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13화 (313/510)

00313 겨울왕(Rex Hyemis)  =========================================================================

지하 연못에서 온천을 즐기는 한때였다.

“야, 혹시 파이몬이랑 싸웠냐?”

바르바토스가 불쑥 질문했다. 녀석은 우리 마왕성에 놀러와 있었다. 내가 목욕하고 있는데 어느새 옷을 홀라당 벗어재끼고 내 옆에 들어와 앉았다. 캬아, 시원하다, 하고 연신 감탄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아저씨 그 자체였다.

어째서 이런 녀석이랑 애인이 된 것일까.

새삼스럽게 인생에 대해 회의감을 품으며 나는 연초를 뻐끔거렸다.

“왜. 설마 소문이 났어?”

“소문은 무슨. 파이몬 년이 쓸데없이 우울해 보이니까 함 찍어본 거지.”

바르바토스가 온천물로 얼굴을 어푸어푸 씻었다.

“그년 신경줄이 오크 좆탱이마냥 두꺼워서 말이지, 웬만한 일에는 기분이 상하지 않거든.”

“뭐……. 조금 시덥잖게 말다툼을 했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바르바토스가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다.

“왜 싸웠는지 내가 맞춰볼까. 인간놈들 바베큐한 것 때문이지? 그치?”

“어이구. 섭정직 때려치고 돗자리 까셔도 되겠어요.”

“그럴 줄 알았어.”

바르바토스가 깔깔 웃었다. 기분이 좋아보였다. 꼬맹이 마왕은 다른 사람이 꿀꿀해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디스트였다. 요새 제일 잘 나가는 마왕 전하가 이 녀석이라니, 세상 참 말세야.

“거 봐. 너가 파이몬이랑 꽁냥거릴 때부터 불안했어. 파이몬은 '우리'랑 완전히 성격이 다르다고. 제4차 월맹군인가 그때도 인간 포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문제로 존나게 싸웠다니까.”

바르바토스는 예전부터 내가 파이몬과 썸 타는 것을 싫어했다.

기본적으로 바르바토스는 연애자유주의자이다. 파트너가 다른 사람과 놀아나도 절대로 터치하지 않는다, 라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파이몬만큼은 신경 쓰이는 라이벌이다.

예전에 바르바토스가 히스테릭을 부린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다.

갑자기 자기가 정실이네 본처이네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꺼내든 사건의 배후에는, 바르바토스와 파이몬 사이에 오래도록 쌓인 라이벌 심리가 숨어 있다. '파이몬보다 내가 더 우위에 서 있다.' 그걸 나한테 보장받고자 한 것이다.

뭐, 손가락 목걸이 선물해주고 퉁 쳤지만.

지금도 바르바토스는 알몸으로 목욕하고 있는데 손가락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이래서 여자들의 질투 심리는 귀찮다니까.

“바르바토스. 옛날부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넌 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그야 하루라도 빨리 지상에서 청소해버려야 할 쓰레기지.”

쓰레기라고 단언하는 겁니까. 정말 무섭네요―.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왜. 인간도 이성을 가진 종족이잖아. 딱히 죽이지 않고 노예로 써도 괜찮지 않냐.”

“밥팅아. 두개골에 이성이 눌러붙은 종족이니까 더더욱 싹 쓸어버려야 하는 거야.”

바르바토스가 온천 연못에 몸을 한층 깊숙하게 담갔다. 그녀는 뜨거운 물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무표정하게 쳐다보았다.

“이성이란 게 뭐 별 거냐. 하나도 쓸모없어. 마족이든 인간종이든 그냥 내버려두면 늑대처럼 교활해져서 세상을 난장판으로 만들 뿐이야. 어디 그 대단하신 이성적인 분을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라. 왜 똑같은 생명인데 동물이나 식물을 잡수냐고.”

바르바토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십중팔구 이렇게 대답하거든. 나는 이성적인 종족이고 동물이랑 식물은 존나 멍청한 새끼들이니까 먹어도 된다고. 이게 무슨 뼈다구가 똥 싸는 소리냐 이거야. 알겠어? 이건 간단한 문제야. 그놈이 동물이랑 식물보다 강하니까 잡아먹는 거지.”

바르바토스가 오른발을 쓰윽 들어올렸다. 수면 위로 새하얀 발이 잠수함처럼 부상했다.

“나는 이성이란 단어를 들을 때마다 내 귀를 잡아뜯어서 상대방의 입구녕에 처넣고 싶어. 파이몬과 내가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여기야. 그놈은 설사를 황금처럼 받들어 모시고, 나는 설사를 단지 설사로 취급하지.”

과연.

