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09화 (309/510)
  • 00309 이 대륙에서 오직 두 명  =========================================================================

    “내가 미리 조사해보니 프랑크에서 이자율이 보통 1할 정도 되더군.”

    담뱃대를 쥐어서 불을 지폈다. 싱그러운 향기가 입안에 감돌았다.

    “이제 막 들어선 정부가 감당하기에는 조금 이자가 세지. 자네가 4푼 정도의 이율로 빌려주겠다고 하면 감사하다며 받을 것일세.”

    “으…….”

    이바르가 몸을 꿈틀거렸다. 아마도 일어서려고 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바닥을 짚은 손에서 힘이 빠져 다시 바닥에 나뒹굴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서 이바르를 침대 위로 끌어당겼다.

    소녀는 살결이 땀으로 투명하게 반들거렸다. 흡혈귀는 마왕과 비슷한 점이 있었다. 바로 체액에서 별다른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으니 기분 좋은 살내음이 풍겨왔다.

    “이바르. 자네의 몸에서 좋은 향기가 난다.”

    “……4푼은 너무 적습니다.”

    이바르가 모기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적어도 7푼은 받지 않으면 얘기가 안 되옵니다.”

    “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와중에 돈계산은 철저하군. 좋다. 장사에 관해서 자네를 따를 자가 어디 있겠는가. 마음대로 해라.”

    이바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검소하시군요.”

    “응, 검소? 내가?”

    전혀 나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등장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바르 로드브로크는 마계를 통틀어서 제일 갑부였다. 그런 재벌이 보기에는 내 씀씀이도 별 것 아니라는 것일까.

    “이래 봬도 상당히 돈을 펑펑 쓰고 다닌다고 생각한다만.”

    “씀씀이와는 약간 별개의 문제입니다. 전하께서 지금까지 주로 투자하신 것을 살펴보면 마왕성, 영지, 뇌물, 군보급입니다. 반면에 옷이나 장신구에는 무관심하십니다.”

    아마도 이바르는 나에게 사치를 부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담뱃대를 보여주었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피는 연초만 해도 엄청나게 비싼 상품이라네. 연금술사에게 의뢰해서 손수 만들어낸 향초이지. 자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마왕 단탈리안은 누구보다 사치를 즐기는 놈이야.”

    “실례하오나, 그것이 핵심입니다.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바르가 내 왼손의 새끼손가락을 매만졌다.

    내 왼손에는 중지와 약지가 없었다. 결함품이 되어버린 왼손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이바르는 좋아했다. 어떤 유아기적인 욕구가 투영됐는지도 몰랐다.

    “사치란 사람들이 알아보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마약이나…….”

    “연초.”

    “……연초나 술에는 어마어마하게 돈을 쓰시면서 정작 타인의 눈에 띄는 품목에는 이상하리 만치 인색하십니다. 당장 이 옷만 해도 그렇습니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뒹구는 옷가지를 이바르가 집어서 펼쳤다.

    “하의와 똑같이 상의도 검은색 일색, 벌써 몇 년째 입었는지 군데군데 낡았고……옷차림에 대해 완벽하게 무관심한 사람만이 이런 누더기를 입을 것입니다.”

    “누, 누더기?”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어깨가 좁으시고 살집도 없어서 제대로 맞춘 옷을 입지 않으면 매우 볼품이 없게 되옵니다.”

    “…….”

    왜 시트리도 그렇고 나랑 친한 여자들은 죄다 내 스타일을 씹어댈까. 서럽다.

    “전하의 품격을 심각하게 손해시키는 것이지요.”

    이바르 로드브로크가 매와 같은 상인의 눈으로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라피스 라줄리는 반쯤 전하의 가신으로 들어갔으면서 왜 이런 것도 신경 쓰지 않는지. 저희 상회의 이름을 먹칠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나를 올려다보았다.

    “저기……그래서 삼가 아룁니다만, 전하. 마침 전역도 종료되고 무도회들도 대강 끝났으니 말이옵니다.”

    드물게도 이바르는 우물쭈물거렸다.

    “전하께서도 시간이 다소 널럴하시다면……소인의 말은 만에 하나 전하께 폐가 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음? 뭔지 몰라도 상당히 뜸을 들이는군.”

    내가 연초를 한 모금 깊이 빨았다.

    “후우. 자네와 나 사이이지 않는가. 웬만한 부탁일랑 전부 들어줄 심산이야. 마침 자네도 프랑크와 관련해서 내 청탁에 응해주었으니, 자아. 부담 갖지 말고 말하게나.”

    “…….”

    본디 거래란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어야 하는 법. 나는 진심이었다.

