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19화 (319/510)
  • 00319 겨울왕(Rex Hyemis)  =========================================================================

    *  *  *

    ‘차분하군.’

    엘리자베트가 눈을 감으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머리에는 어두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끝없이 새까만 공간에서 오직 엘리자베트만이 의자에 앉았다. 그 앞에는, 상상 속의 체스판이 놓였다.

    엘리자베트의 심상에서 체스판은 대륙을 의미했다. 말 하나하나에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것은 때로는 금전을 상징했고, 때로는 성녀를 상징했으며, 때로는 열국의 군주를 상징했다.

    검은색 체스말의 왕은 엘리자베트 본인을 가리켰다.

    한편, 하얀색 체스말의 왕은……당연하게도 단탈리안을 의미했다.

    엘리자베트는 때때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하여 이런 상상의 작업에 몰두하고는 했다.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어졌다.

    ‘마음이 이렇게 편안한 것은 오랜만이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

    그 시절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대륙을 체스판으로 삼아 종횡무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자신감이 있었다. 모든 시간에 한여름의 햇빛이 찬란하게 쏟아졌다. 비록 무덥고 혹독한 증기가 삶을 둘러싸고 있었으나, 그것은 태양을 품에 안은 자라면 마땅히 짊어져야 할 운명에 불과했다.

    ‘정말로 오랜만이야.’

    그때 시절과 달라진 점이라면, 패기 넘치는 흥분이 사라지고 오로지 차분한 고요만이 배경처럼 덩그러니 남았다는 것일까.

    ‘악몽도 없다.’

    엘리자베트는 천천히 두 눈을 떴다.

    심상의 풍경에서 그녀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덮혀 있었다. 이쪽과 마찬가지로 저편에도 의자가 놓였다. 하지만 의자에 앉은 사람은 주위보다 더 짙은 검정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간신히 몸의 윤곽만이 잡혔다.

    “───.”

    시작했다.

    어두워서 흐릿한 저편에서 오른팔만이 뚜렷하게 솟아났다. 손이 앙상하게 말라 살집이 적었다. 그 손이 말을 집었다. 툭, 하고 말이 전진하여 체스판에 놓였다.

    ‘돈으로 사절단을 매수하는가.’

    엘리자베트가 무감정한 눈동자로 탁자를 노려보았다.

    ‘……대응하기가 껄끄럽다.’

    공화국에는 예산이 부족했다. 외교전에 써먹을 뇌물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녀는 상대에게 응수하여 체스말을 움직였지만, 벌써 흑색의 군대가 백색의 군대에 밀리고 있음을 감지했다.

    ‘예전부터 그러했다. 단탈리안은 철저하게 적의 약점을 공격한다.’

    엘리자베트는 상대의 행적을 수십 번 수백 번 되풀이하여 분석했다. 검은 산맥 전투, 성전, 프랑크 내전, 백합 전쟁. 그렇기에 엘리자베트에게는 단탈리안의 어렴풋한 윤곽이나마 보였다.

    ‘반대로 말해서, 상대방의 약점이 무엇인지 모호하면 결코 공격하지 않는다…….’

    어두운 저편에서 또 다시 팔이 튀어나왔다. 그것이 말을 움직이자 이쪽의 병사가 잡혔다.

    엘리자베트는 이마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빠르다.’

    외교전이 시작하고 보름도 안 되어 튜튼과 칼마르를 떨어트렸다. 지나치게 빨랐다.

    ‘검은 산맥의 산성을 함락하는 데 3일. 브란덴부르크를 점령하는 데 7일. 파리시오룸을 함락하는 데엔 불과 10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단탈리안이 선두에 설 때는 모든 것이 비정상적으로 가속했다.

    단탈리안의 수하로 추정되는 라우라 데 파르네세라는 여장군과 대조하면 이 특징은 더욱 확실해졌다. 하이델베르크 요새는 11개월에 걸쳐서 함락되었다. 속전속결을 강력하게 선호하는 단탈리안에게는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요새가 떨어지기 한참 전부터, 엘리자베트는 저것이 단탈리안의 작전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그대는 마치 강박증에 시달리는 듯하다. 언제나 시간에 쫓기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어.’

    엘리자베트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어째서?’

    시간에 시달리는 것은 강자가 아니라 약자이다.

    전쟁에서 강자는 안전을 중시하며 천천히 상대편을 압박한다. 전황이 유리하니 구태여 급하게 움직일 필요가 없다. 현재 상황에서 단탈리안은 명백히 강자에 속했다. 그런데도 뭐가 그리 급한지 정신없이 외교전을 펼쳤다.

    ‘어서 해결하지 않으면 곤란한 거로군. 제국. 혹은 마왕군에 잠재적인 위협이 있다. 아마도 틀림없이 이번 겨울 안에 해결하지 않으면 폭발하고 말 잠재적 위협.’

