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20화 (320/510)
  • 00320 겨울왕(Rex Hyemis)  =========================================================================

    *  *  *

    “어제는 수고했습니다. 롱그위 성녀.”

    “친근하게 부르지 말아주세요.”

    주홍색 곱슬머리의 성녀. 자클린 롱그위는 매몰차게 대꾸했지만 내심 불안했다.

    성녀는 어제부로 브르타뉴에서 이곳 황도에 파견되었다. 도시 광장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는데, 고상하게 대륙의 평화를 울부짖는 내용이었다. 호응이 제법 좋았다. 그럼에도 롱그위의 마음이 불편한 까닭은 건너편 의자에 앉은 단탈리안 때문이었다.

    단탈리안이 말했다.

    “반응이 열렬하지 않았습니까. 그만큼 백성이 평화를 바란다는 것이고, 그만큼 대륙의 상황이 참혹하다는 것입니다. 백성의 의지를 대신해서 연설한 셈이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대륙을 참혹하게 만든 범인인 주제에, 잘도…….”

    무심코 비난을 쏟으려 하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눈앞에서 단탈리안이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상대방을 비난하면 비난할수록 그런 인물과 협력하는 자신의 가치까지 떨어졌다. 이른바 누워서 침 뱉기라는 것이었다. 단탈리안이 웃는 이유도 거기 있겠지. 롱그위는 꼭 팔뚝에 거머리가 기어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하아.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류와 마족의 미래를 상담한다, 그런 명목으로 단탈리안의 저택에 들렸다. 하지만 더 이상 이곳에 일 초라도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잠깐만요, 롱그위 성녀. 벌써 나가면 곤란합니다.”

    “저한테는 이곳을 나갈 권리조차 없나요?”

    “그게 아닙니다.”

    단탈리안이 난감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은 저와 상담하기 위해 방문했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알려져 있지요. 그런 상황에서 당신이 제 저택에 들어오자마자 십 분 만에 나간다고 해보십시오. 사람들이 뭐라고 수군거리겠습니까?”

    “…….”

    “상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별로 유쾌하지 못한 만남이었다. 그렇게 소문이 퍼질 것입니다. 자리가 불편하더라도 최소한 두 시간은 견뎌주시길.”

    정말인가? 롱그위 성녀가 유심하게 단탈리안의 표정을 뜯어보았다.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롱그위 성녀는 불만스러웠지만 도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단탈리안으로부터 시선을 삐딱하게 돌렸다.

    “홍차라도 마시겠습니까? 포도주도 있습니다.”

    “…….”

    “곤란하군요.”

    단탈리안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저를 싫어하는 건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솔직해서 좋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감정과 별개로 우리는 앞으로 보조를 맞춰나가야 하는 협력자입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눌 의지 자체가 없으면 협력도 뭣도 불가능합니다.”

    단탈리안이 파이프 담배를 꺼내들며 말했다. 어린애를 다루는 사람마냥 이쪽을 깔보는 낌새가 목소리에 배어 있었다. 롱그위 성녀가 발끈해서 반론했다.

    “저한테 친근한 척 말 걸지 말아달라는 말씀이에요. 사업상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데 당신과 제가 친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지극히 비효율적입니다.”

    후우, 하고 단탈리안이 연초를 깊이 피웠다.

    “가벼운 안부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관계에서 사업이 이루어진들 얼마나 잘 이루어질지 의문이군요.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되레 깜짝 놀랄 일입니다. 혹시 이것이 브르타뉴인이 관계를 맺는 방식입니까?”

    “…….”

    “자클린 롱그위 성녀. 저는 지금 합스부르크 제국을 대표하는 궁중백으로서 여기 앉아 있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인 감정 따위는 개밥그릇에나 처넣으십시오.”

    롱그위 성녀가 단탈리안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당신은 제가 이끄는 병사들을 모조리 사형시켰어요. 항복한 병사에게도 관용을 베풀지 않았지요!”

    “그래서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저라는 말씀입니까. 재미있군요.”

