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06 이 대륙에서 오직 두 명 =========================================================================
학살 사건 자체는 무척 쉽게 해결되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내가 쉽게 해결했다.
엘리자베트의 노림수는 요약해서 다음과 같았다. '학살을 인정할 수도 없고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다.' 하지만 내가 수단과 방법을 그다지 편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엘리자베트는 간과했다.
원정에 참여한 인간군 중에서 적당한 중대장을 한 명 골라잡았다. 사령부에서 호출하니 지휘관은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찾아왔다. 나는 대뜸 중대장에게 말했다.
“우리군은 현재 제법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유를 알고 있는가?”
“소, 송구합니다. 소관은 전혀.”
앞에 선 남자는 비교적 계급이 낮았다. 아직 학살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겠지.
“정체불명의 군대가 우리군을 표방하며 프랑크 남부에서 약탈을 행했네. 이게 꽤나 악질적이어서 말이지, 남부의 장관들이 단단히 화가 났다고 하더군. 우리군에게 학살의 책임을 지라며 성화라네.”
“하…….”
중대장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자신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문제는 우리가 책임을 지고 싶어도 질 사람이 없다는 것일세. 정말로 우리가 저지른 학살이 아니니까. 그러나 만일 모르쇠로 일관한다면 장관들은 더더욱 가열차게 우리를 비난하겠지. 이해하겠는가?”
“예, 예에. 어떻게든.”
“모처럼 프랑크에 우리한테 우호적인 정권이 들어섰다. 초장부터 사이가 냉냉해져서야 농담도 뭣도 아니야. 우리는 정치적인 행동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중대장이 난감한 듯이 미간을 좁혔다.
내가 손에 깍지를 끼면서 말했다.
“요는 책임감 있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실제로 책임을 지느냐 마느냐는 중요치 않아. 파리시오룸의 정부에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도 태도이다.”
“…….”
“자네. 슬하에 딸린 가족이 많더군.”
지휘관이 눈을 깜빡거렸다.
“예?”
“부모와 자식들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게. 우리가 잘 보살펴주겠네.”
내가 눈짓하자 시트리가 검을 빼들었다. 중대장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으나, 서서히 경악으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중대장이 곧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가, 각하. 저는 정말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알고 있네. 자네는 완벽하게 무죄일세.”
시트리가 성큼성큼 지휘관에게 다가갔다.
“죄는 자네가 아니라 내가 저지르는 것이지.”
중대장이 비명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칼날이 그의 목을 단번에 잘랐다. 바닥에 핏물이 튀었다. 첫 번째 희생양이 마련되는 순간이었다.
그날, 지휘관이 이끌고 있던 중대가 풍비박산 났다. 기병대 중대 여든일곱 명이 문답무용으로 잡혀왔다. 나는 중대장에게 얘기한 것처럼 똑같이 중대원들에게 설명했다. 여든일곱 명의 인간 병사는 꼭 상관처럼 의아해하다, 나중에 가서 사색이 되어 울부짖었다.
“제, 제발 살려주십시오!”
“돈은 안 주셔도 됩니다……이미 충분히 벌었으니, 목숨만……!”
“왜 저희가 죽어야 하는 겁니까!”
이건 설득이 아니라 단순히 명령이었다.
내 지휘 아래 철저히 살육이 행해졌다. 이번에는 화형 따위가 필요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죽이는 게 목적이었다. 반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여든일곱 개의 수급을 얻었다.
수급들에 소금을 뿌려 파리시오룸에 전달했다.
우리군은 프랑크 남부에서 불미스럽게 행해진 사태에 대하여 매우 깊은 유감을 표명했으며, 철저한 조사 끝에 불법적인 약탈을 저지른 주범을 밝혀냈다. 이들은 분견대로서 사령부의 의사를 교묘하게 왜곡. 명령이 내려진 적도 없는 약탈과 학살을 저질렀다…….
우리군은 비록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나 이에 대한 책임에서 회피하지 않겠다. 아직 색출하지 못한 죄인을 지속적으로 수사해서 밝히겠으며, 잡히는 대로 파리시오룸에 이송하겠다.
