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10화 (310/510)
  • 00310 이 대륙에서 오직 두 명  =========================================================================

    니블헤임에 저녁이 찾아오고.

    “이, 이제 됐습니다. 전하! 정말로 이제 충분하옵니다!”

    이바르가 저녁노을처럼 붉게 물든 얼굴로 소리쳤다. 소녀는 상회 건물에서 나올 때랑 비교해서 이미 천양지차로 변신했다. 문자 그대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 하지만 아직 제일 중요한 구두가 남았는데.”

    “아까 전에도 가장 중요한 팔찌가 남았다고, 그 전에도 가장 중요한 귀걸이가 남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소인은 더 이상 속지 않습니다!”

    이바르가 고개를 휙 돌리면서 나를 비스듬하게 노려보았다.

    귀여워라―.

    사주고 싶어, 마구마구 사주고 싶어―.

    일찍이 이토록 내 지갑을 쉽게 열어재끼는 여자는 없었다. 여신 강림. 그렇게 표현해도 한점 모자람이 없겠지.

    이것이 바로 <던전 어택>에 정식으로 등장하는 히로인의 위력……이 단탈리안, 세파에 쩌들어 더는 구제할 도리가 없는 아저씨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바르가 곁에 있으니 무심코 치유되어버릴 것만 같다.

    불가능하지만.

    “애당초 소인은 전하보다 부자입니다.”

    이바르가 입술을 부루퉁하게 삐죽 내밀었다.

    “희귀한 보석이란 보석은 소인의 금고에 죄다 잠들어 있습니다. 용족 장인이 만든 장신구까지 있지요. 만약 소인이 물량공세에 넘어갈 사람으로 생각하셨다면 큰 오산입니다.”

    “으음? 뭘 착각하는 것인지.”

    내가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마계 제일의 갑부이자 쿤쿠스카 상회의 주인인 자한테 선물을 사준 게 아니라네. 단지 한 명의 여자로서의 이바르 로드브로크한테 선물한 것이지.”

    “네?”

    이바르가 눈을 깜빡였다.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내가 희미하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자네는 수천 년 동안 만년설 아래 잠들어 있었다. 나와 만나기 전까지. 자네가 그동안 아무리 재산을 모으고 사치를 부렸다 한들, 그것은 결코 자네를 위해서 쓴 게 아니야.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추는 자신'한테 투자한 것이지.”

    쿤쿠스카 회주(會主)로서의 자신을 가장시키기 위하여.

    이바르 로드브로크라는 자그마한 흡혈귀 소녀는, 보다 사회에서 쉽게 성공하려고, 타인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으려고, 본래 모습을 감추고 지금껏 질주했다.

    나는 물끄러미 니블헤임을 바라보았다.

    도시가 샛붉은 석양에 점차 잠식해간다.

    “자네가 오늘 나에게 말했지. 사치란 사람들이 알아보기에 의미가 있다고. 그렇다면 자네는 어떠한가? 사람들이 자네를 아무리 살펴봐도 보이는 것은 가장된 모습의 인형뿐이지.”

    “…….”

    “아무도 자네를 알아보지 못하는데,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니블헤임은 이바르 로드브로크라는 소녀의 염원이 담긴 도시이다.

    오로지 상인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곳. 여기에는 마왕의 통치도 미치지 못한다. 출신과 종족, 계급을 가리지 않고, 고블린에서 엘프에 이르기까지 수백 종족이 모여들어 북적거린다.

    하지만 이 무슨 역설인가.

    소녀가 가장 절실하게 바란 소원이 이루어진 이 장소에서, 정작 그녀 자신은 본래 모습으로 있을 수 없었다.

    마왕의 지배력을 벗어재끼고 모두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아가는 가운데 오로지 이바르 로드브로크만이 소외되어 있었다. 인형의 탈을 쓴 채로 끝없이 연극했다.

    “이바르. 바알은 죽었다. 아가레스도 죽었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상냥해졌다.

