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22화 (322/510)
  • 00322 겨울왕(Rex Hyemis)  =========================================================================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성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발길을 옮겼다. 내가 발을 들어올린 순간, 단순히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은발의 귀공녀도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한 발자국을 내딛고는 곧바로 착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대방은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

    사람들 시선이 집중되었다. 보통 그럴수록 발걸음이 무거워질 텐데 어째서인지 마음이 가벼워졌다. 마치 능숙한 배우가 관객의 시선을 인식하면서 또한 동시에 자신의 배역에 확신을 갖고 몰두하여, 정확한 걸음걸이로 무대에 오르는 것 같았다.

    그렇다. 이 순간, 나는 생에 더없는 확신을 가슴으로 느꼈다.

    과장이 아니었다. 일찍이 나의 발걸음이 이토록 명확한 방향을 가진 적이 있던가. 길거리에 오가는 무수한 걸음걸이, 그것들이 가지는 얼핏 확실해보이지만 실상 흐릿하기 그지없고 단지 혼란스럽기만 할 뿐인 방향성――그런 애매모호함이 나에게는 완전하게 부재했다. 자아, 스스로 물어보자.

    도대체 지금의 내가 바로 저곳에 가지 않고 어디로 향한다는 말인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이 세계에 떨어진 것을 저주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지금만큼은 마치 이 하나하나의 발걸음을 내딛기 위하여, 그저 그걸 위하여 세계에 내팽개쳐졌다고 해도 믿을 자신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칼끝을 들어 저 인도의 성벽을 가리켰을 때처럼,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 저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을 때처럼, 나의 발걸음은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의 필연이었다. 나 역시 어떤 필연성이 나를 이끌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었다. 그녀가 나에게 이 세계의 사람이라는 거주권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의 샛푸른 눈동자를 보았을 때, 나는 상대방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보 없이 깨달았다.

    우리는 서로 마주섰다. 아마도 나는 최고의 미소를 짓고 있겠지.

    “단탈리안이라고 합니다.”

    “엘리자베트다.”

    서로가 그 이상으로 자기를 소개하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는 이미 암묵적인 동의가 체결되어 있었다. 마왕, 궁중백, 통령, 최후의 황족. 우리를 수식하는 어떠한 단어도 이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는 내용의 협정이었다.

    당신은 엘리자베트이고 나는 단탈리안이다. 내가 당신이 엘리자베트임을 보증하며, 당신이 내가 단탈리안임을 보증한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번의 확신으로 보증서를 믿기에는 너무나도 영악했다. 우리는 마치 맹인들이 서로의 얼굴을 조심히 더듬는 것처럼 하나씩 질문을 주고받았다.

    “얼마 전에 편지로나마 뵈었습니다만. 제 연심이 잘 전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라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얻으면 얻을수록 바라지 않게 된다.”

    엘리자베트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이 미녀와 천하의 공통점이겠지, 단탈리안.”

    “실로 옳으신 말씀.”

    내가 웃었다. 역시 엘리자베트는 천하(天下)라 적어놓은 편지의 의미를 꿰뚫었다. 그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할 자, 세계 끝까지 뒤집어본들 엘리자베트 말고 없으리라.

    “그럼에도 그대와 나는 천하를 딛고 서 있다.”

    이번에는 엘리자베트의 차례였다.

    “무엇이 그대로 하여금 계속하여 이 땅에 서 있도록 강요하는가?”

    “하하.”

    조금 우스웠다.

    롱그위 성녀가 내 실체를 어렴풋하게 깨달았을 때 내던진 질문이 ‘왜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은가’였다. 반면에 보아라. 엘리자베트는 ‘무엇이 그대가 삶을 유지하도록 강요하는가’라고 질문했다. 내용이 같으면서도 완전히 뉘앙스가 달랐다.

    “글쎄요. 여기는 깊은 대화를 나누기에 썩 적절하지 않군요…….”

    “음.”