대충 그런 해명을 내놓았다.
브르타뉴군에게 빼앗은 재화를 남부의 장관들에게 원없이 뿌린 것은 덤이었다. 대대적인 매수가 들어가자 장관들은 천천히 입을 닫았다.
프랑크의 신생 정부와 우리군의 밀월관계는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나는 격언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피는 결코 물로 씻을 수 없다. 오로지 피만이 같은 피를 씻겨낼 수 있다, 라고…….
엘리자베트는 훌륭했다. 학살을 모방해서 이쪽의 정치적인 분열을 꾀하다니, 웬만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떠올릴 수도 없는 발상이었다. 하물며 발상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인간은 엘리자베트 정도밖에 없겠지.
하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서 확실히 깨달았을 거다. 나는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쪽이 모략을 걸어온다면 나도 똑같이 모략으로 받아주겠다. 내가 학살을 일으켰기에 그대도 학살을 자행했는가?
그렇다면 좋다. 더 학살하자. 피로 피를 씻자. 그 피를 다시금 피로 씻는 연옥을 연출하도록 하자.
어느 한쪽이 포기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끝나지 않는 연옥이다. 나와 함께 춤을 추려면 연옥에서 왈츠를 추는 정도의 배짱은 보여야 한다, 엘리자베트. 내가 편식 따위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확실히 깨달아라.
* * *
통령 집무실은 오늘도 우중충했다.
공화국 외무상서 볼프람 하델베르크는 집무실에 들어서며 한숨을 쉬었다. 방 저편. 엘리자베트가 창가에 서서 하염없이 창문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각하. 서류입니다.”
“…….”
대답이 없었다. 지난 달, 비밀스러운 행차에 다녀온 뒤로 통령 각하께서는 우울해졌다. 말수가 부쩍 줄어들었다. 지금도 그러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마냥 엘리자베트는 창문 너머만 바라보았다. 뚝, 뚝, 하고 빗소리가 방안에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창문에 미끄러져 흘러내리는 빗물을 그녀는 멍하게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덧없고 처연해서.
신기루처럼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이 무슨 불길한 상상인가.’
하델베르크가 고개를 흔들었다. 하델베르크는 목소리를 조금 더 키웠다.
“통령 각하.”
“……아아? 외무상서로군.”
그제서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다. 요즘은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어.”
“후우. 벌써부터 노화의 기미가 보이는 것 아닌지 소신은 걱정입니다.”
“과일처럼 싱그러운 처녀에게 못하는 말이 없군.”
엘리자베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델베르크가 보기에는 그 미소마저 흐릿했다.
“각하. 공화국의 대소신료가 각하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
“물론 각하께서 프랑크의 사건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시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합니다.”
하델베르크는 엘리자베트의 비밀 임무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는 극소수의 인물이었다. 통령은 프랑크에서 대대적인 약탈을 일으켰다. 그것이 우울증의 원인이라고 하델베르크는 판단했다.
“하지만 각하께서는 공화국의 통령이십니다. 일국의 얼굴이시지요. 소신이 감히 마음을 다잡으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일국의 얼굴인가.”
엘리자베트가 또다시 멍하게 중얼거렸다. 명백히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다.
“볼프람. 합스부르크 섭정국에서 일주일 전 밀서를 보내왔다.”
“예?”
“편지에는 단 한 글자밖에 적혀 있지 않았다……천하(天下)라고.”
천하.
하이델베르크가 눈썹을 쨍그렸다. 섭정국에서 밀서를 보내는 것 자체가 극히 생소했지만 편지 내용은 더더욱 이상했다.
“무슨 암호라도 되는 것일까요, 각하?”
“암호가 아니다. 저쪽은 프랑크 남부에서 학살을 행한 장본인이 나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야.”
“…….”
