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14화 (314/510)
  • 00314 겨울왕(Rex Hyemis)  =========================================================================

    *  *  *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바르바토스는 내 말을 납득해주었다. 그러나 모든 마왕이 나의 통제 아래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나와 싸우느라 사이가 서먹해진 마왕이라면 특히나 그러했다.

    “공화주의 대표회의?”

    초겨울, 어느 공문을 전해받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내용은 간단했다. 대륙의 공화파를 대표하는 정치인과 학자, 예술가를 모조리 불러들여서 바타비아 공화국의 수도에서 대규모 회의를 개최한다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런 회의는 전례가 없었다.

    내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니블헤임의 시민 대표들에게도 똑같은 초대장이 보내졌사옵니다.”

    이바르가 옆에서 첨언했다.

    지금 집무실에는 이바르와 데이지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밖에 없었다. 다른 간부들이 각자 업무를 보러 나간 사이에 이바르가 공문을 가져왔다.

    “소인이 개인적으로 알아봤습니다만 마계의 대공들에게도 전송된 것 같습니다.”

    “대공들까지…….”

    그렇다면 자유도시들에게 모두 동일한 서류가 발송되었다고 봐야 했다. 아마도 대륙과 마계를 가리지 않고. 터무니없는 규모의 회의였다.

    초대측은 바타비아 공화국의 13위원회라고 적혀 있었다. 공화국을 지배하는 실세로 알려졌지만, 내실을 들여다 보면 파이몬의 꼭두각시였다. 확실했다. 이건 파이몬이 꾸몄다.

    내가 한손으로 초대장을 구겼다.

    “제기랄……아직 일러도 너무 이르다!”

    파이몬의 의도는 불 보듯 뻔했다.

    현재 대륙은 공화주의라는 이름의 유령이 휩쓸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이 탄생했고, 프랑크 제국도 공화파의 주도 아래 새로이 재편되었다. 태생적으로 공화주의에 가까운 자유도시들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게다가 왕당파의 대표주자인 브르타뉴가 패배했다……단순히 생각하면 공화주의가 태양처럼 떠오르는 것처럼 보이겠지.

    이 기회를 살려서 한층 기세를 올리겠다. 파이몬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안 된다. 아직은 초국가적인 연맹을 겉으로 드러낼 때가 아니야…….”

    내가 중얼거리자 이바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전하. 그저 회의를 열 뿐이라면 크게 염려하실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단순한 회의가 아니다. 마족과 인간종이 함께 보인다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인류가 마계의 인사들과 접촉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인간종이 생각하기에 마족의 지도자란 곧 마왕이었다. 아주 틀린 인식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마계사회를 다스리는 지도층은 마왕이 아니라 대공 혹은 시민 대표였다. 그들이 실질적인 지배층이었다.

    나는 초조하게 한숨을 쉬었다.

    “마계의 지도층이 처음으로 대륙에서 정치적인 데뷔식을 치루는 것이다. 그것도 공화주의 대표회의라는 이름이 붙은 모임에서……이것을 인간계의 군주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과연. 자칫하면 마계 전체를 공화파로 오인하겠군요.”

    이바르의 보라색 눈동자가 빛났다.

    이바르는 우리 마왕군을 통틀어서 정치-외교적인 식견이 가장 뛰어났다. 라피스나 제레미도 썩 나쁘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이바르는 이런 방면에서 나를 충실히 보좌해주고 있었다.

    “안 그래도 군주들은 브르타뉴의 패망을 고소해하면서도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사옵니다. 경쟁자가 몰락한 것은 기쁘지만 왕당파가 패배한 것은 석연치 않을 것입니다.”

    “아아. 그런 상황에서 공화주의 대표회의란 게 열린다……쓸데없이 자극을 받겠지.”

    이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마왕군은 대륙에 공화주의를 퍼트리는 것이 목적이 아닌가. 군주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옵니다.”

    문제는 이게 근거가 없는 의심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브루노 평원에서 공화주의식 연설을 펼친 장본인이 다름 아니라 나, 마왕 단탈리안이다. 대륙 정중앙에는 엘프-드워프의 부족 연합이 있다. 부족제가 흔히 그러하듯 이것도 공화정에 가깝다. 더욱이 마왕군은 하필 바타비아 공화국과 함께 작전을 펼쳤다…….

    어떻게 살펴봐도 마왕군은 명백히 친(親) 공화주의적인 행보를 보였다. 한 번 의심하면 끝이 없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리고 반작용으로 왕당파가 대대적으로 집결하기 시작할 거다……. 젠장할. 이바르, 데이지. 채비를 하고 따라와라. 파이몬의 마왕성으로 향한다.”