    엘리자베트가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이쪽을 힐끔거리면서 우리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엘리자베트와 나는 브루노 평원의 악연으로 유명했다. 불과 몇 주일 전에는 치열하게 외교전을 펼치기도 했다. 그런 사이끼리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누구라도 엿듣고 싶겠지.

    “어떻습니까? 잠시 정원에서 바람이라도 쐬는 것은.”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무도회장 바깥에 조성되어 있는 정원으로 나갔다.

    한동안 사교계가 시끄러울지 몰랐다. 연회장 근처의 정원은 종종 저속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파트너가 야외에서 성교한다든지. 물론 그 정도로 대담한 연인은 드물었고, 대부분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다가 가볍게 키스하는 수준이었다.

    엘리자베트와 내가 스캔들에 휘말린다라. 정치적으로 어떻게 써먹을 건지와 상관없이 순전히 재밌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 않은가.

    “이제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다.”

    “좋습니다.”

    발길을 멈추고 엘리자베트를 바라보았다. 나는 목걸이에 준비된 반(反)마법을 펼치고 있었다. 행여나 도청이 이루어질 일은 없었다.

    “보다 명확한 세계를 위해서입니다. 엘리자베트.”

    “명확한 세계?”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제가 걸어온 길에 변명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대륙에서 스러져간 십만의 목숨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죽을 곳을 찾아 헤매는 망령인가.”

    엘리자베트가 한탄했다.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가 없군. 그대와 내가 학살자임은 사실이다. 하지만 학살자이기에, 지금까지 자신이 죽여온 생명의 값어치만큼이나 이상을 실현하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마도 당신과 저는 출발점이 다른 것이겠지요.”

    “출발점이 다르다?”

    “당신은 남동생을 죽일 때 명확한 대의를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합스부르크를 위해서, 백성을 위해서…….”

    즉, 대의가 살인보다 앞섰다.

    “당신은 정적을 죽여나가면 죽여나갈수록 자신의 대의를 포기할 수 없게 됩니다. 여태까지 죽여온 생명이 무의미하게 되어버립니다. 그렇기에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

    “…….”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천명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저 나의 목숨과 안녕을 위하여 죽이고 또 죽였을 뿐입니다. 제가 대의를 주장해봤자 위선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까 명확한 세계를 위해서다.

    살인을 저지른 자가 갑자기 세계평화를 주장한다고 해보자. 심지어 실제로 세계평화를 이루어낸다고 해보자. 이제 살인 당한 사람의 가족이나 친구는 어찌하면 좋겠는가?

    사실은 살인자도 착한 사람이었다, 라는 이야기가 완성된다. 살인자에게 복수해도 뒷맛이 깔끔하지 않다. 살인자에게 변명거리가 생겨버린다…….

    “많은 사람이 많은 사람을 살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칼을 들고 있지만 다만 휘두르기 위해서일 뿐이지요. 저는 그 칼들에 확고부동한 방향성이 주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대가 악행을 그만둘 일은 영원히 없겠군.”

    “물론입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영원히 이상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엘리자베트.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의 문제이지요.”

    나는 무언가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걸 하는 게 아니다.

    무언가를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

    엘리자베트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운명의 장난이다. 무엇이 먼저 벌어지고 무엇이 나중에 벌어지는가. 단순한 순번의 문제이지만, 그것이 모든 걸 결정해버리는구나…….”

    그녀가 고개를 내려서 날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확실하게 알았다. 그대와 나 사이에는 타협의 여지가 전무하다.”

    “바로 그렇습니다.”

    “나는 그대를 죽인다. 그대가 등에 짊어진 십만의 목숨, 그대의 목숨과 더불어서――본인이 대신 짊어지도록 하지.”

    엘리자베트의 푸른 눈동자에는 일말의 망설임이 없었다.

    훌륭하다.

    우직하고 투명한 눈동자였다. 그녀에게 죽는다면 나는 아무런 후회를 남기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내가 입끝을 들어올려 소리없이 환희했다. 엘리자베트는 손가락을 들어 내 가슴을 가리켰다.

