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04화 (304/510)
  • 00304 제국 살해자  =========================================================================

    앙리에타가 입끝을 들어올렸다.

    “나는 그대를 어떤 식으로 환영해야 하는 것이지? 마왕인가. 아니면 일개 궁중백인가.”

    “송구합니다만. 전하께서는 어떤 자를 사신으로 받아들이고자 하십니까?”

    내가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앙리에타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어떤 자를 사신으로 받아들이려 하다니?”

    “전하의 요새를 포위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합스부르크 황제 폐하의 군대입니다. 전하께서 군사에 관련해서 논하시고 싶다면 저는 궁중백으로서 접견할 것입니다.”

    우리군은 항상 합스부르크 제국군을 표방했다. 사신으로 온 나 역시 합스부르크를 대표하며, 따라서 어디까지나 궁정백작으로서 행동해야 알맞다.

    “허나 만일 전하께서 양군이 처한 상황을 뛰어넘어 대륙의 미래를 논하고자 하신다면.”

    내가 양손을 보이면서 말했다.

    “저는 기꺼이 마왕으로서 전하와 함께 진지한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나이다.”

    “흐응. 만약 내가 궁중백인 그대도, 마왕인 그대도 마음에 들지 아니한다면?”

    “으음…….”

    나는 고민하는 척 턱끝을 쓰다듬었다.

    “글쎄요. 그때는 단지 한 사람의 남자로서 전하께 접근하고 싶군요.”

    “뭐?”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미인이십니다, 전하. 만일 오늘밤에 무도회가 준비되어 있다면 모쪼록 기대해보겠습니다.”

    앙리에타가 피식 웃었다.

    “살다보니 마왕에게 춤을 권유받는 일도 다 있군.”

    “이미 전하께서는 프랑크를 무대로 삼아 멋지게 춤을 추셨습니다. 오늘은 말하자면 무도회가 끝난 막간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요. 예, 남녀가 서로에게 가장 솔직해지는 시간입니다.”

    “그대와 내밀한 시간을 즐기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은걸.”

    앙리에타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다들 나가 있어.”

    장수들이 군례를 취하고 썰물처럼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방안에는 여왕과 나,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앙리에타가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꼬았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단도직입해서 말하지. 명예롭게 항복하고자 한다.”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조건이 필요합니다.”

    “제시해봐.”

    우리는 선수였다. 상대방의 마음을 흔들겠다고 애꿎게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검지를 올리면서 말했다.

    “첫 번째. 카트린 드 메디시스 황태후의 신변을 저희 측에 양도해주십시오.”

    “받아들일게. 단, 자클린 롱그위 성녀의 신변을 우리에게 양도해.”

    앙리에타가 고개를 끄덕였으며, 나 또한 끄덕였다. 결정에 망설임이 없었다. 나는 중지를 들어올렸다.

    “두 번째. 그동안 브르타뉴가 점유하고 있던 프랑크의 도시와 요새를 모두 포기해주십시오. 더불어서 프랑크와 불가침조약을 맺어주셔야겠습니다.”

    “……조약에 시기를 명시해. 시기는 십 년을 넘지 않아야 하고. 또한 우리가 요새에 비축해둔 무기와 군량은 도로 브르타뉴에 가져가겠어.”

    십 년의 불가침조약. 이로써 단기간에 대륙을 재패하려던 앙리에타의 야망은 좌절되었다.

    마지막으로 약지를 들었다.

    “세 번째. 프랑크의 황제 앙리 3세를 죽이고 병사(病死)로 위장해주십시오.”

    “…….”

    앙리에타가 무시무시한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았다.

    “우리한테 황제를 독살한 혐의를 뒤집어 씌울 셈이야?”

    “앙리 3세가 죽으면 프랑크 황실의 핏줄은 명실공히 단절됩니다.”

    직계는 물론이고 방계까지 황족이란 황족은 싸그리 죽어버렸다. 앙리에타가 바퀴벌레 잡듯이 몇 년 동안 뛰어다닌 덕분이었다.

