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11화 (311/510)
  • 00311 소녀의 수난시대  =========================================================================

    “안녕하세요. 새로이 전하의 거처에 신세를 지게 된 이바르라고 합니다.”

    금발의 흡혈귀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제 역할은 니블헤임의 의회를 대표하여 단탈리안 전하와 의회 사이를 중개하는 것입니다. 제가 맡은 소임에 자부심을 갖고 전하를 위해 봉사하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편하게 이바르, 라고 불러주시면 좋겠습니다.”

    짝짝짝.

    의례적인 박수 소리가 울렸다.

    마왕성 지하 10층. 오직 간부들만 출입하는 이곳에 모처럼 인원이 모였다. 재상 라피스, 군무상서 라우라, 자경단장 제레미, 시녀장 데이지. 이들은 새로 맞이하게 된 손님을 어딘지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럴 때 내가 나서주어야겠지.

    “자아. 본인이 소개했다시피 이바르는 마계의 연락책이다.”

    나는 이바르의 작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사정상 가문의 이름은 밝힐 수 없다. 제법 유력한 혈족의 후계이지만 말이지. 걱정하지 마라. 그녀의 충심은 내가 보증하겠다. 우리 파밀리아(familia)의 일원으로 환영해주도록.”

    짝짝짝!

    아까 전보다 약간 갈채가 커졌다.

    그렇다.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우리 마왕성에 이사를 왔다. 이건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바르는 나에게 강제로 키스를 당한 이후 무언가 중대한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보라색 눈동자를 정체 모를 의지로 불태웠다.

    ‘제가 두 번째 삶을 살게 된 것은 전적으로 단탈리안 전하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전하께서는 저에게 채, 책임을 져주셔야 마땅합니다.’

    ‘콜.’

    나는 두 팔을 벌려 환영했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오는 격이 아니고 뭔가.

    이바르는 별다른 이명을 쓰지 않았다. 이바르 자체가 흔하고 흔한 이름이었다. 설마 금발의 여자아이를 보고 쿤쿠스카 상회의 늙은 여우를 떠올릴 미치광이는 없으리라.

    라피스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전하. 이바르 님은 우리 마왕군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에 있습니까?”

    “흐으음. 지위라.”

    내가 손가락으로 볼을 긁었다. 조직에서 서열을 확실히 정해두는 것은 언제나 중요한 절차였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 이바르가 마계에서 얼마나 위세를 떨치는 가문의 자제인가 상관없이 이곳은 단탈리안 마왕군. 본래대로라면 시녀장인 데이지의 조수쯤에다 집어넣어야 옳겠지.

    그런데.

    ‘조금 애매하단 말이지.’

    우리 마왕군의 실세는 단연 라피스이다. 하지만 라피스는 동시에 쿤쿠스카 상회에 속한다.

    즉, 이바르는 마왕군 입장에서 보면 최하위 서열인데 바깥 세계를 기준으로 두면 라피스의 상사이다. 그것도 까마득한 회장님. 서열이 꼬여도 한참 꼬이는군…….

    내가 고민하고 있자니 이바르가 스스로 나섰다.

    “라줄리 재상님이라고 하셨지요. 모쪼록 가장 직분이 낮은 시녀로 취급해주시길 바랍니다.”

    “음.”

    내가 살짝 놀라서 이바르를 쳐다보았다. 이바르는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기 부하보다 한참 낮은 직위로 들어가도 정말 괜찮다는 것일까?

    ─ 전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소인은 쿤쿠스카 회주로서의 이바르가 아니라, 단지 한 명의 여자로서의 이바르라고.

    이바르가 몰래 전음(傳音)을 보내왔다. 그녀는 마법에도 꽤나 소양이 깊었다.

    ─ 신입인 주제에 갑작스럽게 위계 질서를 흐트리면 오히려 제가 고립됩니다. 앞으로 함께 지내게 될 동료들한테 시기와 질투를 받고 싶지 않습니다. 허락해주시옵소서.

    아니, 뭐. 당사자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내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이바르가 한발 더 나아갔다.

    “저는 가문의 위세를 등에 업고 싶지 않습니다. 단지 단탈리안 전하를 모시는 가신으로서 충실하게 봉사하고자 합니다. 다른 분들께 배운다는 마음가짐으로 일하겠습니다.”

    “올바른 자세입니다.”

    라피스가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데이지 시녀장.”

    “예, 재상 각하.”

    “이바르 양의 교육을 맡기겠습니다. 사흘에 한 번씩, 오후 1시 15분에 보고를 올리세요. 시녀장이 처음으로 맡아보는 교육인 만큼, 이것은 여러분 두 사람을 동시에 평가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데이지가 흠 잡을 데 없이 공손하게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들었다.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파밀리아에 한 사람이 추가되었다.