    “혼자만의 힘으로 마계를 정벌할 세력은 사라졌다. 앞으로 마왕들은 상대방을 제압하고자 할 때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명분을 중요시 하겠지. 얼마나 마계 사회한테 잘 보이느냐에 따라 명분이 정해진다. 함부로 마족을 통제하는 일은 극단적으로 적어질 것이야.”

    “…….”

    “이제 인형처럼 살아가지 않아도 돼.”

    소녀의 금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직도 깨닫지 못했는가? 오늘은 처음으로 자네가 온전히 자신으로서 보낸 하루야.”

    “내가 나로서 보낸 하루…….”

    그녀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삼천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지. 경사스러운 날이 아니고 뭐겠나.”

    내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어떤가, 이바르.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바라본 자신의 도시는?”

    “…….”

    이바르는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

    “아. 물론 자네에게 미안한 일도 있어. 원래 바싸고도 함께 처리할 계획이었네만 처세가 너무도 훌륭해서 차마 죽일 수가 없더군. 대신에 정령왕을 셋이나 황천길로 보냈으니 향후 수백 년은 힘을 쓰지 못할 거야.”

    내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면목 없지만 그걸로 봐주지 않겠는가?”

    이바르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잠시 동안 침묵이 있고 나서 그녀가 중얼거렸다.

    “정말 치사합니다……이런 순간에, 이런 하루를 보내놓고, 그렇게 말해버리면 어떡합니까. 저로서는 용서해드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소녀의 어깨가 작게 떨리고 있었다.

    “마왕이란 전부 거짓말쟁이뿐이라서……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믿었는데……정말로 바알도, 아가레스도 사라지고. 당신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져서 가뜩이나 혼란스러운데, 그렇게 말해버리면……그런 식으로…….”

    목소리에 조금씩 물기가 섞여들었다.

    단지 마왕에 대한 증오로 기나긴 삶을 경작해온 소녀였다.

    “이제 마왕을 증오하지 않아도 된다면……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그건 지금부터 고민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내가 조용히 말했다.

    “타인이 대신 고민해줄 수도 없고 제멋대로 피해버릴 수도 없어. 달리 말해 그건 자네만의 문제이다. 누구에게나 삶에서 한 번쯤 주어지는 문제이고, 소중하게 다루어야만 하는 문제이지.”

    다만, 하고 덧붙였다.

    “그런 문제는 항상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계속해서 인형의 탈을 쓰고 있으면 인형처럼 대답할 수밖에 없어. 자네는 소녀다. 이렇게 가장 단순한 사실까지 잊어버리면 안 된다.”

    “……여자로 살아갈 마음 따위, 진작에 버렸습니다.”

    “그런가.”

    내가 이바르의 턱끝을 슬그머니 들어올렸다. 저항은 없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여자아이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 버린 것을 다시 주워야 하는 이유가 생겼을 텐데.”

    “……저, 전하도 거짓말쟁이입니다!”

    이바르가 소리쳤다.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는 바람에 목소리가 엉망진창이었다.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았고, 단어가 울음기에 파묻혔다.

    “달콤한 밀어로 소인을 속이려 들고……저 따위는 하룻밤 상대에 불과하면서, 지금처럼……어차피 소인을 사, 사랑하시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음.”

    “전부 알고 있사옵니다! 라피스 라줄리의 보고서를 누가 받아본다고 생각하십니까! 거래는 항상 공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소인이 전하께 앞으로의 인생을 바친다 해도, 전하께서 저한테 삶을 내어주실 리 없으니, 차라리……!”

    이런 상황에 마주했을 때.

    남자들마다 다르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정말로 착한 남자라면 여기서 상대의 말을 긍정한다. 당신에게 사랑을 주지 못한다. 부디 용서해달라. 지금 당장은 상대방이 깊게 상처를 입을지 몰라도 장래적으로 보면 차라리 낫다.

