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17화 (317/510)

00317 겨울왕(Rex Hyemis)  =========================================================================

튜튼 왕국 다음에는 칼마르 연맹국 차례였다.

칼마르 연맹국은 대륙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다. 고로 이름하기를, 북방의 사자. 혹독한 추위와 겨울을 정면으로 노려보며 포효를 내지르는 전사의 나라이다.

과거에 이들은 바이킹처럼 배를 타고 대륙 각지를 약탈했다. 시간이 흘러 오늘날, 이 잔혹무비한 전사들은 자신의 전투성을 보다 고상한 거죽데기로 포장하는 데 성공했다. 칼이 사라지는 대신에 장사와 무역이 들어선 것이었다.

전사이면서 동시에 상인. 칼마르인에게는 두 가지 얼굴이 기묘하게 공존한다. 뭐, 칼이든 무역이든 모두 약탈 행위라는 점에서 대동소이하다.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칼마르 연맹의 대사가 말했다.

“궁중백. 공화국에서는 우리에게 관세의 인하를 제시했습니다.”

이미 공화국에서 떡밥을 던지고 간 모양새였다.

“관세의 인하라…….”

“상당히 좋은 조건입니다. 제가 궁중백에게 사실을 전해드리는 것은, 그동안 궁중백께서 저희에게 보여주신 우정에 보답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도록 부추기는 것이겠지. 솔직하며 과감하다. 칼마르 연맹의 스타일이 느껴졌다.

나는 브랜디가 담긴 술잔을 한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말씀을 들어보니 칼마르에서는 꽤 구체적인 협상안을 고려해두는 것 같군요.”

“예, 저희는 단지 풍부한 시장을 원할 뿐입니다.”

대사가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공화국이 제시한 관세는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공화국이 그리 큰 시장은 아니지요. 저희에게는 합스부르크 제국이 더욱 달가운 시장입니다……만약 몇 가지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그 조건이라 함은 당연히 관세 인하를 가리켰다.

대륙에서 상인으로 이름난 국가를 열거하자면 칼마르 연맹국, 바타비아 공화국, 사르데냐 왕국. 이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가운데 칼마르는 관세 혜택을 받음으로써 확실하게 선두를 차지하려는 것이다.

“조건에는 물론 바타비아나 사르데냐에게는 관세 혜택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붙겠군요.”

“궁중백께서는 역시 이야기가 빠르군요.”

“흐음.”

내가 미소를 지었다.

“썩 나쁘지 않습니다.”

“나쁘지 않다……? 실례이지만, 무슨 말씀인지.”

칼마르 대사가 미간을 좁혔다. 지나치게 애매모호한 발언이라 생각했을까.

“협상안으로서 그럭저럭 괜찮다는 의미입니다. 다만 상책이라고 보기는 힘들군요.”

“……저로서는 궁중백의 의중을 가늠할 수 없군요.”

“대사. 저 역시 짧은 기간이지만 대사와 우정을 쌓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에 기대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협상안은 쓸데없이 적을 만들어버립니다.”

대사는 명백히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생뚱 맞은 타국의 정치인이 '귀국이 제안한 협상안은 별로 우아하지 못하군요'라고 지적해왔다. 제법 불쾌하겠지.

조금만 기다려봐라. 당신도 분명히 납득해줄 거다.

“귀국의 협상안은 너무나 노림수가 명백합니다. 사르데냐와 바타비아를 공공연하게 경쟁국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저희 제국은 귀국을 협력자로 얻는 대신에 두 국가를 도발하게 됩니다. 수지타산이 도저히 맞지 않습니다.”

“제국의 협력자가 되기에 본국에 모자람이 있다는 뜻입니까?”

대사가 화가 섞인 목소리로 추궁했다. 내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아닙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노림수가 너무 적나라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군요. 정략으로 평가하자면 우아함이 떨어진다, 라고 평할 수 있겠습니다.”

“…….”

“애시당초, 이런 협상안이 이루어지면 사르데냐와 바타비아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귀국의 상인에 대하여 꽤나 본격적인 공세를 퍼붓겠지요. 십중팔구 관세 전쟁이 펼쳐집니다. 그건 귀국에 있어서도 바람직한 사태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사가 술잔을 비우고 탁자에 쿵, 하고 내려놓았다.