    “예, 전하.”

    인류가 단합하는 사태만큼은 막아야 한다.

    파이몬. 하루라도 빨리 대륙에 공화주의를 펼치고 싶은 네 욕망은 이해한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걸 납득해주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다…….

    *  *  *

    마왕성 <공중정원>.

    말 그대로 중력을 거슬러서 공중에 부유하는 마왕성이다. 풍경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기로 유명하여 공중정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공중에 떠다니는 마왕성은 그 자체로 천연요새이다. 게임에서는 용사 일행이 이 난공불락의 마왕성에 침입하기 위해 그리핀 부대를 동원한다. 파이몬은 용사에게 심장이 꿰뚫린 채로 무너져 내린다……그녀의 마왕성도, 위대한 이상도 함께.

    나는 본래 파이몬을 싫어했다.

    진실을 알아낸 지금은 그녀에게 깊은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위선자라 해도 괜찮았다. 만일 위선마저 없다면 무엇이 삶을 눈부시게 만들어주겠는가. 나는 파이몬을 동경하며, 그녀가 게임처럼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으면 한다.

    하녀복을 입은 정령들이 우리를 안내했다. 한참을 걸으니 자그마한 호수가 나왔다. 호수 근처에 앉아 파이몬은 조용히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바르, 데이지. 이곳에서 기다려라.”

    두 사람을 대기시키고 나는 파이몬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파이몬.”

    내가 곁에 다가섰는데도 파이몬은 말없이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녀 주변에만 또다른 공기가 고요하게 둘러싸고 있었다. 마음을 높으면 나까지 그 공기에 휩쓸릴 것 같았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파이몬의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었다. 여느 때처럼 부드럽고 하얀 살결이었다. 나는 일어서지 않았다.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얘기했다.

    “제가 왜 방문했는지 알고 있을 겁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겠습니다, 파이몬. 시기상조입니다.”

    “…….”

    “공화주의 대표회의라니요. 게다가 인간계와 마계의 인사를 모두 부르다니요. 위험부담이 너무 큽니다. 이쪽이 똘똘 뭉치면 그만큼 적들도 경계하여 한곳으로 뭉치게 됩니다. 인류의 저력은 아직도 충분히 위협적입니다.”

    내가 무릎까지 꿇고 저자세로 나갔다. 이럴 때 파이몬은 철면피처럼 계속 침묵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가 여전히 연못을 바라보면서 연한 분홍빛 입술을 움직였다.

    “그럼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것인지요?”

    목소리에 생기가 적었지만 의외로 호의적인 질문이었다. 좋았다. 파이몬에게는 나와 대화할 의사가 있었다. 내심 다행으로 여기며 내가 차분히 대답했다.

    “육십 년. 아니, 오십 년만 기다려도 충분합니다. 연이은 전염병과 전쟁에 민중은 점점 더 불만에 차오르고 있습니다. 향후 오십 년 동안, 인간계의 군주들은 민중 반란을 진압하는 데 전력을 쏟아부어야 할 겁니다.”

    “…….”

    “오십 년이 지나면 프랑크의 신생 정부도 어느 정도 안정되겠지요. 우리는 프랑크라는 거대한 동맹군을 얻게 됩니다. 파이몬, 오십 년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별로 대단한 세월도 아닙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잠시간 대화가 없는 몇 분이 흘러갔다.

    찬란한 초겨울의 햇빛을 받으며 매 한 마리가 호수에 미끄러지듯이 낙하했다. 물결이 첨벙이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마력이 넘쳐나는 마왕성이기 때문일까. 초겨울인데도 이곳에는 수풀이 푸르게 우거져 있었다.

    파이몬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눈동자가 어두우면서도 초점이 명확했다. 불안감이 내 전신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저건 대화의 여지가 남은 사람이 내보이는 시선이 아니었다.

    “단탈리안. 한 가지만 질문하겠사와요. ……그 오십 년 후에, 바르바토스의 평원파는 어떻게 행동하지요?”

    “……그것은.”

    말문이 막혔다.

    바르바토스는 당연하지만 대륙 정벌에 나선다. 마왕군을 필두로 하여 대륙과 마계를 하나의 절대적인 국가로 성립시킬 것이다. 비단 평원파만의 목적이 아니다. 바르바토스가 제시하는 미래는, 현 시점에서 마계사회에서 가장 큰 지지를 얻고 있다.