    제법 나쁜 남자라면 여기서 교묘하게 부정한다. 아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왜 내가 사랑하지 않겠는가.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에 이끌려 드디어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 첫사랑에 눈을 떴다. 너를 한 명의 소중한 사람으로 대하고 싶다…….

    그리고 정말로 나쁜 남자는.

    “……!”

    키스를 한다.

    이바르의 머리를 오른손으로 부드럽게 받힌다. 왼손으로는 그녀의 턱끝을 살짝 들어올린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서, 보랏빛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기습적으로 입을 맞춘다.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꼭 물기에 젖은 자수정 같았다.

    이바르는 처음에는 내 몸을 밀어내려 했지만 점점 더 팔에서 힘이 빠지더니, 이윽고 눈을 감았다. 눈물이 얇고 긴 줄기를 그리면서 흘렀다.

    니블헤임의 저녁노을이 우리를 조용히 비추었다.

    한없이 고요한 공기를 깨트리는 소리가 있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호감도가 9 오릅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의 호감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지고지순한 사랑! 상대방은 당신을 완전한 연인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으로 인하여 상대방에게 새로운 칭호가 생성됩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놓치지 않는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마계에서 가장 부유할뿐더러 거대 상회를 이끌고 있다. 본연의 무력도 상당하다. 하물며, 게임에 등장한 이바르는 한번 연정을 바친 상대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음을 지킨다.

    재력, 권력, 무력, 충성심까지.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이런 인재를 간단히 풀어버릴 수는 없다.

    나는 이바르를 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러자 이바르는, 본인도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가느다란 손을 뻗어서 내 등을 껴안았다. 그녀의 손길이 등줄기에 선명하게 느껴졌다.

    도시에 저녁이 지고 있었다.

    *  *  *

    니블헤임에서 볼 일을 전부 마치고 드디어 마왕성에 돌아왔다.

    일부러 한밤에 순간이동 마법서를 사용했다. 적어도 오늘밤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도 내 침실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침대에 누웠다.

    “…….”

    아마도 틀림없이 나는 이바르 로드브로크에게 질투심을 느끼고 있다.

    이바르에게는 밝은 미래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연극용 가면을 쓰지 않아도 괜찮다. 차근차근 소녀의 몸으로, 자기 자신으로서 세계를 바라보게 되겠지. 설령 비극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그건 온전히 자신의 비극이다.

    나는 아니다.

    이미 나는 가면을 벗어재낄 수 없는 처지까지 왔다. '살아남기 위해서 연기했다'라는 변명이 통하는 수준은 애저녁에 지나쳤다.

    이바르와 나는 정확히 정반대의 방향을 걷게 되겠지. 저쪽은 점차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길로, 이쪽은 점점 더 거짓과 위악밖에 없는 길로…….

    나는 이바르한테 질투 혹은 동경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 자신은 절대로 가지 못하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그 사실에 분노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약간 우울할 따름이다…….

    ─ 똑, 똑.

    누군가가 방문을 두들겼다.

    눈썹을 찌푸렸다. 설마 내가 도착한 것을 알아챈 것일까? 어떻게?

    “단탈리안 님.”

    라피스의 목소리였다. 나는 맥이 빠져 한숨을 쉬었다.

    “그래.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라피스에게는 마왕성에서 혹여나 마법이 발생하면 곧바로 신호를 보내는 도구가 주어져 있었다. 유사시에 나를 대리해서 마왕성을 맡는 재상이므로, 내가 예전에 선물했다.

    하지만 의외로군.

    일부러 몰래 귀환했다. 그 의미를 눈치 빠른 라피스가 모를 리 없었다. 당분간 혼자 있게 해달라, 그런 의미였다. 왜 라피스는 굳이 방문한 것인지…….

    “술이 고프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여느 때처럼 단정한 옷차림의 라피스가 쟁반을 들고 있었다.

    “여독을 풀 겸 발할라 230년 포도주는 어떤지.”

    “단탈리안 전하께서 흡족해하신다!”