    “황태후에게 권력이 넘어가겠습니다만. 황제가 있는 상황에서 섭정으로 군림하면 또 모를까, 태후가 단독으로 국정을 휘어잡기란 어렵지요. 프랑크의 정세가 어찌 돌아가리라 생각하십니까?”

    “……다시 내전이 일어나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랑크에서 웬만한 대귀족은 일소되었다. 남은 것은 다 고만고만한 난쟁이들. 그중 누군가가 패권을 잡으려 해봤자 전도다난할 게 확실하다. 즉, 내전의 재발이다.

    “지금까지 프랑크의 왕당파와 공화파는 일치단결했습니다. 전하, 바로 당신이라는 적이 있기에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불가침조약이 맺어지면 당파들은 바깥으로 향한 시선을 이제 안으로 돌리겠지요. 각 당파가 이해관계를 놓고 충돌할 것이 분명합니다.”

    “…….”

    앙리에타가 침묵했다.

    아까 전에는 눈빛에서 분노가 넘쳤다. 반면에 지금은 어떻게 판단해야 좋을까, 하고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앙리에타가 뜸을 들이며 입술을 열었다.

    “그대들의 목적은 자군을 프랑크에서 축출하려는 것 아니야?”

    “맞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걸. 왜 프랑크에 해를 입히려고 하지?”

    “전하. 프랑크가 강대해지면 곤란한 국가는 비단 브르타뉴만이 아닙니다.”

    내 대답에 앙리에타가 길게 탄식했다.

    “……그대들은 프랑크를 구원하려는 게 아니었어. 단순히 브르타뉴와 합쳐진 프랑크가 지나치게 강력해질까 두려웠을 뿐. 우리의 군사력을 깎아두고, 프랑크에는 내전의 씨앗을 뿌려둔다. 그리하여 중간에서 이득을 보려는 거야.”

    내가 싱긋 웃었다. 부정도 하지 않았고 긍정도 하지 않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말씀드리자면, 불가침조약을 십 년보다 길게 설정하는 편이 전하께도 이로우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야 프랑크인들은 마음을 놓겠지요.”

    “……그렇군. 조약문에 명시된 기간이 길면 길수록 프랑크인들은 안심하고 내전에 집중할 테니까.”

    앙리에타가 어딘지 허탄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무서운 자로구나, 단탈리안.”

    “…….”

    “사람들은 전쟁이 무사히 끝나고 평화가 도래한다고 생각할 거야. 그대가 제시한 조건들은 하나씩 살펴보면 이상한 구석이 없다. 허나, 실상은 평화를 가장한 모략……이제 프랑크인들은 자발적으로 내전을 일으키겠지.”

    앙리에타가 한숨을 쉬었다.

    “어떻습니까? 전하께서 보시기에는.”

    “과연 마왕처럼 악랄하고 흉악하네……하지만.”

    앙리에타가 일어섰다.

    “브르타뉴 입장에선 거절할 이유가 없지. 협상을 받아들이겠어.”

    우리는 서로의 오른손을 마주잡았다.

    향후 10년, 프랑크의 운명은 바야흐로 지금 이곳에서 결정되었다.

    우리는 그날 바로 조약문의 초안을 작성했다. 외부에는 일절 알려지지 않은 비공식 회담이 오갔다. 공식적으로는 브르타뉴군과 우리군이 의견 차이가 심각하여 협상이 결렬되었다고만 알려졌다.

    며칠 뒤, 앙리 3세가 급성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사망에 브르타뉴군은 '심각하게 동요'했고, 더 이상 싸울 의지를 잃고 연합군에 '무조건적인 항복'을 밝혔다.

    이에 대해 우리군은 그동안 브르타뉴군이 보여준 놀라운 분전을 인정했으며, 군기와 무기를 모두 들고 귀국하는 '명예로운 항복'을 제안했다. 관대한 제안에 힘입어서 공표된 조약문은 아래와 같았다.

    1. 브르타뉴 왕국과 프랑크 제국은 향후 14년 동안 서로의 국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2. 브르타뉴 여왕은 합스부르크 황제에게 한 번의 선물을 증정한다.