    단탈리안이 피식 웃었다.

    “좋습니다. 롱그위 성녀, 제가 그대의 병사들을 죽게 내버려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당신도 공범자입니다.”

    롱그위 성녀의 눈초리가 더욱 매서워졌지만 단탈리안은 개의치 않았다.

    “파리시오룸을 수비하는 병력은 명백히 노병(老兵)과 비숙련병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대로 농성전에 임했다고 해도 얼마 버티지 못했겠지요. 브르타뉴군은 왜 파리시오룸에 형편없이 질이 떨어지는 병력만 남겼습니까?”

    “그것은…….”

    “누가 봐도 버림패였습니다.”

    대답할 틈을 허락하지 않고 단탈리안이 단언했다.

    “여왕이 도망치는 시간을 벌어주는 데 소모되는 고기방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요. 설마 몰랐다고 발뺌하지 마십시오, 자클린 롱그위. 병사들은 여왕의 명령에 의해 사지로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명령에 동의했지요…….”

    “…….”

    “당신과 여왕은 브르타뉴군 사천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문서에 공동으로 서명한 것입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롱그위가 대답하지 못했다.

    저택의 응접실에 조소하는 웃음소리가 나지막하게 내려앉았다.

    “아군을 희생양으로 삼아버렸으면서 정작 책임은 다른 사람한테 지운다라. 신경줄도 굵군요. 부러운 팔자입니다. 당신 같은 인간이 성녀라니요. 무언가 서류가 잘못된 것이 아닐련지.”

    “다, 당신이란 마왕은……!”

    성녀는 어깨가 분노로 떨렸다.

    단탈리안의 입끝이 올라갔다.

    “저희 제국이었다면 절대로 성녀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당신은 신전은커녕 창녀촌에나 어울릴 법한 여자입니다.”

    찰싹, 하고 소리가 크게 울렸다. 성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단탈리안의 오른뺨을 후려친 것이었다. 성녀는 눈가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쯤은, 제가 쓰레기라는 것쯤은,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한테는 저를 비웃을 자격이 없어요――당신만큼은!”

    “…….”

    “절대로, 세상에 살아가는 그 누구도 당신에게 비웃음 따위를 당할 정도로 악하지 않아!”

    단탈리안이 조용히 성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단탈리안은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옳은 지적이군요.”

    지나치게 깔끔한 인정이었다. 한치의 주저도 없는 긍정에 당황한 쪽은 도리어 성녀였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단지 눈썹을 찡그리는 성녀에게, 단탈리안이 지긋하게, 어떠한 감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순전히 궁금해서 여쭙는 것입니다만. 그렇다면 당신에게도 저를 무시하고 비웃을 자격이 없지 않습니까?”

    “…….”

    “뭐. 하긴 인간은 복잡한 생물입니다. 감정이란 혼란스럽고 오묘하여 이성으로 미처 다스리지 못하는 부분이 있겠지요.”

    단탈리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업 얘기로 화제를 바꿀까요. 한 달 뒤, 바타비아에서 행사가 열립니다. 그곳에서 당신과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당신은……아무렇지도 않나요?”

    롱그위 성녀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이 하는 짓이 모두 잘못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그리 태평할 수가…….”

    “자클린 롱그위 성녀.”

    단탈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개인적인 질문은 삼가십시오. 그건 당신이 발을 들여도 될 영역이 아닙니다.”

    *  *  *

    겨울의 외교전은 철저하게 제국의 승리로 종식하였다.

    성녀들이 분열되어 서로가 소리높여 자기 주장을 하는 동안, 나는 재빠르게 움직여서 열국을 아군으로 끌어들였다.

    결과적으로 대륙의 열두 국가 중에서 여덟 나라가 합스부르크 제국을, 네 나라가 합스부르크 공화국을 지지했다. 압승이라 해도 무방했다.

    짧지만 강력했던 외교전이 한 달 만에 끝나자, 거의 곧바로 바타비아에서 공화주의 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바타비아의 수도 암스텔로 향했다.