“우리 전사들은 결코 대결을 피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결투이든 무역이든. 바타비아의 샌님이나 사르데냐의 쭉정이는 수천수만이 달려들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좋은 자신감이다. 그러나 자신감은 이성에 기반해야 한다.

감정적으로 울부짖는 자신감 따위가 국가 정책에 개입하는 순간, 또한 그것이 공식적으로 용인되어버리는 순간, 국가는 순식간에 실패자 집단으로 전락한다. 정책이 실패해도 실패의 원인을 이성적으로 진단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해석하려 들기 때문이다.

왜 라이벌 국가에게 패배했는가? 전사로서의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에.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니면 상대국이 지나치게 비열한 종자라서…….

이래서야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계속 용기라느니 충성심이라느니 엉뚱한 것만 강조하게 된다. 감정은 백성을 선동할 때 전술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정책에 관련하여 관료들은 철저하게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대사. 피를 흘리지 않고도 승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상책이 아니겠습니까.”

“궁중백이 병법가인 줄은 미처 몰랐군요. 어디 기발한 해결책이라도 있습니까?”

내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바다를 항해하는 데 가장 성가신 골칫거리가 마물이라고 들었습니다.”

“음? 예, 그런 면도 적잖게 있긴 있습니다만…….”

대사가 애매하게 대답했다.

수중에는 수많은 마물이 서식한다. 이들은 상인들에게 큰 위험이다. 그렇지만 마왕을 눈앞에 두고 ‘예, 장사하러 바다 돌아다니는 데 그 마물들이 제일 죽여버리고 싶은 방해물입니다’라고 솔직히 반응하기도 곤란하리라.

“익히 아시다시피 우리는 마물을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분명히, '특정 국가의 상선'만 골라서 공격하지 않는 것도 가능하겠지요.”

“……!”

대사의 몸짓이 일시정지했다.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침묵의 무게에 짓눌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듯 대사가 입을 열었다.

“구, 궁중백. 그 말씀은.”

“제국에서는 본격적으로 열국과 교류하기를 열망합니다. 그 의지를 표명하기 위해, 바다의 무법자로 설치고 있는 일부 마물을 통제하고자 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모든 마물을 통제하기란 어렵지요.”

내가 상대방의 빈 잔에 천천히 브랜디를 따랐다.

“제국의 계획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마물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판매할 것입니다. 마물들만 맡을 수 있는 향료를 뱃전에 바른다든지. 뭐, 방법은 여러 개 있습니다.”

“…….”

“이러한 정책을 시도해보는 일환으로서 먼저 특정한 국가에만 표식을 판매할 생각입니다.”

대사가 술잔을 들어 한꺼번에 들이켰다. 그는 흥분으로 붉어진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즉, 저희 연맹에 가입된 상선이 우선적으로 표식을 사용하도록……배려해주신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표현이 적절하지 못하군요. 제국에서 배려하는 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제국의 위험천만한 시범에 귀국이 기꺼이 동참해주는 것이지요.”

내가 빙그레 웃었다.

“대사. 이 시범이 성공한다고 가정해봅시다. 대륙에는 수많은 자유도시가 있습니다. 대체로 상업과 해운업을 주요 산업으로 삼고 있지요. 만약 이들이 '칼마르 연맹에 가입하면 항해 도중 기습받을 염려가 없다'라고 깨달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대사는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순간적으로 입을 벌렸다.

그렇다.

이건 단지 칼마르 연맹국의 상선들이 보호받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자유도시들이 바타비아나 사르데냐 대신에 칼마르를 주요 파트너로 삼는 데 강력한 동기를 부여한다. 무역 시장에서 다른 나라들은 가지지 못하는, 칼마르만의 빼어난 장점이 생기는 것이다.

“바타비아나 사르데냐가 귀국을 공식적으로 비난할 수도 없습니다. 귀국은 단지 제국의 시범적인 정책에 어울려줄 따름입니다. 그들은 귀국의 성공을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 이외에는 할 일이 없겠지요.”

대사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표식의 가격은 어느 정도로?”