    역시 라피스야.

    내가 포도주를 그대로 병나발로 마셨다.

    그러자 라피스가 미리 준비한 듯 작은 꾸러미를 건넸다.

    “제레미 대장이 얼마 전에 새로 개발한 향초입니다. 그동안 쌓인 피로를 해독할 겸 시음해보는 것은 어떤지요.”

    “음. 단탈리안 전하께서 기뻐하신다.”

    나는 바로 담뱃대에 향초를 쑤셔넣어 피웠다. 끝내주었다.

    다짜고짜 뇌물로 시작한 라피스의 방문은 어쩌다보니 내 신세 한탄으로 이어졌다. 약빨에 머리가 쩌든 주제에 술까지 마신 주정뱅이였다. 당연히 말이 엉망진창으로 튀어나왔지만, 라피스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서 전부 불태워버렸지! 하하!”

    이야기는 클라이막스로.

    나는 파리시오룸 근방의 주민들을 몰살시키는 대목에 이르러 파안대소했다. 여기서도 라피스는 덤덤했다. 그녀는 내 얘기를 끝까지 듣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툭, 하고 한 마디를 꺼냈다.

    “단탈리안 님은 의도적으로 화형을 택했군요.”

    “아아. 그러는 편이 효율적이니까! 나는 역시 대단해!”

    “저는 효율성을 지적한 것이 아닙니다.”

    이야기가 시작하고 처음으로 라피스가 고개를 저었다.

    “물론 화형은 화려합니다. 그러나 잔혹해 보이는 반면에 실속은 의외로 빈약합니다. 인간을 죽이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리는 방법 중 하나가 화형이기 때문입니다.”

    “……어?”

    “일부러 '비효율적인' 학살 수단을 고르셨군요, 단탈리안 님.”

    라피스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사람들에게 극단적인 공포를 심어주는 동시에 정작 죽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납득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당연한 사실을 읊조리듯이.

    “무척이나 단탈리안 님답습니다.”

    “…….”

    나는 입을 다물었다.

    비어버린 술잔에 라피스가 포도주를 따랐다. 나는 말없이 술을 마셨다. 다시 라피스가 포도주를 따랐다.

    “……라피스.”

    “예, 단탈리안 님.”

    “나는 그런 말을 싫어해.”

    라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말했어?”

    “술주정을 받아주는 사람의 특권이라고 해두겠습니다.”

    “…….”

    나는 한숨을 쉬면서 술을 받아 마셨다.

    그후로 한참이나 우리 둘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런 거다.

    세상에는 이런 녀석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단탈리안 님.”

    “응?”

    “니블헤임에서 엄청난 양의 청구서가 날아왔습니다. 수천 리브라 수준이 아니더군요. 단탈리안 님의 재상이자 재무상서로서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저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어? 어, 그건. 그러니까.”

    “단탈리안 님이 바깥에 전쟁하러 돌아다닐 때 저는 마왕성에서 홀로 동분서주하며 어떻게든 재정의 건전성을 확보하려 안간힘을 씁니다만, 정작 나가는 곳은 따로 있군요. 제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부디 말해주시길.”

    “…….”

    “…….”

    “죄, 죄송합니다.”

    “놀랍군요. 단탈리안 님은 제가 단탈리안 님에게 사과를 듣기 위해서 지금까지 이렇게 말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재상이자 재무상서인 제가, 재정의 출처보다 단탈리안 님의 사과 한 마디를 더 중요하게 여기리라 생각하시는지요?”

    “…….”

    “저는 그저 순수히 의문을 표명했을 뿐입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이 청구서들은 대체 무엇입니까.”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라피스의 잔소리는 평균적으로 다섯 시간에 달한다는 말만 덧붙이겠다.

    내 돈을 내가 썼을 뿐인데.

    세상은 놀랍도록 부조리하다.

    ============================ 작품 후기 ============================

    - 챕터 <이 대륙에서 오직 두 명>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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