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18화 (318/510)
  • 00318 겨울왕(Rex Hyemis)  =========================================================================

    *  *  *

    외교전에 돌입하고 보름째.

    드디어 엘리자베트가 움직였다.

    “성녀들이 우리를 비난한다고?”

    “예, 단탈리안 전하. 바로 어제 성명이 발표되었습니다.”

    이바르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포세이돈의 대신전과 아레스의 대신전. 양측에서 성녀가 합스부르크 제국을 공식적으로 비난했사옵니다. 제국은 인류의 본분을 망각한 채 마족에게 몸을 팔아재낀 창녀라고.”

    “과연. 종교를 이용하는 것인가.”

    나는 감탄했다.

    엘리자베트가 대리로 파견한 외교관이 어째서인지 싱겁다 했다. 엘리자베트는 처음부터 외교전으로 승부할 생각이 없었겠지. 종교라는 이름의 완전히 새로운 카드를 꺼내들어 판 자체를 뒤엎었다.

    “…….”

    눈치 채보니, 이바르가 요상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음? 아. 수고했다. 하루 만에 정보를 채오다니 훌륭하다. 수고했다, 이바르.”

    “그게 아니오라……아니, 물론 그것도 있사옵니다만.”

    내가 이바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이바르는 뺨이 살짝 붉어진 채로 우물쭈물거렸다. 귀여워라.

    아빠 미소를 지으면서 이바르의 손목을 잡아 당겼다. 앗, 하고 이바르가 작게 비명을 지르면서 내 쪽으로 넘어졌다. 이바르를 품안에 안아서 마치 빗질하듯이 이바르의 금빛 머리카락을 손가락 틈새로 만져주었다.

    “저, 전하. 아직 대낮이온데…….”

    “가끔은 휴식도 필요하겠지. 나에게 궁금한 것이라도 있느냐?”

    내가 귓가에 대고 속삭이자 이바르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아아, 분명히 라우라한테도 이렇게 순진한 시절이 있었는데. 설마 시간이 흐르면 이바르도 라우라처럼 덤덤녀가 되는 것일까.

    “그것이……소인이 예상했던 것보다 전하께서 화나시지 않아서……오히려 기뻐하시는 것 같아 의아스럽다고 생각했나이다.”

    “아아.”

    맞았다. 이바르가 소식을 전해주었을 때 나는 도리어 즐거웠다. 마치 상대방이 돌을 두자 마음이 놓이는 바둑 기사처럼.

    “엘리자베트 통령이 이대로 물러날 리 없다. 그렇게 여긴 까닭이다.”

    “……전하께서는 전부터 공화국 통령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시는군요.”

    “그녀는 천재이다.”

    원래대로 역사가 흘러갔다면 지금쯤 합스부르크의 차기 황제로서 입지를 굳혔을까. 그렇지만 이제 제국은 무너졌으며 엘리자베트는 공화국 통령이라는, 엉뚱한 직위에 올라 있다. 삶이란 공교하군.

    “…….”

    이바르가 또 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보라색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불안? 초조함과 망설임이 섞여 있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니 이바르가 모기처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저에게는 전하께서 훨씬 대단하십니다.”

    하고 이바르는 고개를 쓰윽 돌려서 딴 곳을 쳐다보았다. 방금 자기가 내뱉은 말이 부끄럽고 또 부끄러워 전력으로 도망치겠다는 듯이.

    심장이 쿵, 하고 울렸다.

    귀여워!

    대체 이 귀여운 생물은 무엇인가. 마왕을 암살하기 위해 엘리자베트가 비밀리에 건조한 암살 전용 병기인가. 나는 진짜 히로인의 무시무시한 파괴력에 경악했다. 거의 범죄에 가까운 귀여움이 이곳에 있었다.

    ‘크윽.’

    당장 이바르를 덮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참아야만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덮쳤더니 나중에 라우라처럼 되었습니다, 라는 결말이 나와서야 절망밖에 없었다.

    라우라와 사귈 때는 내가 너무 무심했다. 소녀의 꿈이라는 것을 완전히 고려하지 않았다. 조금 더 연애하듯이 말랑말랑하고 포근포근하게 접근했어야 하는데, 아침에도 섹스, 점심 먹고도 섹스, 자기 전에도 섹스, 오로지 섹스였다. 이러니 라우라가 ‘남자는 죄다 짐승이고 그중에서도 주군은 답없이 발정난 수컷’이라며 매도했지. 꿈도 희망도 없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이바르의 하얀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나에게도 이바르가 가장 아름답게 비춘다.”

    “……!”

    이바르는 얼굴이 불에 달군 주전자마냥 빨갛게 변했다.

