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05 이 대륙에서 오직 두 명 =========================================================================
“…….”
나는 조용히 마왕들의 상태창을 띄웠다.
차례대로 심리상태를 읽어보았다. 전원이 결백했다. 바싸고든 마르바스든 모두 곤란해 하고 있었다. 적어도 군단장들은 뒤에서 호박씨를 까지 않았다…….
“바르바토스, 진정해라. 범인이 이중에 있다는 보장이 없다. 이번에 출진하지 않은 마왕 중에 누군가가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도 있다.”
“아몬, 발레포르……확실히. 우리에게 배신자가 있다는 것보다는 그들을 의심하는 편이 합당하겠사와요.”
마르바스와 파이몬이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는 걸 다잡았다.
설령 배신자가 있다 해도 이렇게 공공연하게 의심이 퍼지는 것은 좋지 않았다. 두 사람이 적절하게 의심을 끊어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마도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요.”
“단탈리안.”
마르바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모처럼 공기가 가라앉으려 하는데 왜 불씨를 되살리는가, 하고 마르바스의 눈이 질책했다.
마르바스. 그래서야 당장 사태를 무마할 수는 있을지라도 의심의 싹은 계속해서 남는다. 겨우 새로이 체계를 만들어낸 마왕군이다. 의심을 보다 확실하게 뿌리부터 없애버릴 필요가 있어.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번 출정에 동조하지 않은 마왕 중 누군가가 분견대를 풀었다고 해보지요. 목적이 불분명합니다.”
“우리군을 음해하려는 목적이지 않은가.”
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마족 병사를 동원했을 것입니다. 마왕군이 고삐가 풀려 제멋대로 마을들을 약탈하고 학살한다, 연합군 따위 거짓말이고 허위이다……이렇게 흘러가야 방해 공작이 성공하겠지요.”
나는 전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전령. 보고에 따르자면 마을들을 초토화시킨 것은 제국군이다. 틀림없는가?”
“예, 전하. 틀림없습니다.”
“보십시오. 마족 병사로 이루어진 부대가 아닙니다.”
“…….”
마르바스의 눈빛이 진중해졌다.
“우리 중에 정말로 배신자가 있다는 소리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분견대로 마족을 출동시켰다면 더 효과적으로 아군의 평판을 떨어트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인간군의 복장을 구해다가 병사들한테 입혔다…….”
너무 비효율적이다. 범인이 제국군으로 알려져봤자 마왕한테 이득이 될 게 없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건 마왕의 소행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마왕들이 웅성거렸다.
내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마왕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주위를 훑어보는 마왕도 있었다. 그렇지만 분위기가 확실히 조금 전보다 나아졌다. 누군가가 배신했을 가능성이 적다는 사실에 공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하지만, 그럼 누가…….”
“브르타뉴군이다. 우리와 협상하는 틈을 이용한 거야.”
“제국의 군복을 입었다 하지 않는가?”
마왕들이 삼삼오오 마주보고 수군거렸다. 대체로 앙리에타가 의심스럽다는 의견이 많았다. 마르바스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범인은 마왕이 아니다. 자네는 인간이 약탈을 저질렀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단탈리안.”
“예. 아마도 틀림없겠지요. 하지만 몇 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먼저 범인은 자유자재로 천 명의 군사를 통솔할 정도의 권력자다.
그뿐만이 아니다. 단순한 병사가 아니라 합스부르크 출신의 병사를 구할 여건까지 된다. 그만한 여유를 가진 인간은 많지 않다.
다음으로, 아군이 '절대로' 프랑크 남부에 진출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 우리군의 전략적인 목표를 정확히 꿰뚫었다는 얘기가 된다. 상당한 수준의 전략가이다. 혹은 뛰어난 정치적 안목을 지녔다고 봐야겠지.
내가 입술을 열었다.
“동지 여러분. 제가 감히 판단하기에 범인은…….”
* * *
“파리시오룸을 구원하는 것은 포기한다.”
엘리자베트 통령은 파리시오룸 근방을 직접 정찰하고 돌아왔다. 정찰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지휘관을 불러모아 단언했다.