    단지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  *  *

    이바르는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도리어 익숙했다. 한때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가족과 일족을 죄다 잃어버리고, 지옥도라 불리우는 마족사회의 상계에 혈혈단신 뛰어들었다. 거기서 거대 상회를 키워낸 실력은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금권으로 마계를 장악하는 데 천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바르가 마음속으로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다. 니블헤임에 똬리를 튼 백여우, 라는 별명에 걸맞는 미소였다.

    ‘단탈리안 전하의 위세가 대단하나 그래본들 최근에 들어서야 급격하게 성장했다. 전하를 제외한다면 대단할 것도 없겠지.’

    이바르는 단탈리안 마왕성 전용의 하녀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검은색과 하얀색으로 이루어진 하녀복은 묘하게 치마가 짧았다.

    ‘즉, 호랑이의 머리를 가진 개의 몸체라는 녀석이다. 겉보기에 화려할지언정 내실은 허약할 터. 오 년.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이름을 걸고, 단 오 년 만에 이곳을 석권하겠다.’

    아까 전에 만난 간부들도 영 시원치 않았다.

    라우라라고 했던가. 군무상서 아가씨는 회의실에서 대놓고 하품을 하고 있었다. 격식이나 인망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전쟁터에서는 천재일지 몰라도 이곳은 정치판.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하리라.

    자경단장인 제레미는 시종일관 단탈리안 전하한테 음담패설을 던졌다. 분위기를 좋게 만들어준다고 할까. 어느 조직에서나 약방의 감초와 같은 부류였지만, 태도와 말투가 너무 가벼워서 도저히 관록이란 게 없었다.

    ‘그리고 내 교육을 맡게 된 아해는 이제 열네 살이 될까 말까한 꼬마.’

    이바르가 확신했다.

    ‘낙승이로군.’

    인생 경험에서 자신과 절대로 비교할 수가 없었다. 이바르는 데이지를 구워삶을 방법을 서른여섯 개쯤 떠올리며 탈의실에서 나갔다.

    “다 갈아 입었나요, 이바르 양.”

    탈의실 바깥에서는 데이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양손을 가지런히 배에 올려두고 서 있었다. 소녀는 피안화 한 떨기처럼 청초했다.

    “예, 선배님.”

    이바르가 대답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확실히 아름답기는 아름다웠다. 왜 단탈리안 전하께서 눈앞의 여자애를 거둬들였는지 알 만했다. 아마도 시녀장일 뿐만이 아니라 첩실이기도 하겠지…….

    하지만 어린애다. 자신이 패배할 가능성은 만에 하나라도 없다.

    “좋아요. 오늘은 첫날이니 가사 솜씨부터 확인해보려 합니다. 혹시 질문이 있습니까?”

    “아. 네, 선배님. 왜 시녀옷은 전부 이렇게 치마가 짧은지요? 약간 생소합니다.”

    데이지가 살며시 입끝을 올렸다.

    “위선적이지만 상냥한 대답을 원합니까, 솔직하지만 잔혹한 대답을 원합니까?”

    “……네?”

    너무나도 예상 외의 대꾸에 이바르는 그만 약간 느리게 반응했다.

    데이지가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했다.

    “반문은 허락한 적 없습니다. 이바르 양, 질문에 질문으로 응답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기억해두세요. 두 번째 실수부터는 봐드리지 않겠습니다.”

    “……네. 명시하겠습니다.”

    한방 먹어버렸다.

    눈앞의 소녀는 아무래도 평범한 열네 살이 아닌 듯했다. 초장부터 신입의 기를 죽이려고 단단히 다짐한 것이 분명했다. 의도적으로 이쪽이 당황할 법한 태도를 보여주고, 이를 빌미로 삼아 상대방을 압박한다…….

    ‘과연. 전하께서 괜히 양녀로 삼으신 게 아니군.’

    조금 지나치게 방심했다. 이바르는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바르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성격이 아니라 자부했다. 이제부터 넋 놓고 당할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그럼, 선배님. 솔직하지만 잔혹한 대답을 선택하겠습니다.”

    “이유를 물어봐도 좋을까요, 이바르 양.”

    “예. 저는 진심으로 단탈리안 전하를 섬기기를 갈망합니다. 전하와 관련된 사항이라면 그게 무엇이든지 솔직하고 진실된 것을 원합니다.”

    이바르가 상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어째서인지 데이지의 미소가 더욱 더 짙어졌다.

    “솔직하고 진실된 아버님의 모습이라. 부디 그걸 찾으면 좋겠네요. 이바르 양이 선택한 대답을 들려주자면, 바로 저 때문입니다. 우리 마왕성에서 시녀옷이 짧은 것은.”