하이델베르크의 표정이 더 구겨졌다. 학살 작전에는 공화국의 상층부가 총력을 기울였다. 겨우 천오백 명의 군사에 불과했으나 그만한 병력을 극비리에 운용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만큼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공화국의 국민은 물론이고 각료들도 대부분 몰랐다. 어떻게 섭정국에서 진실을 알아냈는가?
“아마도 단탈리안이겠지.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마족 병사를 고용했어야 했다. 그러면 단탈리안도 학살의 주범이 마왕인지 나인지 쉽사리 판단하지 못했을 것이다.”
“…….”
“실수였다. 난쟁이 용병들을 고용한 다음 일이 끝나면 입막음을 시키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하지만, 과연 마족을 신뢰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그것이 실수였다…….”
엘리자베트가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단탈리안은 나를 조롱한 것이다. '보라, 이것이 그대가 원하던 천하이다. 천하를 내려다보며 가지고 노는 기분은 어떤가.' 그리 묻는 게야.”
“…….”
“우울하군.”
엘리자베트는 시선을 돌려 다시 창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예전에 나는 천하를 재패하는 것이야말로 지고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믿어 의심치 않았지. 그 와중에 수없이 절망할지라도 천하 자체는 아름다운 꿈이라 여겼다. 이제서 깨달았다. 천하에는 어떠한 아름다움도 없어.”
“……각하.”
“대륙 만민을 속이고 우롱한다.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피바람을 일으킨다. 존재하는 것은 기만과 술수뿐이다.”
엘리자베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자조하는 미소였다.
“하긴, 로베르트를 죽였을 때부터 이미 깨달았어야 하거늘. 멍청한 것은 나인가……. 루돌프 오라버니는 권력을 위해 언니들을 간살했다. 나도 마찬가지였지. 도대체 오라버니와 나 사이에 무슨 차이점이 있는가. 나는 도대체 지금까지 뭘 보면서 살았나…….”
하델베르크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각하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때때로 목적을 달성하려면 희생을 치루어야 하는 법이었다. 지도자의 의무는 희생을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믿었다. 하지만 거기에 잘못이 있다는 것일까?
“각하. 그럴수록 우리는 좋은 국가를 만들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희생자들의 무덤에 우리가 바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입니다.”
“……죽은 자에게 국가는 필요없네. 평화와 번영을 이루어낸다 한들 희생자들에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자기 변명, 자기 위안밖에 되지 않는다.”
엘리자베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것이 단탈리안이 바라보는 천하로군. 음울한 회색의 세계이다. 낭만과 이념이 없으며, 오로지 조소와 복수만이 유령처럼 돌아다닌다. 단탈리안에게 대륙이란 거대한 무덤이요 위령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지.”
“…….”
하델베르크는 잘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만 지금 자신이 무슨 위안을 건네더라도 결코 통령의 마음에 닿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만은 왠지 모르게 느껴졌다.
“허나, 나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기만이라 불러도 좋다. 나 하나가 기만자가 됨으로써 국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돌려 하델베르크를 바라보았다. 황금색 눈동자에 더는 예전과 같은 패기가 없었다. 하지만 어둡게 뭉쳐져서 단단하게 굳은 시선이 그곳에 자리했다.
“하델베르크 외무상서.”
“예, 각하.”
“프랑크의 남부 도시들에 접촉을 꾀한다. 북부에 자유도시들이 들어섰다면 남부에도 들어서지 않을 이유가 없다. 섭정국이 북부를 장악한다면, 우리 공화국은 남부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하델베르크가 자신의 존경스러운 주군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즉시 연락망을 가동하겠습니다.”
“……황제가 다스리는 섭정국은 북부의 공화파를 돕고, 우리 공화국은 남부의 왕당파를 돕는가. 농담이라 치부하기에는 적이 재앙스럽군.”
엘리자베트가 가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좋다. 천하이다. 하늘 아래 연옥밖에 없다 한들, 적어도 두 명이 함께 춤을 출 공간 정도는 있을 것이다. 마음껏 어울려주마…….”
빗소리가 울리는 집무실에 엘리자베트의 목소리가 조용히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