    “그 첫 번째로, 먼저 이번 대표회의를 성사시키겠다. 그대가 두려워하는 것은 인류와 마족을 가리지 않고 공화파가 집결하는 것이다. 틀림없이 마왕군에 공화파가 독립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을 터.”

    “멋진 추리입니다.”

    나는 하마터면 박수를 칠 뻔했다.

    “이쪽이 결집하면 정반대로 마왕군이 분열한다. 단탈리안, 스스로 약하다고 믿는 자네에게 있어 분열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겠지.”

    “그 또한 맞습니다.”

    이번에는 정말로 박수를 쳤다.

    “훌륭하다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군요.”

    “흑사병은 그대에게 있어 천재일우의 기회였을지 모르겠으나, 전염병이 진정된 지금은 도리어 우리에게 최고의 기회이다. 농민의 숫자가 급감했다. 그만큼 농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차지하는 토지의 크기는 늘어났지.”

    그렇다. 예전에는 열 사람이서 경작하던 토지를 지금은 여섯 명이서 경작해야 한다.

    “농민들은 과거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몸값이 뛰고 있다. 용병의 몸값도, 기술자의 몸값도 서서히 오르고 있지. 그것은 농민이 기존의 권력계층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공화주의가 꽃 피우기에 더없이 적절한 시대.

    “제국과 왕국은 농민보다 귀족의 편을 들 것이다. 대대적인 충돌이 발생한다. 자유도시들이 생겨난 것은 충돌의 서곡에 불과하다. 단탈리안, 공화주의는 역사적인 흐름이다.”

    “만에 하나 농민들이 봉기에 성공한다면 말입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저는 그 폭발을 최대한 늦출 것입니다. 그렇군요. 적어도 당신이 죽을 때까지 말입니다. 50년은 걸리겠군요.”

    “본인은 2년 안에 폭발시킬 것이다.”

    50년과 2년인가.

    너무나 간극이 커다란 시간에 우리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유쾌해서 웃는 것이 아니었다. 솔직한 적의만이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엘리자베트. 이미 늦었습니다.”

    “……?”

    엘리자베트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때였다.

    ─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음이 무도회장 쪽에서 들려왔다. 정원의 수풀이 일제히 들썩거릴 정도로 커다란 폭음이었다.

    엘리자베트가 반사적으로 무도회장 방향을 쳐다본 다음, 곧바로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엘리자베트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단탈리안!”

    “이번 암살은 인류와 마족이 통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극렬분자에 의해서 일어났습니다.”

    무시무시한 시선을 받아넘기면서 내가 차분하게 얘기했다.

    “이제 이 사건은 공화주의 대표회의로 기억되지 않겠지요. 이기적인 종족감에 휩싸여서 대륙의 평화를 깨부순 비극으로 기록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에 대한 반동으로 마족과 인류의 평화를 더욱 강조할 것입니다…….”

    “본인과 진심을 교류하기 위해 정원에 불러들인 것이 아니었는가!”

    엘리자베트가 소리쳤다.

    “그대와 한 순간이나마 통했다고 확신했거늘……!”

    “저는 물론 당신과 진심을 나누고 싶어서 이곳에 왔습니다.”

    내 입가가 미소를 그렸다.

    “하지만, 엘리자베트――세상에 진심을 이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그것이 저의 진심이든, 당신의 진심이든.”

    “……!”

    엘리자베트의 눈초리가 한층 격렬해졌다.

    나는 왜인지 더 즐거워졌다.

    “죽을 곳을 찾아 헤매는 망령이라고 말했습니까.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왜냐하면 엘리자베트, 저는 망령 따위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지금 이곳에서 당신을 마주하고 있는 한 명의 마왕입니다.”

    무도회장 쪽에서 신음과 비명이 들려왔다. 몇 명이 죽었을까. 한 명도 죽지 않는 게 제일 좋은 시나리오였지만, 대여섯 명쯤은 감당할 수 있었다. 파이몬의 실력을 믿어볼까…….

    “명심하십시오. 저는 당신에게 죽어드릴 생각이 딱히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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