    귀여워라. 먹고 싶어라. 하지만 참아야지. 카레를 먹을 때 고기를 마지막에 남겨두는 심정으로 오늘도 나는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남겨두노라.

    “각국의 반응은 어떠한가.”

    “가, 갑작스러운 발표에 당황한 듯합니다. 사절단들은 본국에서 지령이 내려오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을 속셈입니다. 아직 성명이 발표된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절도 많습니다.”

    “우리쪽에서 알려주어야겠군.”

    정보 하나를 알려주는 만큼 저쪽은 우리에게 빚을 지게 된다. 이렇게 차근차근 빚을 만들어두는 게 중요하다.

    “우리에게 불리한 정보입니다. 되도록 늦게 알리는 편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불리한 정보이기에 오히려 말해주어야 옳다. 불리한 정보인데도 솔직하게 공유하면 상대방은 우리를 더욱 신뢰하겠지.”

    어차피 내일쯤이면 전부 알려질 사실. 차라리 화끈하게 고백함으로써 신뢰를 쌓는 편이 나았다. 상인인 이바르와 정치가인 나의 시각이 확연하게 다른 부분이었다.

    “자, 그럼 열국의 대사들을 만나볼까. 성녀의 개입은 저들에게도 예상하지 못한 사태일 터. 우리와 상담하고 싶어서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

    어라. 이바르가 또 묘한 시선이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상태창을 불러오면 심리상태가 적나라하게 보이겠지만, 최근 들어 나는 이 심리상태에 기대는 것을 점점 줄이고 있었다. 상태창은 편리했다. 하지만 너무 편리한 나머지, 자칫 상대방을 관찰하는 데 게을러질 위험이 있었다.

    정말로 중요한 대목이 아닌 이상에야 웬만하면 내 눈과 내 촉감으로 상대방의 의중을 감지하고 싶었다. 이는 나의 정치적인 감에 녹이 슬지 않도록 의도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바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역시, 선배가 거짓말하는 것이었군요.”

    “선배?”

    전혀 짐작하지 못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데이지 선배 말입니다. 본디 전하께 상급자의 흉을 보는 것은 주제에 넘는 일이옵니다만, 이번만큼은 소인의 무례를 허락해주소서. 선배가 참람하게도 주장하기를, 전하께서 선배의 몸에 투명 슬라임을 삽입했다는 것이옵니다!”

    “…….”

    데이지 이 앙큼한 년이?

    “게다가 그 슬라임의 신경이 친오라비가 사용하는 자위기구에 연결되어 있다 하지 않습니까. 요컨대 친오라비와 유사 근친 성교에 빠트리는 것이 전하께서 의도하시는 바라며 말도 안 되는 모함을 소인에게 퍼부었습니다.”

    “……정말로 터무니없는 모함이로구나.”

    “실로 그렇사옵니다. 세상에 어느 변태가 그런 짓을 추구하겠나이까? 틀림없이 선배의 질 떨어지는 두뇌가 스스로 꾸며낸 망상이겠지요.”

    이바르가 콧방귀를 뀌며 조소했다.

    “전하. 예전부터 여쭙고 싶었습니다. 왜 선배 같은 인간을 양녀로 들이셨습니까? 태생이 천박하고 변태스러운 아해입니다.”

    “……전화에 휩싸여 마을을 잃은 데이지가 불쌍해서 말이다. 무심코.”

    참고로 그 마을은 내가 손수 불태웠다.

    “전하께서는 선배에게 다소 무른 경향이 있습니다. 양녀라고 해서 방약무인한 성격을 언제까지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 어린 만큼 성에 대한 관념부터 제대로 교육하셔야 마땅한 줄 아뢰옵니다.”

    “옳은 간언이다. 성교육은 중요하지.”

    그 성교육을 제가 강요했습니다.

    겁나게 양심이 찔린다…….

    항상 이바르의 처녀스러움에 감동을 받는 나였지만 지금만큼은 그 빛이 너무도 눈부셔서 차마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바르. 잠시 바깥에서 데이지를 불러오거라. 바로 교육에 들어가겠다.”

    “분부를 받드옵니다.”

    “아, 그리고 나를 대신해서 사절들에게 다녀올 수 있겠느냐? 너는 나의 시녀로 알려져 있으니 충분히 전령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바르가 맡겨달라고 대답하며 방에서 나갔다.

    그날, 데이지의 고통 어린 신음이 내 방에서 끊임없이 울렸다.

    *  *  *

    사태는 악화되었다.

