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08화 (308/510)
  • 00308 이 대륙에서 오직 두 명  =========================================================================

    *  *  *

    베르시 백작은 요즘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다.

    작위가 남작에서 백작으로 올랐다. 한발 더 나아가서 제국 법무상(法務相)에 임명되었다. 제국에서는 황제, 재상, 바로 그 다음 순서가 법무상이었다. 단번에 정부의 실세로 뛰어오른 것이었다.

    하물며 현재 프랑크에는 황제도 재상도 부재했다. 황제 앙리 3세는 죽었다. 재상은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가 임시로 대행했다. 지금은 두 사람 모두 사라졌다.

    황태후 폐하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얼굴 마담, 상징적인 면모가 강했다. 게다가 황태후는 이제 늙었다. 정부의 수장은 누가 봐도 베르시 백작이었다.

    일개 준남작에서 제국의 실질적인 행정 책임자로 급무상……가문의 영광이라 칭송해도 좋겠지. 하지만 베르시 백작은 솔직하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이게 어딜 봐서 제국이라는 말인가…….”

    서류를 뒤집으면서 베르시 백작이 이마를 짚었다.

    서류에는 프랑크 제국의 사정이 적혀 있었다. 단순히 상황이 안 좋다고 표현할 만한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재무, 법무, 군무, 어느 한 분야를 따질 것 없이 엉망진창이었다. 최악. 두 글자가 백작의 뇌리에 어른거렸다.

    “안 되겠군.”

    베르시 백작이 손을 놓았다.

    더 이상 서류를 읽다가는 두개골이 폭발해버릴 것 같았다. 세 시간도 자지 못하는 생활이 벌써 며칠째 이어졌을까. 나흘, 닷새, 엿새……베르시 백작은 보름까지 세다가 관두었다.

    “도대체 뭐하는 것인지.”

    백작이 자조했다. 아무래도 머리까지 이상해진 모양이다…….

    베르시 백작은 등받이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피로감이 엄습했다. 이대로 조금만 쉬자, 하고 그가 눈을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집무실 바깥에서 시종이 말했다.

    “각하. 황태후 폐하께서 드시옵니다.”

    “음.”

    베르시 백작이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순간적으로 손수건을 꺼내들어 얼굴을 휙 닦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단추를 여미고 상의를 평평하게 폈다. 모든 동작이 끝나기까지 걸린 시간이 5초.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는 데 2초.

    “어서 안으로 모시거라.”

    그야말로 완벽한 동작이었다.

    문이 열리고 노년의 여인이 집무실에 들어왔다. 베르시 백작은 그녀에게 다가가서 한쪽 무릎을 꿇으려 했지만, 여인이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예는 생략하지요, 백작. 안 그래도 피곤할 텐데.”

    “황송하옵니다.”

    베르시 백작이 의자를 꺼내기도 전에 황태후는 척척 걸어와서 앉았다. 왕실의 여인은 나이가 들수록 예법에 엄격해지기 마련인데 황태후만큼은 예외였다. 아마 천생이 여장부로 타고났으리라.

    “상황은 어떤가요?”

    거두절미하고 본론인가. 베르시 백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말씀드려 무척 나쁩니다.”

    “하. 사양을 모르는 남자로군요, 그대는.”

    “송구합니다.”

    황태후가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진심으로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집무실에서는 온화한 공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요 한 달, 백작은 황태후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쓸데없는 격식을 경멸하고, 말이 험하지만 높은 긍지를 품은 여장부……그것이 세 명의 황제를 낳은 황태후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였다.

    “폐하. 귀족들은 어떻습니까.”

    “말도 마세요. 잃어버린 영지를 되찾아달라, 가문을 복권해달라……브르타뉴가 있을 때는 조용히 닥치고만 있던 돼지들이 파렴치하게도!”

    베르시 백작이 또 무심코 웃어버렸다. 목소리의 어조는 완벽히 예법에 들어맞게 고급스러운데 정작 저잣거리 왈패처럼 말이 험했다. 생소한 말투인데도 황태후한테 묘하게 잘 어울렸다. 옛날에 막연히 상상하던 것보다 황태후는 훨씬 더 대화하기 즐거운 여인이었다.

    황태후가 미간을 좁혔다.

    “제 말이 거짓처럼 들리나요? 농담이 아니에요. 하루에 접견을 신청하는 어중이떠중이의 숫자가 일흔 명이 넘어요. 백작, 이건 노인 학대예요.”

    “브르타뉴의 압제 아래에 풍비박산 난 가문이 많다는 뜻입니다, 폐하.”

