륙의 모든 언어에 능통했다는 사실이 통솔에 한몫 거들었다. 은발의 통령은 바타비아어와 프랑크어, 고대제국어를 번갈아 사용하면서 순식간에 사람들을 장악했다. 시야가 어두워도 사람들의 두 귀에 목소리가 들렸다. 언어가 이해되었다. 그것이 중요했다.

    “사상자는?”

    “예.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중상이 세 명. 경상이 열한 명입니다.”

    무도회장 경비를 책임지는 기사가 대답했다. 기사는 얼굴이 확연하게 창백했다. 이토록 중요한 자리의 경비에서 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출세 경쟁에서 완벽하게 실패했거니와 자칫하면 목숨이 위험했다.

    “사망자는 없습니다.”

    “그거 불행 중 다행이로군.”

    건물 잔해에 깔려서 사망자가 발견되지 않은 것일지 몰랐다. 그렇지만 일단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희망을 주었다. 어쩌면 사망자는 기껏해야 한두 명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경비대장, 어쩌다 테러가 발생했는지 파악하고 있는가? 범인은?”

    “누가 범행을 저질렀는지는 송구하오나 알지 못합니다. 다만……”

    기사가 미간을 좁혔다.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 기억해내려는 것이었다.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 프랑크 만세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프랑크 만세라니…….”

    프랑크를 위하는 자가 이곳에서 테러를 일으킬 이유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엘리자베트는 이것이 단탈리안이 짜낸 자작극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곧바로 하나의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가 다급하게 물었다.

    “롱그위 성녀는. 브르타뉴의 성녀는 어디에 있는가.”

    “예?”

    기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엘리자베트는 답답했다.

    “프랑크를 위한다는 범행자가 가장 증오할 만한 인물이 누구이겠는가! 브르타뉴의 상징이자 여왕의 충실한 조언자인 성녀이다. 이번 범행은 성녀를 노리고 일어났다.”

    그제야 기사는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로 확인해보겠습니다.”

    “정원에 달려가서 성녀를 본 사람이 있느냐고 큰소리로 물어라. 한시가 급하다.”

    기사가 허겁지겁 달려나갔다.

    엘리자베트가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당했다. 단탈리안은 성녀를 희생시킬 작정이었다.

    성녀는 인류와 마족의 평화로운 공존을 주장하려고 이곳에 참석했다. 그런 와중에 암살에 직면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공화주의 대표회의라는 이름이 붙은 자리에서…….

    두 종족의 합종연횡은 무산으로 돌아가겠지. 성녀의 죽음이 누구에게 책임이 있느냐를 두고 격렬하게 싸울 것이 분명했다. 범인이 프랑크인이라는 부분이 특히나 악질적이었다. 프랑크 제국의 압도적인 우세로 종결된 조약이 대체 어떻게 변해버릴지.

    “각하.”

    기사가 허겁지겁 다녀왔다. 안 좋은 예감은 항상 들어맞는 것일까. 기사의 표정이 어두웠다.

    “송구하오나…….”

    “성녀를 찾지 못했는가.”

    “예. 다수의 목격자가 있었습니다. 한 남자가 성녀에게 다가가더니 자신의 마력을 폭발시켰다고……남자의 정체는 피에르 드 라비에르 남작. 프랑크인이 맞습니다.”

    엘리자베트가 기억을 재빠르게 되짚었다. 라비에르 남작령. 틀림없이 프랑크 중부에 위치한 소영지였다. 제법 명망이 높은 궁중 마법사였지만, 앙리에타 여왕이 권력을 잡고난 이후 이런저런 죄목이 붙어 강제적으로 영지가 박탈되었다.

    엘리자베트가 아는 사실은 거기까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더없이 불길함을 느꼈다. 라비에 르 남작은 성녀에게, 브르타뉴 왕국에 복수할 이유가 넘쳐났다. 단탈리안이 남작을 어떻게 유혹했을지, 엘리자베트는 눈앞에 선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경비대장. 우리는 이제부터 성녀를 찾아야만 한다.”

    “알겠습니다.”

    “프랑크의 정부에서 보내온 대표자가 있을 것이다. 그 자를 찾아서 우리한테 안내하라고, 자네의 부하에게 명령하도록.”

    적어도 프랑크의 대표자가 자신보다 라비에르 남작에 대해 아는 바가 많을 것이다. 범인의 동기를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낼 수 있겠지. 그렇게 기대하면서 엘리자베트는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경비대에는 마법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마법사들로 하여금 가볍게 바람을 일으켜서 먼지 구름을 걷어내게 만들었다. 그리고 광구(光球)를 대량으로 띄워서 더 뚜렷한 시야를 확보했다.

    “본인이 명령하지 않으면 주문조차 외우지 않을 작정이더냐!”

    “죄, 죄송합니다!”

    “치료 마법사는 중상자를 담당! 경상자에게는 포션을 써라!”

    엘리자베트가 성녀를 수색했다. 마침 부상자 중에 한 명이 성녀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성녀는 무도회장 천장이 무너진 바로 그 아래에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무심코 손바닥으로 이마를 덮었다.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본인을 도와라!”

    그녀가 양손에 오러를 두르고 손수 건물 잔해를 치웠다. 경비대도 달려들었다. 마법사들은 덩치가 큰 잔해를 들어올려 조심스레 옮겼으며, 병사들은 잔해끼리 이루고 있는 균형을 망가트리지 않기 위해 섬세하게 작업했다.