“비싸면 비쌀수록 좋습니다. 이것은 귀국을 위해서입니다, 대사.”

대사의 미간이 또 좁아졌다.

“……송구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군요. 왜 비쌀수록 저희에게 좋습니까?”

“값이 싼 경우에는 제국과 귀국이 밀약을 맺은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습니다. 반면에 값이 약간 터무니없다 싶을 정도로 비싸다면 이런 평가가 뒤따르겠지요. 칼마르가 증명조차 되지 않은 표식을 믿고 쓸데없이 거금을 쏟아부었다. 모험을 감행했다…….”

칼마르는 실패할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사르데냐와 바타비아가 더더욱 칼마르를 비난하기 어려워진다.

공식적인 비난도 다툼도 없다. 오로지 이득만을 챙긴다.

칼마르는 싸우지 않고 그저 승리를 챙기면 그만이다.

“대사. 아무리 비싸봤자 자유도시들을 거저 얻는 것에 비하면 무척 저렴합니다. 그리고 귀국에서는 저희에게 구입한 표식을 다시 되팔 수도 있겠지요. 매우 적절한 가격에 말입니다.”

“되, 되팔기까지 허락해주시는 것입니까?”

대사가 결국 평정심을 잃어버렸다. 표정과 목소리가 잔뜩 달아올랐다.

“공식적으로 허락되지 않아도 비공식적으로 용인되는 것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지요.”

“이, 이건 소인이 결정할 수준의 문제가 아닙니다. 즉시 본국에 보고하겠습니다.”

“물론이지요. 하지만 너무 여유를 부리지는 말아주십시오, 대사.”

나는 느긋하게 말했다.

“저희는 바타비아나 사르데냐에게도 똑같은 협상안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결정타였다.

칼마르 연맹국에서는 바로 다음날 오전에 답신을 보내왔다.

연맹국에서는 모종의 표식을 독점할 권리를 얻는 조건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에 전적인 지지를 약속했다. 앞으로 칼마르에게는 11년 동안 독점적인 구입권이 인정될 것이다.

나는 그리하여 매우 고가의 물품을 팔아주는 대가로 또 한 명의 지지자를 확보했다. 이 협상의 내막을 듣고 이바르가 감탄했다.

“훌륭하옵니다. 물품을 사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한테 유리한 가격에 팔아주는 것에 불과한데도 오히려 상대방이 애원하고 있습니다. 전하께 상재까지 있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좋은 스승을 두었거든.”

분홍빛 머리카락을 지닌 서큐버스라든가.

우리는 서로 술잔을 부딪치며 조용히 건배했다.

――스코어, 4:2.

*  *  *

튜튼 왕국과 칼마르 연맹국이 제국을 지지한다.

비록 구체적인 조건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지가 선언되자 그 자체로 분위기가 달라졌다. 불과 보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제국은 두 국가를 삶아서 먹어버렸다.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외교력이었다.

열국의 사절단은 경악하는 것과 동시에 의문에 빠졌다.

─ 도대체 얼마나 좋은 조건을 내밀었길래 이토록 빠른 지지가 이루어지는가?

제국에서 어떤 협상안을 제시할지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안 그래도 공화국한테 불리하게 진행되던 외교전이 점입가경에 이르렀다. 사절단들은 공화국과 진행하고 있던 물밑 협상을 한꺼번에 전부 정지했다. 제국에서 협상안을 제시하기 전까지는 공화국과 협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공화국 사절단은 타국의 외교관을 만나러 뛰어다니면서 온갖 조건을 제시했지만, 대체로 요지부동이었다. 특히 상업으로 유명한 국가들은 제국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칼마르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맺는다!”

“아나톨리아를 확실하게 짓누를 수 있게…….”

“어떻게든 제국에게서 좋은 제안을 이끌어내야 한다.”

겨울에 때 아닌 외교전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칼소리 없는 전쟁에 불을 지핀 장본인은 단연 제국의 궁중백 단탈리안이었다. 외교전이 가열차게 진행될수록 사람들은 점차 이 '마왕'에게 또 다른 별명을 붙여주었다.

겨울왕(Rex Hyemis) 단탈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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