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15화 (315/510)
  • 00315 겨울왕(Rex Hyemi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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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철에는 군사가 움직이지 않는다.

    인간에게 겨울잠은 필요없다지만 군대에 한정해서 얘기가 달라진다. 군대는 대체로 11월에 겨울나기 숙영에 들어간다. 그리고 빠르게는 3월, 느리게는 4월에 다시 느릿하게 기지개를 편다.

    다만 몬스터 병사들은 2월부터 전역에 뛰어들 수 있다. 몬스터는 인간보다 추위에 강하다. 단순히 계산해서 마왕군은 인류군보다 자그마치 한 달에서 두 달 가량이나 '일찍' 행동할 수 있다.

    마왕군이 군대를 움직이는 시기는 정해져 있다. 2월쯤의 늦겨울. 인간들이 겨울 내내 보호해낸 작물을 수확하느라 바쁜 4월. 그리고 여름 내내 키워낸 작물을 거둬들이드라 바쁜 가을철이다.

    인간들이 끔찍하게 바쁘거나 싫어하는 시기만 쏙쏙 골라서 움직이는 거다.

    이런 일이 무려 삼천 년 반복되었다. 이래서야 인류가 마족을 증오할 수밖에 없다.

    그만한 증오를 뛰어넘어 하나의 사회를 만들겠노라고 파이몬은 결심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말 그대로 미치광이에 불과하겠지. 미치광이에게 실제로 힘이 주어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미치광이를 그만두고 괴물로 변한다. 역사의 괴물로…….

    나는 먼저 '승전 기념 행사'를 재빠르게 개최했다.

    브르타뉴한테 거둔 승리를 자축한다는 명목으로 파티를 열었다. 이 파티에 각국의 대사를 초대했다. 목적은 단순했다.

    마족들이 공화주의자로 오해받기 전에 먼저 왕당파들과 모임을 가진다!

    초청장에는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의 서명이 들어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황제가 초대한 것이었다. 물론, 이것이 실상 마왕군이 외교적으로 건네는 '우호의 제스처'라는 사실을 예감하지 못하는 머저리는 없었다.

    인간의 왕들은 기다렸다는 듯 외교 사절을 파견했다.

    파티는 호화롭게 진행되었다.

    “폐하. 경하드리옵니다.”

    “합스부르크의 위명이 천하에 진동하오니, 폐하의 위대한 승리에 경탄하지 않는 자가 없나이다.”

    전 국가에서 사절들이 방문하여 루돌프 황제 앞에서 침에 발린 칭송을 줄줄이 늘여놓았다. 그중에는 재미있게도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사신도 끼어 있었다. 이 남자는 때때로 쓴웃음을 지었는데, '합스부르크의 위명'라는 부분에서 아이러니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나는 바르바토스와 함께 황제의 양옆에 서 있었다.

    “하으아아암.”

    바르바토스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길게 하품했다. 바르바토스는 허례허식을 세상에서 제일 따분하게 여기는 족속이었다. 비록 내 제안에 의해서 파티를 열었지만, 이런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본의가 아니겠지.

    “…….”

    “…….”

    바르바토스로서는 그저 지루해서 하품한 것이겠지만, 효과는 상당했다.

    사절들의 얼굴이 굳었다. 공기가 싸해졌다.

    만인지상의 황제 폐하가 사절을 접견하고 있는데 감히 일개 신하가 여보라는 듯이 하품했다. 설령 바르바토스가 제국의 대법관이자 섭정이요, 실질적인 제국의 찬탈자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예의에 어긋났다.

    내가 얼굴을 찡그렸다.

    “대법관.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앞에서 그 무슨 채신머리없는 행동거리입니까?”

    “아, 응. 송구합니다, 폐하.”

    바르바토스가 얌전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소신이 제국의 업무에 시달려 잠시 실례하고 말았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용서하노라. 대법관이 제국을 보살피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음을 누구보다 과인이 알고 있음이라.”

    루돌프 황제가 흔쾌히 사과를 받아들였다.

    사절들의 눈빛이 조용히 이채를 띄었다. 그들에게는 꽤나 인상적으로 비추었겠지.

    완전히 꼭두각시라고 여기던 황제가 최소한이나마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천하에 대적할 이 없다고 호언장담하던 마왕들이다. 그들이 인간을 가리켜서 공손하게 폐하, 라고 경칭한다.

    사절은 십중팔구 '마왕들이 우리 인간과 진심으로 외교 관계를 맺으려 하는 것인지 알아보고 오라' 하는 명령을 받았을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인간 군주의 권위를 인정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당연하지만 외교란 상대방의 권위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번 접견식은 시작이 좋다.