    다음날이 되자 헤스티아의 성녀도 성명에 동참했다. 그들은 명확하게 합스부르크 제국을 마왕군의 하수꾼으로 규정했으며, 제국의 장단에 놀아나는 것은 곧 대륙을 마족에게 넘기는 것이라며 맹렬하게 비판했다.

    지금까지 성명에 뛰어든 성녀는 세 명. 포세이돈, 아레스, 헤스티아의 성녀이다.

    포세이돈은 사르데냐 왕국의 국교이고 아레스는 폴리투니아 왕국의 국교이다. 헤스티아는 모스크바 왕국의 국교.

    사르데냐 왕국과 폴리투니아 왕국은 처음부터 엘리자베트를 지지했다. 즉, 모스크바의 헤스티아가 새롭게 합류함으로써 엘리자베트는 한 명의 아군을 더 얻었다.

    그리하여 스코어는 4:3.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외교전이고 엘리자베트는 종교전인가.”

    칼날이 오가지 않을 뿐이지 살벌한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대륙에는 정교분리가 꽤 확실하게 이루어져 있지만 성녀는 민중의 아이콘이다. 성녀가 앞장서서 뭔가를 비난하면 백성들도 거기에 따라서 목소리를 낸다. 신앙심 깊은 관료들도 거기에 끼어든다. 순식간에 정치적인 파급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태에 직면하여 내가 찾아간 곳은 약간 의외의 장소였다.

    “우리나라의 성녀와 만나고 싶으시다는 얘기입니까?”

    “그렇습니다.”

    브르타뉴 왕국의 대사.

    이번 외교전이 가장 재미없을 국가의 사신이었다. 앙리에타 여왕은 개인적으로 공화국 편을 들고 싶었지만, 국가의 안위가 걸렸기에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지지했다. 아마도 성녀들이 들고 일어선 것을 내심 기뻐하고 있겠지.

    “제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군요. 여왕 전하께 아뢰겠습니다.”

    “한시가 급한 일입니다. 부디 서둘러주십시오.”

    대사는 미심쩍어 하면서도 여왕과 나를 연결해주었다.

    나는 밀실에 들어가서 브르타뉴의 마법수정구를 이용했다. 뿌연 장막이 펼쳐지면서 앙리에타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한참 직무를 보고 있었는지 탁자에 서류가 산더미처럼 올려져 있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안녕하게 지내셨습니까, 전하.”

    “하루하루 그대를 저주하는 마음으로 보내고 있지.”

    앙리에타가 입끝을 비틀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눈가에는 기미가 쌓여 있었다.

    “호오.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어떤 마왕이 나의 사랑스러운 왕국에 분열을 뿌려서 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귀족들이 말썽을 부리고 있지. 덕분에 아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어.”

    “그거 참 불경한 작자입니다.”

    내가 웃었다.

    앙리에타 여왕이 자세를 이쪽으로 돌리며 다리를 꼬았다. 군복이 아니라 평상복을 입은 앙리에타는 처음 보았다. 자주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화려함 대신에 간결함과 편안함에 중점을 두었는지 시원시원했다. 앙리에타에게 무척 잘 어울렸다.

    “궁중백으로 승작되었다고 했던가. 축하하네. 뭐, 자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감사합니다. 모두 전하 덕분입니다.”

    “……겉치레로 들리지 않아서 오히려 열받는걸. 그대가 지옥에 떨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다.”

    앙리에타를 패배시킨 덕분에 승작했다. 그런 숨은 뜻을 알아채고 앙리에타가 말한 것이었다. 나는 또 웃었다. 재미있는 여왕 전하가 아니고 뭔가.

    “용건이 무엇이냐. 설마 본인을 놀리려고 아국의 대사를 협박한 것은 아니겠지.”

    “합스부르크의 통령이 성녀들을 추동하고 있습니다.”

    내가 낯빛을 진지하게 고쳤다.

    “정략과 정략의 싸움이라면 소인은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만, 종교에 관련되어서야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소인은 종교계와 인연이 적으니까요.”

    “쟝 볼레 사제께서 경천동지할 발언을 입에 담으시는군.”

    앙리에타가 비웃었다.

    “그래서?”

    “귀국의 롱그위 성녀와 면담하고 싶습니다.”

    자클린 롱그위 성녀.

    아테네 여신의 성녀이자 브르타뉴 왕국의 수호자. 지난 전쟁에서 파리시오룸에 끝까지 남아서 저항하다가 우리군에 붙잡혔으며, 정전 협정의 대가로 브르타뉴에 돌려주었다.

    앙리에타가 눈썹을 찡그렸다.

    “……무슨 속셈이지, 단탈리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약간의 배려를 해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내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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