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21화 (321/510)
  • 00321 겨울왕(Rex Hyemis)  =========================================================================

    *  *  *

    각국에서 내로라 하는 위인이 속속들이 도시에 도착했다.

    지난 사 년, 대륙에서는 부유한 도시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공화주의 봉기가 일어났다. 그 결과 스무 개에 가까운 자유도시가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새로이 자치권을 보장받은 자유도시들, 또한 기존에 공화주의 노선을 암묵적으로 지지하던 도시들, 혹은 개인적으로 공화주의 사상에 호감을 품고 있는 영주의 영지――모두 다하여 일흔 곳에서 대사를 파견했다.

    대사가 달랑 한 명만 오는 경우는 없었다. 각 세력은 자신들의 위세를 과장하기 위해서 호화로운 사절단을 꾸려서 보냈다.

    여기서 쓴웃음을 짓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소수이겠지.

    “이바르. 저들을 보아라.”

    나는 임시로 빌린 저택의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도시 정중앙에 세워진 저택이라 대로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지금 길에서는 <북 프랑크 자유도시 동맹>의 사절단이 요란하게 음악을 울리면서 행진하고 있었다.

    “저들이 바로 인민의 정당한 권리를 확보하겠다며 봉기한 자들이다. 아무래도 그들이 말하는 인민이란 부자밖에 없는 모양이구나.”

    “송구하오나, 전하. 군사력이 없는 자는 자치권을 얻을 수 없나이다.”

    이바르는 시녀 차림으로 내 옆에 서 있었다.

    “도시의 군사력은 용병을 사들이고 유지할 자금이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됩니다. 돈이 없는 도시의 자치권이란 어불성설이옵니다. 부자가 도시의 주축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가…….”

    내가 파이프 담배를 만지작거렸다.

    “결국 봉기에 성공한 곳은 부유한 도시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바르. 정말로 자유가 필요한 이들은 빈민이 아니겠느냐?”

    “소인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나에게 충성을 바치지만 자기 의견을 개진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흡혈귀 소녀가 말했다.

    “아무 재산이 없는 빈민은 자신의 나라에 영구적이고 고정적인 이해 관계가 없나이다. 그런 자들에게 나라의 통치에 대한 투표권을 준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실로 그대다운 의견이다.”

    내가 작게 웃었다.

    아마도 이바르의 주장은 현재 대다수의 공화주의자가 지닌 의견일 거다. 시민에게 투표권을 준다. 도시 의회를 구성한다. 그러나 모든 시민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도시에 공헌한 정도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부자는 빈민보다 훨씬 더 많은 세금을 낸다. 그 세금으로 도시는 용병을 고용한다. 군대 덕택에 도시는 시민을 보호할 수 있다.

    부자가 도시를 지키는 데 더욱 공헌하므로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 논리이다. 가난한 농민에게 투표권 따위는 주어지지 않는다. 하물며, 도시에 세금을 한푼도 납부하지 않는 노예임에야 논의할 건덕지조차 없다.

    “이바르. 어디선가 역겨운 썩은내가 풍긴다. 모순의 냄새이다. 나 혼자만 저 행렬에서 구취와 악취를 맡는 것이더냐?”

    내가 조소를 머금었다.

    “한끼의 식사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은 다름 아니라 굶주린 자이다. 이미 배부른 자에게 음식은 필요없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가장 자유가 절실한 사람은 노예이다. 헌데 어찌된 일인가. 소위 인민의 자유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정작 노예에겐 자유를 줄 필요도 없고, 주어서도 안 된다고 말하는구나.”

    “…….”

    이바르가 턱끝을 숙이고 잠시 고민했다.

    “하오나 전하. 도시에 아무것도 공헌하지도 않은 자. 아니, 공헌하는 바가 현저하게 적은 자에게 똑같이 자유가 주어진다면 도리어 불공평하지 않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착각하고 있다. 아무것도 공헌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공헌할 수 없는 것이다.”

    부자에게 1000의 재산이 있고 빈민에게 10의 재산이 있다고 해보자.

    도시에 위험이 들이닥쳤을 때 부자는 기꺼이 10의 특별 세금을 내놓을 수 있다. 그러나 빈민은 설령 나라가 멸망할 위험에 놓였을지라도 10의 세금을 내놓지는 못한다. 겨우 1의 세금을 원조할 따름이다.