    사절들도 아까 전에 비해 목소리에서 활기가 돌았다. 아첨하는 말이 길어졌고 단어도 다양해졌다.

    드디어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사절에게 차례가 돌아왔다.

    “폐하.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통령 각하를 대신하여 제국의 경이로운 업적을 칭송하나이다. 폐하께서 거두신 승리는 단지 폐하와 제국의 경사일 뿐만이 아니옵고, 한 나라에 있어 진정한 주권자를 바로 세우셨다는 점에서 가히 대의의 승리이옵니다. 저희 통령 각하께서는 제국의 참된 주권자이신 폐하를 언제나 동경하고 있나이다.”

    타국의 사신들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미묘한 찬사였다.

    먼저 다른 사절들은 '합스부르크'라는 용어를 썼는데 반해서 이 자는 '제국'이라고 말했다. 합스부르크의 진정한 후계자는 제국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다, 라는 저의가 숨어 있었다.

    '한 나라에 있어서 진정한 주권자'라는 표현도 마음에 걸린다. 주지하다시피 현재 제국에서는 바르바토스가 섭정이 되어 황제의 주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대 황제를 가리켜서 '진정한 주권자'라니? 자칫 잘못 해석하면 섭정인 바르바토스를 교묘하게 비난하고, 땅에 떨어진 황권을 비아냥거리는 것으로 들린다.

    아마 실제로도 그걸 의도했겠지. 건방지게도.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노림수가 너무 얄팍했다.

    “오오. 과인의 친누이가 축하를 보냈구나!”

    루돌프 황제가 반색하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여태까지 다른 사절을 대하던 것과는 어조가 뚜렷하게 달랐다.

    “형제국에서 사절이 왔으니 한 오라비의 경사가 두 남매의 경사로 불어남이로다. 어떠한가. 과인의 누이는 평안하고 건강하게 신들께서 허락해주신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예, 폐하.”

    공화국의 사신이 대답했다. 그는 얼굴에서 약간의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모두 폐하께서 친애의 정으로 걱정해주신 덕분이옵니다.”

    “허허. 과인이 뭘 했다고 누이에게 도움이 됐겠는고? 엘리제는 어릴 적부터 무엇이든 혼자서 잘 해냈다.”

    루돌프는 숫제 황제의 가면을 어느 정도 벗어던지고 인간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 자리의 주인인 황제가 부드럽게 얘기하자 주변의 공기도 한결 따스해졌다.

    “지금 돌이켜보건마는 엘리제와 더불어 궁전을 뛰어 돌아다닐 때가 과인에게 가장 찬란했던 한때가 아니었나 싶구나. 신들께서는 특별히 우리의 유년에 상냥하고도 부드러운 음악을 선사해주셨나니, 우리 남매에게는 하루하루가 전원시나 매한가지였다.”

    루돌프가 아련한 눈초리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 아름다움은 진실로 아름답다기보다 유년시절에 마땅히 따라붙는 얼마간의 무지. 그리고 얼마간의 어리석음으로 치장된 아름다움일 터. 하지만 과인이 그대들에게 고백하거늘, 이제는 그 무지와 어리석음마저 그립고 정겹구나…….”

    “…….”

    공화국 사신이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거렸다.

    나는 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았다.

    저건 순짜 구라였다.

    루돌프와 엘리자베트 남매 사이에 아름다운 추억이라니.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루돌프, 지금 시체가 되어 바르바토스한테 실시간으로 조종당하고 있는 이 양반은, 생전에 자기 누이들을 강간할 계획이나 진지하게 궁리하던 개자식이다.

    하지만 타국의 사절들은 그런 내막을 모른다.

    “폐하께서 만인지상의 자리에 계심에도 친애를 잊지 않으시니 실로 제국의 앞날이 밝사옵니다!”

    “어린시절을 잊어버리는 자에게는 위선이, 기억하는 자에게는 현명함과 자애가 깃들기 마련이라고 일찍이 현자들이 말했나이다. 폐하께서 씁쓸해하심은 한 명의 주권자로서는 피할 수 없는 상실이옵니다만, 제국 전체에 있어서는 어찌 크나큰 홍복이 아니겠습니까?”

    사신들이 입을 모아 루돌프의 인간적인 면모를 칭송했다. 지금이 기회라는 듯한 기세였다. 과연 각국에서 고르고 골라 사절로 보내온 인간다웠다. 하나같이 청산유수였다.