“브르타뉴군에게는 이미 가망이 없다. 포위가 이루어진 지 벌써 이틀이 지났다. 그런데도 앙리에타 여왕은 황도를 버리지 않고 시간을 낭비했어. 전쟁은 끝났다.”
“각하. 이제 겨우 이틀째입니다. 전쟁의 결말을 예견하기에는 조금 이르지 않을까요?”
통령 제1비서 유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군. 겨우 이틀째인가…….”
엘리자베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적군의 수괴는 단탈리안이다. 그는 전쟁을 모략의 연장선으로 취급한다. 유리아, 모략이란 눈치채고 난 뒤에는 이미 늦어버린 것이다. 겨우가 아니야. 벌써 이틀씩이나 지나버렸다.”
엘리자베트가 투구를 벗었다. 하얀 머리수건에 땀이 흠뻑했다.
“어제부터 마왕군이 인간들을 화형에 처하고 있다. 죄목은 사 년 전의 학살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자를 단죄한다는 것이지. 제군.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나?”
“그것이,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유리아를 비롯해서 지휘관들이 고개를 저었다. 엘리자베트는 시종이 건네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후우. 파리시오룸은 왕당파의 성지이다. 만일 브르타뉴군이 황도를 버리고 떠나버리면 학살의 불길은 그대로 파리시오룸까지 옮겨 붙을 터. 시민들이 여왕을 향해서 어떻게 반응할 것 같은가.”
“……!”
“시민들이 몰살당할 것을 알면서도 도망쳐버린 군주. 백성보다 자기 한 목숨이 소중한 폭군. 그런 식으로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본국의 왕당파마저 앙리에타를 매도하겠지.”
엘리자베트는 지쳤는지 의자에 털썩 앉았다.
“학살이 일어나기 전에 탈출하면 좋았다. 학살이 일어난 지 하루째라면 아슬아슬하지만 역시 괜찮았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버렸어. 앙리에타의 정치적 생명은 이미 끝났다.”
“그럴수가…….”
유리아가 충격에 목소리가 메였다. 대륙의 패자에 가장 가깝다고 칭해지던 앙리에타 여왕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간단하게 몰락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겨우 이틀인데…….”
“단탈리안이라면 가능하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엘리자베트가 중얼거렸다.
“치명적이고 깔끔하지. 앙리에타는 가장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부류를 적으로 맞이하고 말았다.”
“…….”
유리아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모략꾼이 단 이틀 만에 일국의 군주를 끝장내는 계책을 손쉽게 짜낸다는 말인가? 더 나아가, 눈앞의 여인은 어떻게 그런 계책을 단 한번에 꿰뚫어 보았는가.
‘드넓은 대륙에서 오직 두 명만이 전쟁의 결말을 알고 있다.’
유리아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일찍이 엘리자베트 통령은 단탈리안을 가리켜서 '대륙 제일의 책사'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그 책략을 알아차린 통령은 무엇인가? 동류만이 동류를 정확하게 평가한다. 단탈리안과 엘리자베트 두 사람은 분명히 같은 부류의 인물이겠지.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을 느끼며 유리아가 질문했다.
“각하께서는 어찌하실 것인지요? 구원이 불가능하다면 퇴각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아니. 방법은 있다.”
엘리자베트가 눈을 감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녀가 두 눈을 떴다.
“우리는 적을 모방한다.”
* * *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태동했습니다. 제국군의 군기와 갑옷을 마련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겠지요. 재미난 사실은.”
저절로 입가에서 미소가 만들어졌다.
“전령의 보고에 따르면 프랑크 남부에서 약탈이 벌어진 지 한 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천 명 분의 갑옷과 군기를 마련하는 데 적어도 열흘은 걸립니다. 순간이동 마법을 써서 전송한다 해도 열흘입니다…….”
우리군이 파리시오룸을 포위한 기간이 딱 열흘. 여기에 더해 르 아브르에서 항복사절단이 나오는 데 한 달이 조금 덜 걸렸다.