온천물에 몸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내가 물었다.

“그럼 마족이든 인간종이든 가리지 않고 청소하면 될 일이잖아. 왜 인간종만 쓸어버려?”

“응. 천만다행으로 마족은 내가 통제할 수 있거든.”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단탈리안. 나는 이걸 일종의 축복이라고 생각해. 마족에게는 마왕이 있어.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마음을 읽을 수 있어. 어떤 문제가 생겨도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지.”

“…….”

“제어할 수 있는 쓰레기인가. 고삐가 풀린 쓰레기인가. 그 차이야. 만일 세상에 마왕이 없었다면 나는 진지하게 모든 종족을 멸망시키려고 노력했겠지…….”

내가 무표정하게 그런가, 하고 맞장구를 쳤다.

“아아. 그러니까 우리의 동지들을 제외하고 쓰잘데기 없는 마왕은 모조리 청소할 거야.”

제법 공교로웠다.

파이몬과 바르바토스, 두 사람은 모두 마왕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걸 저주로 여기며 다른 사람은 그걸 축복으로 여긴다.

파이몬은 마왕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이질적인 존재라고 파악했다.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무엇보다도 마왕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 그렇게 판단했다. 마족과 인간종이라는 구별을 뛰어넘어, 진정한 사회가 도래하려면…….

정반대로, 바르바토스는 인간종을 이질적인 요소로 보았다. 절대적으로 공정한 사회가 건설되기 위해 인간종이 싸그리 사라져야 마땅하다면서.

그런데도 두 사람은 똑같은 해답에 이르렀다. '마왕을 대거 없애야 한다'라는 해답에. 재미있는 농담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내가 진지하게 말했다.

“바르바토스. 나는 애초에 정의이니 신념이니 하는 것과 거리가 먼 족속이야. 파이몬이 옳은지 너가 옳은지, 나로서는 판단할 자격조차 없어.”

“…….”

“하지만 이것만큼은 말하고 싶어. 아직은 때가 아니다.”

마왕들이 얕보는 만큼 인류는 약하지 않다.

근래에 마왕군이 인간군보다 우위를 차지한 것은 철두철미하게 명분을 활용한 덕분이다. 결코 마족이 인간보다 태생적으로 우월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적의 분열을 이용했다. 브루노 평원에서는 귀족과 평민을 분열시켰어. 꼭두각시 전쟁에서는 프랑크와 브르타뉴를 분열시켰지. 그렇기에 승리를 낚아챈 거다.”

아군은 단합하고 적군은 갈라놓는다.

내가 알고 있는 단 하나의 계율이며, 신성하게 받드는 원칙이다. 여태까지 내가 걸어온 모든 행보는 다만 저 유일한 원칙을 실천한 것에 불과하다.

“너가 산악파를 짓밟는 건 상관없어. 마족을 위한 왕국을 건설하는 것도 좋다. 단, 지금은 아군과 싸울 때가 아니야. 나는 마왕군의 참모장으로서 군단장인 너에게 권고하겠어. 참아.”

바르바토스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합스부르크도 망했고, 프랑크도 망했고, 브르타뉴도 망했잖아. 여기서 뭘 더 참아?”

“글쎄. 아직 건재한 나라가 버니시아, 칼마르, 바타비아, 튜튼, 폴리투니아, 모스크바, 카스티야, 사르데냐, 아나톨리아까지, 아홉 개나 되는군.”

열두 국가 중에 겨우 세 개만 무너졌다.

단순히 계산해서 인류의 3/4이나 아직 남은 것이다. 나는 인류가 미증유의 위기에 봉착했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마왕군이 요 몇 년 사이에 약화되었지. 전쟁통에 몇 놈이 죽었고, 바알과 아가레스가 죽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강력해보이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

“……우리는 뭉쳐 있고 쟤들은 흩어져 있으니까. 그런 거야?”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바토스가 화를 냈다.

“그럼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건데!”

“발정난 고양이처럼 보채지 마. 그래, 적어도 합스부르크의 통령과 브르타뉴의 여왕이 죽을 때까지. 그때까지는 기다려라.”

그쯤이면 원래 게임에서 활약했던 인간측 인물들도 다 늙어서 죽겠지.

특히나 합스부르크 공화국. 이건 전적으로 엘리자베트의 카리스마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 엘리자베트가 죽으면 곧바로 무너질 것이 뻔하다.

나는 바르바토스의 옆구리를 장난스레 만졌다.

“뭐, 길어봤자 육십 년이잖아. 영겁의 세월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그리 대단치도 않아. 안 그래?”

“젠장……너 진짜 싫어!”

바르바토스가 내 손을 걷어 쳤다.