    중간중간에 시체가 발견되었다. 머리가 부서졌거나 복부가 짓눌려 터졌다.

    시체들은 한결같이 손바닥과 팔이 새까맣게 바싹 불태워져 있었다. 마력 폭발이 일어나는 순간,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올려 막은 흔적이었다. 이곳이 폭발의 중심지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성녀님입니다!”

    한 경비병이 소리쳤다.

    “성녀님께서 살아계십니다!”

    “정말인가!”

    절망으로 물들고 있던 엘리자베트의 마음이 환해졌다. 그녀는 당장 달려갔다. 경비병 말이 옳았다. 대리석 돌덩이의 틈새로 주홍빛 머리를 지닌 여인이 보였다.

    “……윽……흐윽…….”

    여인은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였는데, 괴로운 표정이 미세하게 떨렸다. 부상이 심각했지만 틀림없이 아직 살아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병사들과 함께 서둘러 그녀를 잔해 속에서 구출했다.

    몰골이 끔찍했다. 온몸이 먼지로 뒤덮였다. 폭발의 영향으로 성녀복이 불타버렸는지 행색이 엉망진창이었다. 복부와 허벅지에서는 쉴 새 없이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머리가 다치지 않은 것이 천운이었을까.

    “마법사!”

    치료 마법사 세 명이 재빨리 성녀를 돌보았다.

    “시베르툼을.”

    “죄송합니다. 아까 전에 전부 썼습니다.”

    “어쩔 수 없지. 게르마세네이아로 대신한다.”

    마법사들은 저들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를 써가며 다급하게 치료를 행했다. 엘리자베트는 전투마법은 몰라도 치료마법에 관해서는 별다른 교양이 없었다. 그저 초조하게 지켜볼 따름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 시간이 넘게 흐른 것 같기도 했고, 일 분밖에 흐르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수석 마법사가 고개를 들어 엘리자베트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습니다. 일단 위기는 넘겼습니다.”

    “여신들이시여!”

    엘리자베트는 종교를 싫어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대륙에서 제일 열렬한 신도였다.

    “상처 자체는 대단하지 않습니다. 성녀복이 대부분의 피해를 막아준 듯합니다. 무도회인데도 성녀복을 입고 오신 것이 목숨을 살렸습니다. 마력 폭발은 거의 아무런 상처를 입히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법사가 얼굴을 찡그렸다.

    “복부와 허벅지에 자상이 크게 나 있습니다.”

    “자상?”

    “아마도 범인은 먼저 단검을 찔렀을 겁니다. 암살용 마법이 걸린 단검이었겠지요. 복부에 한 번, 허벅지에 한 번 찌른 다음에 자신의 마력을 폭발시켰습니다. 악마적으로 능숙한 솜씨입니다.”

    범인의 악랄한 수법이 경멸스러웠는지 마법사가 혀를 찼다.

    “단칼에 죽일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겠죠. 처음부터 과다출혈을 노렸습니다. 건물을 무너트려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가두고……소인의 예상입니다만 칼날에는 독약도 발라져 있었을 것입니다. 아직 안심하기는 이릅니다.”

    “성녀가 회복되면 그대에게 개인적으로 금화 일백을 하사하마.”

    마법사의 눈이 빛났다.

    “소인의 명예와 마력을 걸고 사력을 다하겠습니다.”

    성녀는 들 것에 실려서 정원으로 옮겨졌다. 무도회장의 천장이 언제 또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트는 경비대와 함께 마지막 부상자를 찾을 때까지 무도회장 안에 남았다. 그 사이에 천장 일부분이 무너져내려 크게 다칠 뻔했다. 경비대장이 먼저 탈출하라고 말했으나 엘리자베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만민을 돕는 것이 지도자의 의무이다. 눈앞에 벌어진 참사를 외면한다면 그 자는 지도자라 할 수 없다.”

    바타비아의 병사들은 통령에게 크게 감격하여 구조 활동에 열성적으로 뛰어들었다.

    시체 한 구를 수습하는 것을 끝으로 모든 구조가 끝났다. 예순 명에 가까운 참석자 중에서 경상자가 스물일곱 명, 중상자가 열네 명, 사망자가 네 명이었다.

    중상자의 태반은 신속한 조치 덕분에 생존했다. 성녀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엘리자베트가 맨 나중에 무도회장을 빠져나오자,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 위대한 군주를 향해서 기립박수를 보내었다.

    엘리자베트는 예기치 못한 테러에 직면해서도 그녀에게 가장 유리한 결과를 도출해냈다. 그것은 열국의 대표단들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이었고, 또한 성녀를 살림으로써 단탈리안의 계획을 적어도 반쯤은 무너트린 것이었다.

    “중상자와 사망자의 신원을 보고하라.”

    “예. 먼저 중상자부터 보고하겠습니다. 튜튼 왕국에서 온 하이젠부르크 남작, 카스티야 왕국에서 온 호델 자작…….”

    기사가 어느새 썼는지 종이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열세 명의 부상자가 불러지고 마지막 이름이 언급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온 단탈리안 궁중백.”

    엘리자베트는 두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상, 중상자는 총 열네 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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