    “그건 나도 알아요.”

    황태후의 눈매가 진지해졌다.

    “하지만 백작. 저는 그 치들을 얌전히 복권시켜줄 생각이 없어요. 그들은 나라와 황실이 위험에 빠졌을 때 외면했지요.”

    “그 말씀은…….”

    “의무를 망각한 작자들한테 작위와 영지 따위는 과분하지요. 안 그래요?”

    베르시 백작이 침을 삼켰다.

    브르타뉴는 수많은 귀족들의 영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광대한 토지가 황실의 소속이 되었다. 당연히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강력한 브르타뉴군의 군화에 짓밟혔다.

    파리시오룸에 신생 정부가 들어선 지금, 살아남은 귀족들이 예전의 명예를 회복시켜달라 성화였다. 황태후는 그걸 부정하고 있었다.

    “의외로 표정이 안 좋네요. 저는 백작이 공화주의자라 들었는데.”

    “……폐하. 참으로 송구하오나, 만일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소신에게는 이를 감당할 여력이 없습니다.”

    파리시오룸 일대의 경비조차 바타비아 공화국군에 일임하고 있었다. 그들은 앞으로 1년 동안 무상으로 경비를 서주겠다고 했지만, 아무렴 반란을 진압하는 데까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터.

    “내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습니다. 프랑크의 만 백성이 평화를 염원하고 있나이다. 국가를 재건하는 데 있어 귀족들의 협력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제가 사재를 털겠어요.”

    황태후가 단호하게 말했다.

    “공화국군에 웃돈을 얹어주면 기꺼이 참전하겠지요.”

    “…….”

    황태후의 의지는 굳건해보였다.

    “백작. 달리 생각하면 이건 기회예요.”

    “기회, 말입니까.”

    “현재 프랑크에는 공작이 한 명도 없어요. 브르타뉴의 여왕한테 모조리 주살당했지요. 백작과 남작도 이전에 비하면 소수이지요. 일찍이 귀족의 세력이 이토록 약해진 시대가 있었나요?”

    아무래도 황태후에게는 그저 공화주의적인 사고방식 이외에도 다른 생각이 숨은 듯했다. 베르시 백작이 귀를 기울였다.

    “아닙니다, 폐하. 확실히 귀족의 세는 약화되어 있습니다.”

    “지금 와서 귀족들을 다시 복권시켜주면 어떻게 되겠나요? 브르타뉴한테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고자 할 거예요. 그리고 재화를 쥐어짜낼 곳은 하나뿐이지요.”

    “……영지민을 혹독하게 수탈하겠군요.”

    황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백작? 평화를 바라는 것은 옳아요. 하지만 귀족들에게 협조하면 도리어 백성들이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면 이젠 백성이 반란을 일으킬 거예요.”

    “귀족이 반란을 일으키느냐, 농민이 반란을 일으키느냐……그 차이밖에 없는 것입니까.”

    베르시 백작이 신음했다.

    확실히 옳은 판단이다. 귀족이든 백성이든 지난 몇 년 동안 지나치게 힘든 시기를 보냈다. 폭발하기 일보직전이겠지. 내란은 피할 수 없다.

    “어차피 일어날 반란이라면 프랑크의 미래를 염려하는 편이 낫지요.”

    “…….”

    “저는 의무도 모르는 돼지들에게 미래를 걸지 않겠어요.”

    이제 예순 살이 된 노년의 여인은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침묵이 흘렀다. 잠시 뒤, 황태후가 시선을 거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제국이 이렇게 몰락한 것은 제 잘못이에요.”

    “폐하?”

    “사르데냐 왕국에서 시집을 올 때는 자신만만했어요. 훌륭한 황제를 낳아서 누가 봐도 부러운 궁정과 나라를 가꾸겠다고……저는 실패한 어머니였지요.”

    너무나 참담한 어조에 베르시 백작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아들은 엄하게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명군이 될 거라고. 하지만 제 자식들은 하나같이 소심하게 자라났지요. 너무 엄격하게 키운 탓이에요……. 프랑크가 불운에 빠진 것은 궁극적으로 제 잘못된 교육에서 비롯합니다.”

    “…….”

    “황실은 더 이상 나라를 지탱하지 못해요. 대다수의 귀족도 마찬가지예요. 제 남은 사명은 어리석은 황실도, 잘못된 귀족도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나라를 남겨주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베르시 백작이 고개를 떨구었다.