“요컨대, 파리시오룸의 포위가 막 이루어진 바로 그때 통령은 이미 활동을 개시했습니다. 훌륭하군요. 그녀는 우리군의 목적을 일견에 눈치챘습니다.”
그리고 제국군을 위장해서 프랑크 남부를 휘저었다.
합스부르크의 언어를 쓰는 병사가, 합스부르크군이 쓰는 군기와 군복을 사용하며, 합스부르크 제국이 침략해온 이때 활동한다. 누가 봐도 제국군의 소행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우리가 파리시오룸에서 행했던 학살의 방식까지 그대로 모방했습니다. 철두철미하다고 할까요. 과연 합스부르크의 통령입니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공화국에서 왜 그런 짓을 벌이겠나?”
마르바스가 조용히 물어왔다.
“어차피 프랑크의 일이다. 그쪽과 크게 상관없지 않은가.”
내가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상관이 있다. 왜냐하면 합스부르크의 통령은 대륙을 시야에 두는 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도 마왕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목적은 여러 가지입니다. 첫째로, 우리군의 명예에 흠집을 내는 것. 여태까지 우리는 약탈을 최소화하면서 진군했습니다. 민심을 이쪽으로 끌고 오기 위함이었지요. 그것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프랑크 동북부에서도 일할의 안전세만 거두었다. 그런 노고가 헛수고가 되어버렸다.
“둘째로, 프랑크 전국에 다시금 반(反)공화주의가 들끓을 것입니다.”
엘리자베트가 '사 년 전의 학살을 단죄한다'라는 명목으로 남부에 학살을 일으켰다. 이것에 남부의 도시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남부의 도시들은 우리에게 항의하겠지요. 황태후에게도 학살의 참화를 알리며 우리군을 비난해달라고 요청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학살을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저지른 적이 없으니 사과하지 않는다.
남부의 시민들이 이런 공식적이고 정치적인 답변에 만족할 리 없다.
“……우리가 한 짓이 아니라고 말해봤자 변명으로 들릴 뿐이겠군.”
“예. 그렇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누명이다.”
마르바스가 불쾌한 듯 표정을 찡그렸다.
“차라리 통령의 소행이라고 밝히면 어떠한가?”
“안타깝지만 증거가 없습니다.”
엘리자베트이다. 증거가 될 만한 흔적 따위 남기지 않았으리라. 아니,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철저히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뻔하다.
“정치적인 공세를 펼치는 것은…….”
“힘들겠지요. 우리가 적어도 파리시오룸 근방에서 학살을 저지른 것만큼은 진실입니다. 이미 학살을 저질러본 우리와 전혀 생소한 타국. 사람들이 어느 쪽을 더 의심하리라 보십니까?”
“으음.”
마르바스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답답한 심정이겠지. 학살을 인정할 수도 없고, 인정하지 않는 것도 난감하다.
하지만 나는 즐거웠다. 첫사랑에 걸린 애송이처럼 두근거렸다. 당사자인 앙리에타조차 깨닫지 못한 이쪽의 술수를 엘리자베트가 간파했다. 그리고 곧바로 학살을 실행에 옮겼다…….
행동력과 결단에서 앙리에타와 감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습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에 밀정을 보내보지요. 아마도 걸린 시간을 계산해보면 통령은 국경의 경비대를 동원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국경 경비대가 사라진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의외로 쉽게 상대방의 유죄를 밝힐지도 모릅니다.”
“음.”
말로 하면서도 그럴 가능성은 극히 드물다고 생각했다.
아마 엘리자베트는 병사들의 신분을 몇 번이고 세탁했을 것이다. 공화국의 국민들조차 군대가 움직였는지 알아차리지 못했으리라. 나는 이런 방면에서 세상 그 누구보다 엘리자베트의 솜씨를 신뢰한다.
마르바스가 손깍지를 끼었다.
“단탈리안. 자네의 주장은 통령이 우리군의 목적을 속속들이 꿰뚫었다는 전제 아래 성립한다. 그것이 진실로 가능할지 의문이군.”
“가능합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