    엘리자베트가 체스말을 쥐었다.

    ‘내 생각이 틀렸는가――마왕이여.’

    쿵, 하고 육중한 체스말이 판에 내려앉았다.

    대륙의 성녀를 동원한다. 그것이 이번 한 수의 뜻이었다.

    단탈리안이 상대의 약점을 이용한다면 이쪽이라고 똑같이 행동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마왕군에는 성녀에 대적할 만한 종교적 상징물이 전무했다. 회심의 일격이라 해도 좋겠지.

    “…….”

    의외의 기습에 마비된 것일까.

    흑색으로 뒤덮인 그림자는 말없이 체스판을 주시했다. 잠시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림자의 팔이 서서히 움직였다. 상대방이 내놓은 수에 엘리자베트가 눈썹을 찌푸렸다.

    ‘브르타뉴의 롱그위 성녀.’

    상대는 예상하지 못한 기습을 역시나 예상하지 못한 반격으로 돌려주었다.

    롱그위는 오히려 다른 성녀들을 비판했다. 신들께서는 인간과 마족을 가리지 않으시고, 항구적인 평화를 바란다면 신분과 성별, 종족을 초월하여 모두가 동등하게 신들의 봉사자라 주장했다.

    ‘훌륭하다.’

    성녀에는 성녀로 맞선다.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이다.

    성녀들끼리 의견이 분열되는 것만으로 대륙의 백성은 동요하겠지. 어느 성녀가 옳은가. 사람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생각해보고 의심해볼 것이다. 이제 적어도 무조건 제국을 비난할 수는 없게 되었다.

    ‘하지만 용케도 앙리에타를 설득했군.’

    앙리에타는 귀족들 사이에서 점점 지지를 잃어가고 있다. 그것을 이용했으리라.

    ‘앙리에타의 지지도가 사라지는 만큼 그 대신에 롱그위 성녀가 민중의 지지를 받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인기를 얻은 롱그위 성녀가 다시금 앙리에타를 지지한다면, 결과적으로 앙리에타는 잃어버린 민심을 꽤나 회복한다…….’

    엘리자베트가 재빠르게 체스판을 훑었다.

    어디인가. 어떤 방법으로 성녀에게 인기를 쥐어줄 계획인가. 어떻게 앙리에타를 설득한 것인가.

    ‘프랑크의 중앙정부와 남부 도시들.’

    엘리자베트의 시선이 체스판 한곳에 고정되었다.

    ‘두 세력 사이에 전화가 감돌고 있다. 이들을 중재할 협상자가 필요하다. 본래라면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중재를 시도할 터……. 그 역할을 롱그위 성녀에게 양보했군. 과연, 멋진 한수이다.’

    엘리자베트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프랑크의 남부는 북부와 비교해서 왕당파적인 색채가 강하다. 브르타뉴에도 큰 적대감이 없지. 앙리에타가 직접 중재자로 나선다면 반항하겠지만, 성녀가 움직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성녀는 국가적인 증오심을 뛰어넘어 평화의 상징으로 작용하는 면이 있었다.

    엘리자베트가 판단을 완료했다.

    ‘지금 롱그위 성녀가 나선 것은 그런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다.’

    만일 이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롱그위 성녀는 매우 그럴듯한 명성을 얻게 된다.

    첫 번째, 롱그위 성녀는 인간과 마족 등 종족의 차별을 초월하여 평화를 주장했다.

    두 번째, 롱그위 성녀는 브르타뉴와 프랑크라는 국경을 초월하여 평화를 이끌었다.

    세 번째, 심지어 롱그위 성녀는 마왕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적이 있으며 또한 브르타뉴의 성녀이다. 그런데도 마왕군과 프랑크에 유리한 평화 정책을 두둔했다.

    이래서야 누가 봐도 롱그위 성녀가 진심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것처럼 비춘다.

    ‘진정한 성녀의 탄생인가.’

    그리고 성녀는 추락하기 일보 직전까지 떨어진 앙리에타를 곁에서 보좌한다.

    이것이 단탈리안이 앙리에타 여왕과 롱그위 성녀를 설득하는 데 써먹은 각본이었다.

    ‘마왕이 성녀를 만들다니. 더욱이 그것이 진정한 성녀라 칭송받을 예정이라니! 단탈리안, 그것이 너의 수단인가! 도대체 어디까지 인류를 농락하고 조소할 속셈이냐!’

    엘리자베트가 저 너머에 앉은 검은색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보기에 단탈리안은 그야말로 인류를 모독하기 위하여 태어난 자였다. 월맹군에 맞서는 인류의 신성한 동맹을 부정했다. 위대한 왕권을 모욕했다. 이제 이 가증스러운 마왕은 인류의 신앙심마저 더럽히려고 했다.