    “선배님 때문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데이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입술을 열었다.

    “저의 아랫배에는 아버님의 명에 따라 항상 투명한 슬라임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무방비하게 걸어다녀서 치맛자락이 올라가면 저한테 들러붙은 슬라임이 적나라하게 보이지요. 그런 제가 조마조마해하는 모습을 즐기기 위해, 아버님께서는 일부러 시녀옷의 치마를 짧게 제정하셨습니다. 제 설명을 이해했습니까?”

    …….

    장대한 침묵이 있었다.

    이바르는 상대방을 농락하려고 고안해낸 서른여섯 가지의 계책을 몽땅 새하얗게 잊어버렸으며,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가운데, 간신히, 겨우 입을 벌려서 한 마디 내뱉었다.

    “……네?”

    그 순간이었다. 짜악, 하고 살벌한 소리가 마왕성 복도에 울렸다.

    데이지가 이바르의 오른뺨을 날린 것이었다.

    “빠르게도 두 번째 실수를 저질렀군요.”

    “어……?”

    “질문에 질문으로 응대하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데이지는 여전히 표정에 흐트러짐 없이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뺨을 후려친 적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물론 저는 이바르 양의 자유의지를 존중합니다. 제가 경고를 했다고 해서 그것이 이바르 양의 자유의지를 억누를 권리까지 얻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이바르 양이 아무리 굳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 해도 제 체벌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

    “이바르 양. 저는 우리 마왕성 공식 시녀옷의 치마가 왜 짧은지 설명했습니다. 혹시 업무에 들어가기에 앞서 또다른 질문이 있습니까?”

    이바르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아, 아니요. 없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오늘 하루의 업무에 들어가지요.”

    데이지가 가볍게 등을 돌려 복도를 걸어나갔다.

    그녀의 등을 바라보면서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직감했다.

    ――미친 년이다.

    단순한 또라이가 아니었다. 저 꼬맹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웃고 있었다. 슬라임이니 뭐니 말도 안 되게 추잡한 거짓말을 떠벌릴 때도, 일말의 주저없이 뺨을 후려갈길 때도, 단 한 순간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이바르는 오랜 인생 경험에 따라 항상 웃는 사람은 크게 두 가지 부류, 즉 천성이 상냥한 사람이거나 천성이 또라이인 사람, 두 가지 중 하나라는 사실을 터득하고 있었다. 저 꼬맹이는 볼 것도 없이 후자에 속했다.

    ‘제기랄. 하필 직속 선배로 배정된 여자애가 또라이일 줄이야.’

    이바르는 자신의 불운을 원망했다. 어쩌면 오 년으로 잡은 계획을 육 년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을지도 몰랐다.

    복도를 한참 거닐다가 데이지가 멈추었다.

    “저희의 첫 번째 업무는 지하 10층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입니다. 이바르 양의 가사 솜씨부터 확인해보지요.”

    “예, 선배님.”

    다행히도 이바르는 각종 가사에 능숙했다.

    빗자루질, 걸레닦이, 옷빨래, 양탄자 빨래 등등, 이바르는 선배가 지시한 모든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물론 미친 여자한테 혹시나 따귀를 얻어맞을까봐 필요 이상으로 열심히 노력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쓰윽.

    데이지가 복도 구석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손가락에 먼지가 끼지 않는 것을 보고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군요. 재상 각하께 좋은 보고서를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바르가 욕지거리를 참았다. 저 미친 꼬맹이한테 청소란 아무런 쓰잘데기 없는 복도의 구석탱이까지 먼지 한 톨 없도록 닦아내는 걸 의미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아침을 먹고 두 번째 업무에 들어가도록 할까요.”

    “두 번째 업무는 무엇인가요, 선배님.”

    데이지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고문입니다.”

    “…….”

    하마터면 이번에도 네? 하고 반문해버릴 뻔했다. 이바르는 필사의 의지로 목구멍까지 올라온 반문을 도로 집어넣었다. 새파란 꼬맹이한테 얻어맞는 것은 정말이지 싫었다.

    “저희 시녀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마왕성에 침입한 모험자를 상대로 고문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

    “참고로 이것 역시 제가 고문의 쾌락에 빠지도록 아버님께서 유도하시는 바입니다. 아버님의 진실된 모습을 벌써 하나 더 알게 되었군요. 축하합니다. 부디 이바르 양이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이쯤에서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슬슬 깨닫기 시작했다.

    어쩌면 자신은 절대로 발을 들여서는 안 될 장소에 와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 작품 후기 ============================

    들어올_때는_마음대로지만_나갈_때는_아니란다.a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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