    그러자 이바르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어째서인지 얼굴이 살짝 붉었다. 그녀는 각오를 정했는지 나를 정면에서 바라보며 말했다.

    “호, 혹시 소인이 전하에게 맞는 옷을 골라드려도……괜찮으련지요!”

    “…….”

    뭐시라.

    “저, 그러니까, 향후에도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저희 상회와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시리라 생각하옵고, 단탈리안 전하를 이런저런 방면에서 지원하는 것 또한 상회의 임무라고 해야 할까, 기본적인 후원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연초를 피는 것도 잊어버리고 멍하게 이바르를 바라보았다.

    이바르는 그런 내 시선을 깨닫고 더더욱 허둥거렸다. 피부가 새하얘서 유독 붉어진 뺨이 도드라져 보였다.

    “소신의 의무임에 마땅하므로, 결단코 다른 목적이나 의도가 있는 게 아니오라, 다시 말해서, 가는 날이 장날이오니, 또 전하께서 모처럼 여유로운 한때를 즐기시고 계시니까, 이참에 눈에 밟히던 짐을 풀어볼 생각에…….”

    “귀, 귀여워.”

    “……네? 소인이 잘못 들었사옵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이바르를 꾸욱 껴안았다.

    “어떻게 이토록 순수할 수가!”

    “하, 하아?”

    “그래! 바로 이거다! 나는 이걸 원했다!”

    순수함!

    연인끼리 데이트 한번 나가자고 말을 꺼내는 것조차 부끄러워 하는――압도적인 순수함!

    바르바토스 년은 데이트하자고 콧노래 부르면서 나가면 무슨 생뚱맞은 레즈비언 전용 창관이나 데려가고, 라우라는 하도 발랑 까져서 뭘해도 심드렁하고, 파이몬은 만날 우후후 여유로운 어른의 미소나 짓는데다, 가미긴은 뭘 조금만 해줘도 자기가 본처인 것처럼 살벌한 분위기를 풍겨댄다.

    유일하게 시트리가 부끄러움을 타긴 한데, 조금 이상하다.

    잔뜩 부끄러움을 타는 주제에 정작 나를 데려가는 곳은 SM 클럽이다. 여고생처럼 순수하면서 놀아재끼는 수준은 음흉한 아저씨의 볼기짝을 6비트로 후려갈긴다. 말이 안 된다.

    허나 이바르 로드브로크를 보아라.

    데이트의 목적이 단지 연인한테 멋진 옷을 사주는 것이다!

    “얼마나 건전한가. 얼마나 순수한가…….”

    나는 이 비눗방울처럼 부드러운 존재에 눈물을 흘리며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전하, 왜 지금 옥루(玉淚)를 흘리시고 계시옵니까. 소인은 당황스럽나이다.”

    “이바르 로드브로크. 실로 자네는 보석과도 같이 아름답다.”

    “네, 네에?”

    이바르는 숫제 귀까지 빨개졌다.

    “바야흐로 어둠이 군림하는 시대. 한때 빛이 가득했을 대지에 지금은 음흉한 계략과 위선만이 횡행하니, 나 단탈리안, 순수함을 찾아 해매는 한 명의 음유시인으로서 통탄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노라.”

    “…….”

    왠지 모르게 이바르가 '그건 전적으로 전하 때문이 아니온지'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지만 무시했다.

    “이 자리에서 그토록 찾아 해맨 보물을 발견하니 너무나 기뻐 내 두개골이 승천해버릴 지경이구나. 옷이라고? 아아, 얼마든지 사주겠다. 이브닝 드레스, 파티 드레스, 아니, 반지에다 목걸이까지 아무거나 골라 잡도록.”

    “저, 전하. 제가 아니라 전하의 것을…….”

    이바르가 뭐라 꾸물거렸지만 이번에도 무시했다.

    나는 터프하게 선언했다.

    “오늘 니블헤임은 그대가 전세를 놓았다!”

    내 지갑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쫌생이거든.

    그러나, 일단 한번 열리면 카오스 워프가 개봉박두한다.

    나는 이바르의 손목을 붙잡고 이제부터 남극을 정복하겠노라고 외치는 아문젠 탐험대장처럼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자아. 나가자, 이바르 로드브로크! 마계의 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이라.”

    “자, 잠깐만요. 전하. 옷은 입고 나가야…….”

    우리는 상회 건물을 뛰쳐나갔다. 두 사람 모두 잠옷 차림이지만 상관없었다. 정확하게 말해, 이바르가 제발 옷 차려입을 시간만큼은 허락해달라 외쳤지만 한귀로 흘려보냈다. 나는 도시에서 제일 값비싼 마차를 불렀다.