    엘리자베트가 체스말을 꾸욱 쥐었다.

    ‘이번에는 그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롱그위 성녀를 추동한다. 그것이 훌륭하기 그지없는 한수임을 엘리자베트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하고 그녀가 생각했다.

    ‘약점을 보이고 말았구나, 마왕이여……!’

    단탈리안에게 쟝 볼레라는 가짜 이름과 가짜 사제직을 마련해준 곳은 바타비아 공화국의 아르테미스 대신전이었다. 이 마왕은 바타비아와 모종의 밀월관계를 맺고 있었다.

    ‘지난 전쟁에서도 바타비아가 함께했다. 즉, 바타비아와 그대는 보통 친밀한 게 아니다. 이번에도 브르타뉴를 움직이는 것보다 바타비아를 움직이는 편이 훨씬 더 쉬웠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단탈리안은 구태여 브르타뉴를 이번 외교전의 파트너로 삼았다. 어째서인가.

    정답은 하나뿐이었다.

    ‘단탈리안. 그대는 바타비아 공화국과 사이가 틀어진 것이다!’

    이로써 엘리자베트는 단탈리안이 외교전에서 왜 이토록 서두르는지 알아냈다. 제국 혹은 마왕군에 잠재적으로 다가오는 위협,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바타비아 공화국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번 외교전에서 바타비아는 제일 먼저 그대를 지지해주었어야 한다. 하지만 바타비아는 지금까지 중립을 지키고 있다.’

    여기서 엘리자베트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바타비아 공화국에서 얼마 전 공식적으로 서신을 보내왔다. 공화주의를 토론하는 회의를 개최할 테니 부디 합스부르크 공화국에서도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달라는 것이었다.

    처음에 엘리자베트는 이를 마왕군의 음흉한 계략이라 여겼다. 공화주의라는 명목을 내세워서 인류의 왕당파와 공화파를 이간질시키려는 것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그러나 단탈리안이 대응한 한수가 완전히 다른 해석으로 이끌었다.

    ‘공화주의 회의는 인류를 분열시키는 게 아니라 도리어 마왕군을 분열시킨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단탈리안은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

    즉.

    ‘마왕군 내부에서 공화파와 반(反) 공화파가 세력 다툼을 시작했다는 얘기이다.’

    엘리자베트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정면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대에게는 마왕군의 공화주의자들을 통제할 힘이 없다. 그대한테 대항하는 세력이 마왕군에 적어도 하나 이상 있다. 어떠한가, 겨울의 왕이여.――이것이 그대의 약점인가?’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흘렀다.

    그저 새까맣게 어둡기만 하던 인영이 점점 밝아졌다. 손끝이 보이고, 살집이 없는 손목이 보이고, 팔뚝이 드러나더니, 이윽고 몸 전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거두어지고 맞은편에 앉은 상대방이 나타났다.

    마왕 단탈리안.

    엘리자베트의 날카로운 직감은 자신이 정답을 도출했다는 것을 알렸다. 마침내 단탈리안을 추월하는 데 성공했다!

    ‘잡았다……!’

    상대방이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알아낸 이상, 엘리자베트에겐 더 이상 망설임일랑 없어졌다.

    외교전 따위는 이제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적당히 상대해주겠다. 그리고 늦겨울에 열릴 공화주의 대표회의에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거기서 단탈리안을 무너트릴 실마리를 찾는다.

    그렇게 엘리자베트가 기뻐하려는 찰나였다.

    “……?”

    여전히 상대방한테서 새카만 그림자가 사라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바로 얼굴이었다.

    얼굴 부분만큼은 여전히 칠흑으로 뒤덮여서 상대방이 무슨 표정을 짓는지, 어떤 눈초리로 체스판을 바라보는지 알 수 없었다.

    ‘……잠깐만.’

    엘리자베트는 깨달았다.

    ‘단순히 대륙의 왕당파에게 우호적인 손길을 건네고 싶을 뿐이라면, 구태여 외교전에서 완벽하게 승리를 거둘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제국에 사절단들을 초대한다. 그들을 융성하게 대접한다.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충분할 터. 단탈리안이 이렇게까지 완벽한 승리를 추구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단지 상황에 쫓기고 있는 것만이 아니다……?’

    어째서 그렇게 서두르는가.

    당신은 분명히 유리한 입장에 서 있을 텐데.

    ‘……!’

    문득, 엘리자베트는 등줄기에 전류가 흘러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에 모든 상상의 작업이 무너졌다. 체스판이 사라졌다. 그림자도 증발했다. 엘리자베트가 허겁지겁 두 눈을 떴다. 이미 어두운 공간은 없어졌으며, 대신에 익숙한 집무실 풍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조용한 집무실.

    그 한가운데서 엘리자베트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자기 자신을 약자로 여기고 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