    “……그러나 부자는 자신의 재산을 천으로 불리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내 비유를 듣고 이바르가 반박했다.

    “반면에 빈민은 더 노력할 수 있었음에도 게으르고 나태하게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사지가 멀쩡하지 않거나 노력하고 싶어도 노력하지 못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런 자들은 구호소에서 도와주어야 마땅하겠지요.”

    어릴 적에 일가친척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혼자만의 힘으로 마계 최대의 상단을 만들어냈다. 그런 이바르 로드브로크이기에 확신에 차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 이외에 빈민의 빈곤함은 거의 전적으로 나태함에서 비롯합니다.”

    아아.

    여기다. 이 부분에서 이바르는 결정적으로 라우라와 다르다.

    그렇기에 라우라가 나를 사랑하는 이유와 이바르가 나를 사랑하는 이유도 다를 수밖에 없다.

    약간 씁쓸해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바르. 만일 그대의 인생이 고작 오십 년으로 끝날 운명이었다면 결코 쿤쿠스카 상회를 만들지 못했겠지. 안 그런가?”

    “예.”

    “그대는 흡혈귀로 태어났기에 지금처럼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구나. 그대는 스스로 원해서 흡혈귀로 태어났는가?”

    이바르가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아닙니다.”

    “다시 묻건대, 부자는 스스로 원해서 부자로 태어났으며, 노예는 스스로 원해서 노예로 태어났느냐?”

    “……역시 아니옵니다.”

    내가 후우, 하고 연초를 공중으로 흘려보냈다.

    셀로판지처럼 창백한 겨울 하늘에 담배 연기가 희미하게 흩날렸다.

    “이바르. 혹시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내가 어디 원해서 단탈리안이 되었겠느냐. 누구는 스스로 원해서 나태한 사람이 되었으며, 누구는 스스로 원해서 성실한 성격이 되었는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세계에 떨어지고 마왕이 되었다.

    그런 나이기에 확신에 차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우리의 삶이란 시작부터 세상에 내팽개쳐졌다. 팔다리가 없이 태어나거나 게으르게 태어나거나, 이미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다는 점에서 똑같다.”

    “……소인으로서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자유로운 의지가 있습니다.”

    나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이바르, 너가 나를 사랑하게 된 것은 결코 너의 자유로운 의지 때문이 아니다. 내가 조종했다. 내가 속였다. 나에 대한 네 연심에서 '자유'라고 불릴 만한 것은 전무하다. 자유롭다는 착각뿐이지.

    그것을 나는 밝힐 생각이 없다. 아마도 영원히.

    “뭐, 우리는 철학자가 아니라 정치꾼이다. 조금 더 실질적인 문제를 논해볼까. 그대는 빈민이나 노예가 도시에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했다만, 사실 모든 시민한테 투표권을 정당하게 내리는 방법이 하나 있다.”

    이바르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간단하다. 전쟁이다.”

    내가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전쟁이 일어나서 하층민이 민병대로 활동한다.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목숨의 값어치는 가히 천금에 비할 만하지. 그러니, 전쟁을 마구 일으키면 일으킬수록 시민들은 평등해진다.”

    “마구 일으키다니…….”

    이바르가 아연해졌는지 숨을 들이켰다.

    “진정한 공화주의가 대륙에 뿌리를 내리려면 그야말로 대전쟁이 필요하겠지. 월맹군 전쟁으로도 한참 부족하다. 천 명 단위가 아니라 만 명, 십만 명이 간단하게 죽어나가는 전쟁이 필요하다.”

    “그건……재앙입니다. 아무도 그런 재앙은 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생각은 파이몬에게 절대로 말하지 못한다. 파이몬은 기본적으로 월맹군 전쟁을 증오해서 공화주의자가 되었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대전쟁을 일으키라니, 위선에도 정도가 있다며 분개하리라.

    이바르가 경악이 담긴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설마, 전하. 그것 때문에 월맹군 전쟁과 꼭두각시 전쟁을……?”

    “하하.”

    내가 웃었다.