    “그렇사옵니다. 지나치게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폐하.”

    유일하게 공화국의 사신만이 어딘지 심심하게 반응했다.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명백히 목소리에 색채가 희미했다. 루돌프가 어떤 개자식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미안하지만 아직 이쪽의 차례는 끝나지 않았다.

    “그대들이 짐을 위로해주니 고맙구나.”

    루돌프 황제가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허나, 어린 시절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에서 다시는 되돌이킬 수 없는 것이 있노라. 엘리제도 과인도 무엇이든 전부 스스로 해내려고 했다. 서로가 서로한테 한치도 양보하지 않았음이라. 우리 남매는 너무도 어렸다…….”

    “…….”

    “조금만 뒤로 물러서면 되었을 텐데 그것이 안 되었지. 그 결과, 영광스러운 합스부르크는 둘로 나뉘어서 분가(分家)를 하고 있다. 어린 남매의 다툼이 국가의 절단을 낳았다. 과인이 어찌 후회하지 않겠는고.”

    “……!”

    공화국의 사신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건 교묘한 외교적 술수였다. 지금 루돌프 황제는 합스부르크가 둘로 나뉜 원인을 '단순한 남매 싸움'으로 규정해버렸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자신들이야말로 정당한 합스부르크이며, 신민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워서 건국했다. 여기에 남매 싸움 같은 개인적인 사정은 전혀 끼어들지 않았다.

    루돌프 황제는 이러한 사정을 걷어치웠다. 공화국은 대의명분 때문에 세워진 게 아니라 한낱 남매의 황권 다툼에서 비롯했노라고 선언했다. 공화국 사신 입장에서는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하고 경악할 법했다.

    말의 배치도 교활했다.

    얼핏 오라비와 여동생, 두 사람이 모두 잘못해서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실제로 느껴지는 인상은 전혀 다르다.

    '엘리제는 어릴 적부터 무엇이든 혼자서 잘 해냈다'라고 아무 의미없는 말을 먼저 배치했다. 그 다음에 '서로가 서로한테 한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하고 덧붙였다. 이래서야 마치 엘리자베트의 독선적인 성격이 문제를 일으킨 것처럼 느껴진다.

    아니나 다를까.

    “오오, 폐하. 부디 심려를 거두시옵소서.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옵니다.”

    “언젠가 합스부르크는 다시금 영광스러운 깃발 아래 집결할 것이나이다.”

    사신들이 루돌프에게 우호적인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

    공화국 사신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갔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독립'이 공식적인 외교 무대에서 한낱 '분가'로 취급받게 생겼다. 설령 황제에게 무례를 저지르더라도 그런 사태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폐하, 하오나…….”

    “폐하.”

    사신이 입을 연 순간 내가 끼어들었다. 황제가 나를 쳐다봄으로써 자연스럽게 좌중의 주목이 내게로 모였다.

    “환영식이 준비되었나이다. 오늘은 열국의 군주들에게 축하를 받아들이는, 경사스러운 날이 아니겠사옵니까. 이런 날에 어울리도록 다 함께 근심과 걱정을 잊어보심은 어떻습니까?”

    “오, 단탈리안 궁중백. 그대의 말이 옳다.”

    루돌프가 미소를 지었다.

    궁중백(宮中伯)은 최근에 내가 새로이 하사받은 작위였다. 제국에서는 공작과 변경백 다음으로 직위가 높았다. 바르바토스가 아우스테를리츠 공작이자 로젠베르크 변경백이니, 평원파의 최고참모인 나에게 궁중백은 꽤나 적절했다.

    “과인이 좋은 날에 지나치게 우울한 주제를 꺼내들었군. 이 실례를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사신들에게는 즐거운 향연을 제공해야 마땅하리라. 자아, 궁중백. 사신들을 연회장으로 안내해주게나.”

    “분부를 받드옵니다.”

    내가 허리를 숙이면서 힐끗 공화국 사신을 쳐다보았다. 사신은 시체처럼 표정이 어두웠다.

    진짜 시체인 루돌프는 웃고 정작 산 인간은 울상을 짓는다. 재미있는 농담이다. 뭐, 내가 뻔히 황제를 지원하고 있는데 겁없이 잔재주를 부린 대가이다.

    나는 이미 바르바토스한테 대본을 넘겨서 외우도록 만들어두고 있었다. 준비 자체가 달랐다. 버릇없이 건방지게 짖어대는 엘리자베트의 애완견에게는 좋은 교육이 되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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