    “이 도시에게 유명한 옷가게로.”

    나는 마차에 올라타서 행선지를 밝혔다.

    엘프 마부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느 정도로 유명한 가게로 안내해드리올까요, 전하?”

    “물론, 제일 비싼 곳이다.”

    “분부를 받드옵니다.”

    마차가 미동조차 없이 미끄럽게 니블헤임의 거리를 쏘다녔다.

    우리는 옷 디자이너의 가게부터 순례했다.

    “어머나, 이렇게 아름다운 손님은 처음이옵니다. 전하의 비밀 애인이신지요?”

    “아? 나, 나는…….”

    디자이너의 질문에 이바르가 버벅거렸다. 내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래. 본인이 이번에 새로 얻은 연인이다. 모쪼록 성의를 보여라.”

    “꺄아! 역시 단탈리안 전하입니다. 어쩌엄, 나쁜 남자의 표본이라니까!”

    이미 유명인사가 된 내 얼굴을 모르는 마족은 없었다. 옷가게 주인인 서큐버스가 호들갑을 떨면서 이바르에게 어울리는 디자인의 표본을 들고왔다.

    “어여쁜 아가씨. 전부 최상급 소재로 짠 옷들이에요. 어때요? 최신 유행을 반영하면서도 고전적인 멋을 포기하지 않은 게 장점이죠.”

    “하, 하아.”

    “너무 얌전한가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뒤를 돌려보면, 어머나! 등이 훤하게 파여서 섹시한 멋까지 잡았답니다. 아가씨처럼 어리면서도 묘하게 성숙한 매력을 뽐내는 여자한테 딱이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음. 좋군.”

    이바르가 주인의 기세에 밀려 아무 말도 못하는 사이, 내가 쿨하게 말했다.

    “구입하지.”

    “단탈리안 전하, 멋져!”

    주인의 눈동자가 금화처럼 번쩍거렸다.

    “그럼 여기 야외용 드레스는 어떤가요. 아니면 이 무도회 전용 드레스라던가. 잠자리에 특화된 이 드레스도 역시 놓칠 수가!”

    “후우.”

    나는 진득하게 담배 연기를 피워올렸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가게 진열장을 쓰윽 훑었다.

    “저쪽에서 이쪽까지 전부.”

    “꺄아아아!”

    인생 대박이 터져 실신해버린 옷가게 주인을 뒤로 하고, 마차는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목걸이 가게의 고블린 주인이 굽신거리면서 입구부터 마중을 나왔다.

    “위명은 익히 들었사옵니다, 전하. 오늘 전하를 손님으로 맞이하게 되어 전에 없는 영광입니다.”

    “이 아가씨한테 잘 어울리는 목걸이를 추천하게.”

    “오호.”

    고블린이 외알 안경을 들어올렸다. 장인의 눈초리가 빛났다.

    “살결이 하얀데다 목선이 예쁩니다. 쇄골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군요. 이분에게 입혀진다면 필시 목걸이도 기뻐하겠지요. 전하, 어떤 종류의 보석을 선호하시옵니까?”

    “주문을 잘못 알아들은 모양이로군.”

    내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 아가씨한테 잘 어울린다면 어떤 목걸이든 추천하라고 말했네.”

    “어, 어떤 목걸이든지 말입니까, 전하?”

    “아아. 어떤 목걸이든지.”

    고블린 주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동자에서는 어느새 장인의 신중함이 사라지고 상인의 탐욕이 무지개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송구합니다. 소인이 미처 전하의 의중을 깨닫지 못했군요. 바로 대령하겠나이다.”

    고블린이 조수와 함께 헐레벌떡 어딘가를 다녀왔다.

    “여기 있습니다. 올발라 지옥에서 캐낸 최상급 원석으로 이루어진 목걸이들로서, 전부 마계에서 이름난 장인들이 수 년에 걸쳐 만들어낸 최상등품입니다. 자아. 아가씨께서는 이것부터 착용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열 개쯤 되는 목걸이를 이바르가 하나씩 입어보았다.

    “어떤 게 마음에 드십니까, 마드모아젤?”

    “나는……딱히 아무거나.”

    이바르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이바르 로드브로크에게 니블헤임은 자기집 앞마당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본연의 신체로 돌아다니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물며 여성 전용의 옷가게나 장신구점을 들리는 것은 상상해본 적도 없겠지.

    연인이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면 그것을 대신해주는 것이 파트너의 역할.

    나는 입에서 파이프를 때고 말했다.

    “여기 있는 물건들 전부로 하지.”

    그날, 니블헤임에서 총 아홉 명의 상점주인이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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