“야! 산악파랑 평원파랑 싸우면 너 누구 편 들 거야!?”

“세상에. 어린애도 하지 않을 유치한 질문을…….”

“썅, 넘어가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바르바토스가 고양이처럼 그르릉거렸다.

“무슨 소리야. 나는 산악파의 편도 아니고, 평원파의 편도 아니야.”

나는 한손으로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만졌다.

“단지 너의 편이지.”

“……어?”

“인간이 쓰레기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너의 이상이 고귀하든 말든 그것도 상관없어. 바르바토스, 나는 그저 순수하게 너의 아군이 되는 거야.”

나는 천천히 바르바토스의 입술에 다가갔다.

그런데 입술에 살짝 닿으려는 찰나였다. 휙, 하고 바르바토스가 내 키스를 피했다. 내가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바르바토스는 표정이 급격하게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우와아, 너 겁나게 깬다.”

어라.

뭔가 기대했던 반응과 전혀 다르다.

뭐라고 해야 할까, 조금 더 얼굴을 붉히거나 쑥스러워 하는 반응을 원했는데. 라우라나 이바르는 이렇게 해주면 좋아서 죽을 지경에 빠지건만, 바르바토스는 음식물 쓰레기를 쳐다보는 것처럼 눈길이 차가웠다.

“방금 그게 날 꼬시겠답시고 말한 거야? 저능아야.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혀발림에 넘어가냐? 존나 느끼하네. 어제 먹은 푸아그라가 도로 올라올 뻔했어.”

“…….”

순식간에 이바르와 라우라를 저능아로 만들어버리는 바르바토스였다.

나는 입끝이 덜덜 떨렸다.

“네, 네년이 순수하지 않은 거지!”

“순수는 무슨 오우거가 짝사랑하는 소리 지껄이고 앉았네. 내가 무슨 평생 연애도 안 해본 처녀도 아니고.”

바르바토스가 코웃음을 쳤다.

“어른인 내가 충고해주지. 너 절대로 누구 앞에서 그런 대사 치지 마라. 진짜 느끼해. 그나마 가슴에 있던 애정도 도망쳐버릴 지경이야.”

“뭐가 어쩌고 저째……?”

“솔직히 죽빵 날리지 않은 걸 감사하게 여겨. 애인만 아니었으면 벌써 너 혓바닥 잘렸다. 깔깔.”

바르바토스가 거하게 웃어댔다.

오랜만에 들어본 모욕에 나는 전신이 부들거렸다. 고작 라우라한테 쩔쩔매는 주제에 어디서 감히 내 연애법을 깔보는가. 다른 건 몰라도 연애사업에 관련해서 무시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입을 벌렸다.

“놀고 있네. 너는 인간 꼬맹이한테 쪽도 못 쓰는――.”

그때였다.

바르바토스의 얼굴이 갑자기 다가오더니 이미 예정된 수순인 것처럼, 부드럽게, 한없이 자연스럽게 내 입술을 훔쳤다. 창졸간에 당한 기습이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바르바토스의 부드러운 혀가 내 입안에 들어왔다. 격렬한 키스가 아니라, 꼭 쓰다듬는 것처럼 살며시 나의 혀에 얽혔다. 나는 입을 다물 타이밍도 놓치고 바르바토스한테 농락당했다.

잠시 뒤, 키스가 끝나고 바르바토스가 천천히 얼굴을 내뺐다.

녀석은 못된 장난을 친 악동처럼 미소를 지었다.

“단탈리안 꼬맹아. 사람을 꼬시는 건 이렇게 하는 거란다.”

“…….”

“거 주둥이만 물 위에 둥둥 떠서 헛소리를 남발해봤자 아무것도 못해요. 알겠냐?”

바르바토스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일어섰다.

지하 연못을 빠져나가는 바르바토스를 향해 내가 서둘러 소리쳤다.

“너, 너 지금 이렇게 달아오르게 만들고 도망치는 거냐!?”

제기랄. 나도 모르게 말이 더듬거렸다.

방금 그것 때문에 내 몸은 격렬하게 더 강한 자극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대로 끝내다니 말도 안 되었다. 그렇지만 저 음흉한 바르바토스는 내 상태를 빤히 알면서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내가 알 바 아닌데? 혼자서 딸딸이라도 잡든가.”

“요즘 라우라랑 사귄다고 아주 서방님한테 못 되게 구는구만!?”

“서방은 누가 서방이야. 싫으면 파이몬이나 불러서 떡을 치셔.”

그녀가 큰소리로 깔깔거렸다.

역시 사디스트이기 때문일까.

어째서인지, 바르바토스는 무척 기분이 좋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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