    “한번 말해보았을 뿐이다. 누군가가 평등을 울부짖는다면 다만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자가 전쟁을 일으킬 리 없다. 자기 모순이니 말이다.”

    “…….”

    “아무도 그런 짓은 벌이지 않겠지.”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겨울이지만 날씨는 그리 춥지 않아, 길거리에는 사절단 행렬을 지켜보려고 많은 사람이 나와 있었다.

    “하지만 어리석구나. 저리 화려하게 행렬을 꾸미는 것은 역효과이다. 도시의 위세를 과시할 수는 있을지라도 사람들에게 진심 어린 감명을 전해줄 수는 없다. 만약 이번 회의에 참석하는 인물 중에 진정으로 뛰어난 자가 있다면 도리어 조촐한 행렬을 보여줄 것이다.”

    그걸로 우리 둘의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각 세력의 대표단은 보름에 걸쳐서 차례대로 도시에 입성했다. 대표회의가 열리기 하루 전, 여태까지 들어온 사절단과 다르게 무척이나 빈곤한 행렬을 이룬 세력이 하나 있었다.

    보통 사절단은 작게는 오십 명, 많게는 이백 명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세력은 겨우 열 명 남짓한 인원밖에 동원하지 않았다. 행색에도 사치스러운 부분이 전혀 없었다. 약간 형편이 좋은 농부가 잘 차려입은 정도, 딱 그 수준에 불과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깃발은 붉은색 바탕에 하얀 독수리.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국기였다.

    그 맨앞에는 은발의 여인이 군복을 입은 채 걷고 있었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처음에는 얼마나 빈곤하면 저런 행렬을 가지느냐고 비웃었다. 큰 목소리로 조롱하는 시민도 있었다. 그러나 행렬을 선도하는 여인이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통령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길거리에는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공화국 만세!”

    누군가가 소리 질렀다. 그것이 봇물을 터트렸다.

    시민들은 환호로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사절단을 맞이했다. 엘리자베트가 총독관저에 들어갈 때까지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그녀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시민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방금 벌어진 행렬에 대해 논했다.

    “…….”

    나는 테라스에서 포도주를 마시면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공화국 만세라는 표현은 기묘하게 적절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고, 바타비아 공화국을 뜻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시민들도 편하게 호응했겠지. 즉, 엘리자베트가 의도적으로 심어놓은 바람잡이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여자다.”

    나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  *

    대표회의는 첫날에 평탄하게 흘러갔다.

    서로 인사하는 자리라고 할까. 대륙의 실력자들이 무도회장에 모여서 웃고 떠들었다. 나는 롱그위 성녀를 파트너로 삼아서 함께 출석했다.

    롱그위 성녀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당신과 무도회에 나가다니…….”

    “브르타뉴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참아주십시오.”

    “알고 있습니다!”

    롱그위가 이빨을 갈았다.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아, 팔라스 아테나이시여. 당신의 미천한 종자를 용서하지 마시옵소서…….”

    그녀는 마차에서 내리기 전까지 절망적인 어조로 여신한테 기도했다. 며칠 동안 저택에 함께 머물면서 깨달은 것인데, 얘도 딱히 사고방식이 정상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우리가 무도회장에 등장하자 꽤나 반응이 격렬했다. 마왕과 성녀가 파트너로 나온 것이었다. 있을 수 없는 조합이 눈앞에 펼쳐졌으니 자기 눈을 의심해볼 만했다.

    사람들이 몰려와서 어찌된 일이냐고 넌지시 간접적으로 묻는 말에, 롱그위는 성녀답게 완벽한 미소를 연기하며 대답했다.

    “이번 행사는 인류와 마족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종족 간의 평화를 위해서 제가 단탈리안 궁중백께 함께해달라 부탁드렸어요. 궁중백께서 흔쾌히 받아주신 덕분에 과하게도 이 자리에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성녀의 축복 받은 신심에 찬사를 쏟아부은 것은 물론이었다.

    나는 성녀와 함께 사람들을 상대하며 적당히 눈을 돌렸다. 당연하지만 엘리자베트를 찾기 위해서였다.

    내가 무도회장 저편으로 시선을 던졌을 때였다. 나를 끌어당기듯이 맞부닥친 눈길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 은발의 여인이 한손으로 유리잔을 들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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