    “오십 년 동안 힘을 모으는 세력은 저희뿐만이 아니에요. 평원파도 똑같지요. 단탈리안. 그대의 말대로 오십 년 후에 인간계는 매우 약화되어 있겠지요. 그렇게 허약해진 먹잇감을 눈앞에 두고 과연 마족들이 참을 수 있을까요?”

    “…….”

    무리다.

    인간종과 마족을 아우르는 공화정이 성립하려면 무엇보다도 종족 간에 힘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 마족이 지나치게 강력하면 인간종은 기껏해야 2급 시민으로 취급받겠지. 공공연하게 신분을 차별할 것이다.

    파이몬은 그런 차별을 증오하는 것이다.

    “바알과 아가레스가 사라지고 난 직후인 지금이 기회예요. 마왕군도 타격을 입었고, 인류도 타격을 입었어요. 평화를 명분으로 내세워서 대륙을 통합해야 합니다.”

    “……위험부담이 지나치게 큽니다. 마왕군의 참모장으로서 도저히 동의할 수 없습니다.”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지금 파이몬은 평원파를 경쟁상대로 보고 있다. 위험하다. 인류는 적이고 마왕군은 아군이다. 그 사실을 혼동해버리면 곧바로 내분이 일어난다.

    “파이몬, 우리는 단결해야 합니다. 부디 차분히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내분을 겪었을 때는 언제나 패배했습니다. 우리가 단결했을 때는 어김없이 승리가 뒤따랐습니다.”

    “저는 동의할 수 없사와요.”

    파이몬이 고개를 저었다. 단호한 몸짓이었다.

    “단탈리안. 꼭두각시 전쟁에서 패배한 쪽은 어디라고 생각하나요?”

    “물론 브르타뉴의 여왕이고 대륙의 왕당파입니다.”

    “아니에요.”

    파이몬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미치광이들이 전쟁을 벌이는 틈새에 끼여서 이유도 모르고 죽어나간 백성이에요. 단탈리안. 그들이야말로 궁극적인 패배자입니다.”

    “…….”

    “착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저희 역시 승자의 편에 속하기 때문이에요. 오십 년을 기다리라고 말씀했나요? 군주들이 오십 년 동안 백성을 탄압하느라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라고요?”

    파이몬이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나갈 것을 알면서도 외면한다. 저는 그걸 용납하지 못합니다.”

    “…….”

    “단탈리안. 저는 당신을 비난하지 않겠어요. 당신에게는 당신만의 방식이 있는 것이지요. 그것에 일종의 윤리가 깃들어 있음을, 소녀는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 있어요.”

    하지만, 하고 파이몬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저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여자예요.”

    “……파이몬.”

    처참했다. 지금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지난 번, 파이몬이 위악자라고 질책했을 때 나는 내가 철저하게 악의 축으로 남으려면 반드시 이래야 한다고 반박했다. 동일한 논리가 이번에 반대로 적용된다. 파이몬은 끝까지 선한 자로 남고자 결심했다. 따라서 결코 민중의 개죽음을 좌시해서는 안 된다.

    만일 내가 여기서 파이몬에게 '승리를 위해 희생을 내버려두라' 하고 조언하면 파이몬에게 위선자가 되라고 권고하는 셈이다. 나는 그런 짓을 할 수 없다…….

    파이몬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단탈리안. 제가 바르바토스와 싸우는 날이 온다면 저를 선택해주실 수 있겠어요?”

    나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그걸로 우리 두 사람의 대화는 결정적으로 끝났다.

    파이몬은 이후로 한 마디 말도 꺼내지 않았고, 나 역시 뭐라고 말할 것이 없었다. 나는 등을 돌리고 호수에서 멀어졌다. 참담한 기분이었다.

    “전하. 괜찮으신지요?”

    이쪽의 표정을 보고 이바르가 걱정하는 얼굴로 물어왔다.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바로 바르바토스의 마왕성으로 가자. 할 일이 많다.”

    이대로 가다가는 바르바토스와 파이몬이 맞부닥친다. 그 광경을 보면서 인간계의 군주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하겠지. 그런 결말을 용납할까보냐.

    바르바토스와 파이몬, 두 사람을 모두 구한다. 그것이 나의 결심이다. 하지만 정말로 가능할까. 모두에게 행복한 결말이란 게 과연 있을까. 확신을 가지지 못하겠다…….

    나는 초겨울의 창백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숨이 흘러나왔다.

    “여러모로 바빠질 것이다. 이번 겨울은 유독 길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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