    공화국 총독관저.

    이곳에는 인간들에게 숨겨진 정원이 있었다. 그쪽으로 발길을 돌리니 아니나 다를까, 파이몬이 하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내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겠지. 파이몬은 그래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파이몬.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파이몬은 대답하지 않았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열국과 친교를 맺었습니다. 설령 이제 와서 공화주의를 울부짖어도, 열국은 마족을 무조건적으로 적대하지 않고 제국과 협조하려 할 것입니다. 지금 당신이 봉기해본들 평원파의 제국은 고립되지 않습니다.”

    “…….”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그런가. 이미 결심이 굳어졌는가…….

    나는 잠시간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저는 제국의 대표로서 회의에 참석합니다. 평원파와 산악파가 싸우는 모습을 넋 놓고 지켜볼 생각은 없습니다. 미리 경고하겠습니다. 파이몬, 당신의 뜻대로 일이 흘러갈 거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이걸로 끝이겠지.

    내가 등을 돌려 심처의 정원에서 나가려는 순간, 파이몬이 말했다.

    “단탈리안. 회의에는 합스부르크 공화국도 참여합니다.”

    “……그래서 뭐가 어떻습니까. 공화국의 애송이 사신들이 저를 어떻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까?”

    “당신이 옛날부터 천재라고 평가하던 사람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요.”

    내 발길이 멈추었다.

    “설마……?”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 그녀는 이번 회의에 공화국 대표로서 참여하겠노라고 통보했사와요. 비록 이틀뿐이지만.”

    몸이 경직되었다.

    “말도 안 됩니다. 어째서 일국의 군주가……파이몬. 이번 대표회의의 의미를 통령에게 알려준 것입니까!”

    “……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당신을 제외하고요.”

    나는 곧바로 상태창을 열어서 파이몬의 심리상태를 확인해보았다. 확실했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혹시 엘리자베트 스스로 대표회의의 내막을 알아낸 것인가. 말도 안 된다! 그런 건 불가능하다. 평원파도 이번 회의를 딱히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열려면 열든가, 하는 분위기이다. 엘리자베트에게 비밀을 누설할 자 따위는 없다…….

    이쪽에 내분이 일어날 조짐이 있음을 간파했다? 설마. 내분 따위는 아직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발생한 적조차 없다.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허울 좋은 울타리 아래 모두 화목하게 지내고 있는데…….

    ……그런가. 합스부르크 제국이 아니라 바타비아 공화국이 문제였는가.

    바타비아 공화국은 최종적으로 제국을 지지했으나 아주 약간 타이밍이 늦었다. 그 직전에 나는 바타비아의 성녀가 아니라 브르타뉴의 성녀를 이용했다. 그것을 분열의 조짐으로 알아챘는가…….

    온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단지 한 발자국 엇박자가 있었을 뿐이다.

    정말로 별 것 아닌, 세상에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엇박자였다. 그 한 순간의 틈을 엘리자베트는 간파하고 말았다. 아니, 그녀이기에 간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주저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오히려 잘 되었다. 두렵고 무서운 인물이지만 방책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부디 건강하기를.”

    나는 파이몬에게 인사를 건네고 총독관저에서 빠져나왔다.

    현재 이 도시는 철저하게 보호되고 있겠지. 일국의 군주가 참석하는 이상, 경비는 어느 때보다 삼엄할 것이다.

    엘리자베트가 제 발로 찾아온 만큼 기회를 노려 암살하고 싶다마는, 안타깝게도 지금 바타비아는 내게 별로 협조적이지 않다. 암살은 일단 어렵다고 판단해야 옳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수밖에 없다…….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 아마도 틀림없이 그녀와 나는 대면하게 되겠지.

    브루노 평원에서 벌인 연설전과는 다르다. 그때 이쪽은 엘리자베트를 알고 있었으나, 엘리자베트는 나를 몰랐다. 지금은 우리 모두 서로를 파악하고 있었다.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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