    어째서 눈앞의 여인이 괴로워해야 하는가. 백작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납득할 수 없었다. 그녀는 조금 더 행복한 가정, 조금 더 훌륭한 신하를 곁에 두어도 마땅한 인간이었다. 충분히 그래도 될 만큼 고귀한 여인이었다…….

    이 순간, 백작은 다시 한 번 내전을 결의했다. 옛날에는 내전을 일으킨 황제와 브르타뉴 여왕에게 분노했다. 그러나 이제는 백작 스스로 내전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쟝 볼레 사제가 말한 그대로였다. 더 이상 방관자로 남기란 불가능했다. 프랑크의 미래, 민중의 미래를 위해서 자신은 희생되어야만 했다.

    역사에선 자신을 기껏 찾아온 평화에 다시 전쟁을 일으킨 자라 기록하겠지. 귀족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원망할 테고, 백성들도 독재자로 취급할 것이다. 명예도 무엇도 없다…….

    하지만 언제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자신을 끌어주는 목소리가 있었다.

    “백작. 제 마지막 남은 의무에 동참해주겠어요?”

    “예, 폐하. 소신의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  *  *

    “하아, 흐윽……하아.”

    거친 숨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이바르 로드브로크였다.

    쿤크스카 상회의 본부에 마련된 침실. 그곳에서 이바르와 나는 알몸으로 뒹굴고 있었다. 막 전반전을 끝낸 참이었다.

    이바르는 흡혈귀 주제에 밤일에 무척 약했다. 서른 번 정도 절정했을 뿐인데 벌써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연분홍색 입술에는 옅은 침자국이 흘렀다. 오랜만에 자서 그런 것일까. 오늘은 특히나 감도가 좋았다.

    “전……하. 더 이상은, 흐윽. 더는.”

    “왜 그러나, 이바르. 벌써 항복인가? 밤의 일족이라는 이름이 울겠군.”

    내가 장난스럽게 속삭이면서 귓볼을 물었다.

    “하윽!”

    이바르의 자그마한 몸이 부르르 떨었다. 약하게 절정에 달했다.

    그녀의 주름살이 바싹 내 성기를 조였다. 마치 주름 하나하나가 빨판이 되어 들러붙는 듯한 감촉이었다. 크으, 하고 나도 모르게 헛숨을 흘렸다. 명기였다. 이바르의 육체는 주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탐욕스럽게 색을 구걸했다.

    나는 이바르를 품안에 안고 허리를 놀렸다. 침대에 걸터앉아 이바르를 정면에서 껴안은 자세였다. 이쪽에서 깊숙하게 찔러넣을 때마다 이바르의 작은 몸집은 힘없이 들썩거렸다.

    “전하……전하, 흐윽, 전하…….”

    이바르가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뭔가라도 잡지 않으면 버티지 못한다. 그런 느낌이었다. 이바르의 양다리가 내 허리를 휘감았다. 꽤나 귀여웠다.

    그렇게 달라붙을수록 오히려 내 물건이 깊은 곳을 두들기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나는 짖궂게 미소를 지었다.

    “로드브로크 상주. 갈 것 같은가?”

    “흐읏, 예……가요……으으읏, 벌써, 벌써 몇 번이나……!”

    “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면 천천히 하겠네. 프랑크의 신생 정부가 귀족들과 한판 대결을 각오한 모양이야.”

    이바르가 물기에 젖은 눈망울로 나를 쳐다보았다. 뜨겁고 갸날픈 숨결이 그녀의 입술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네, 흐으응……흐읏!”

    “가뜩이나 돈이 부족한 신생 정부야. 전비를 감당하기에는 이만저만 부담이 되겠지. 어떤가? 바타비아 공화국을 경유해서 프랑크에 돈을 빌려주는 것이.”

    “아, 하으……전하, 잠깐만, 흐으으읏! 또, 흐윽, 아까 전에 갔는데……!”

    나는 속도를 높였다. 이바르가 신음을 터트렸다. 얼굴이 뒤로 젖혀지면서 하얗고 여린 목이 드러났다.

    “아, 아, 아! 싫어, 흐아아앙! 왜, 계속……!”

    “제국에 빚을 만들어두는 것이다. 나중에 요긴하게 써먹을 날이 오겠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로드브로크.”

    “으으, 하응, 흐으으읏……아……!”

    이바르가 경련했다. 마비가 온 것처럼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시험 삼아서 팔뚝을 풀어주었다. 금발의 소녀는 마치 실이 끊어져버린 인형처럼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힘없이 내팽개쳐졌다.

    “…….”

    이바르가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도 소녀의 몸은 압도적인 쾌감이 남기고 간 여진에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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