    3. 그 외에 브르타뉴는 합스부르크에 일절의 전쟁배상금을 요구하지 않으며, 합스부르크 또한 브르타뉴에 별도의 전쟁배상금을 요구하지 않는다.

    르 아브르(Le Havre) 조약이라 이름 붙은 문서였다.

    일국의 여왕을 완벽한 패배까지 몰아넣은 군대가 제안했다기에는 너무나 자비로웠다. 조약문을 조인하는 장소에는 프랑크에 머물던 각국의 대사가 참가했는데, 그 자리에서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황제는 선언했다.

    “아군의 목적은 마왕 아가레스를 토벌하는 것이요, 목적이 달성된 이상 과인은 브르타뉴의 군주를 핍박할 의사가 없다.”

    일찍이 연합군이 내걸었던 명분이 겉치장이 아니었음을 만방에 알린 것이다.

    만일 불평등한 조약문이 체결되었다면 지금까지 관망하던 국가들이 제동을 걸었겠지.

    브르타뉴가 지나치게 강대해지는 것이 불안한 만큼 합스부르크가 지나치게 강대해지는 것 역시 불안하다. 하지만 합스부르크는 이번 전쟁에서 어떠한 영토도 차지하지 않았다. 대륙의 제국(諸國)은 황제가 정말 순수한 의도에서 친정했다고 인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아직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훨씬 더 중요한 의의가 조약에 숨어 있었다.

    바로 마왕군이 조약의 당사자로 끼었다는 사실이다.

    여태까지 인류와 마왕군은 어떠한 조약도 공식적으로 맺어보지 않았다.

    이번 조약은 비록 겉보기에는 브르타뉴 왕국과 합스부르크 제국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마왕군이 실질적인 한축으로 끼어 있음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달리 말해, 마왕군과 인류가 서로를 '여차하면' 협상 테이블에 나설 수 있는 상대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걸로 제 목적은 완수되었습니다.”

    내가 의자에 몸을 파묻고 흥얼거렸다.

    “앙리에타는 14년이면 국력을 회복하리라 자신하는 것 같지만, 기사단이 저리 전멸해서야 어림도 없지요. 게다가 앙리에타는 더 이상 왕당파의 이상적인 지도자가 아닙니다. 그녀의 손안에서 대륙은 떠났어요.”

    어깨를 주물러주는 라우라의 손길을 느끼면서 나는 즐겁게 웃었다.

    “서열 제1위의 마왕도, 서열 제2위의 마왕도……대륙에서 가장 패자에 가까웠던 군주도 탈락했습니다. 이제 파벌 정치밖에 안 남았지요. 라우라.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아아. 수고했다, 주군.”

    참고로 브르타뉴군의 수중에서 해방된 황태후는 베르시 준남작이 모셨다.

    베르시 준남작은 사병을 동원하여 황태후를 호위했고, 파리시오룸에 입성했다. 이 공로로 인해서 준남작은 단번에 백작의 칭호를 거머쥐었다. 황태후의 측근이자 공화파의 거두로서 베르시 백작이 파리시오룸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자아.

    이제 마왕군에 독재자는 사라졌다.

    평원파든 중립파든 산악파든, 어느 한쪽이 단독으로 마왕군 전체를 움직이기란 불가능해졌다. 세 개의 파벌은 균형을 유지하며 공존한다.

    인간계에서도 월등한 세력이 말소되었다.

    엘리자베트는 일개 공화국의 참주로 전락했고, 앙리에타는 아슬아슬하게 왕권만 유지하는 신세로 떨어졌다.

    바알과 아가레스를 잃어버린 마왕군, 앙리에타를 잃어버린 인간계……사실상 이번 전역에선 마왕군과 인간계 양쪽 모두가 피해를 입었다. 제일 이득을 본 사람은 나라고 자신해도 좋겠지.

    마왕군에서는 각 파벌의 조율자로서 입지를 단단하게 굳혔다. 합스부르크의 궁중백작으로 일국의 군주와 협상 테이블에 오름으로써, 앞으로는 인간계에서도 활동할 실적과 명분을 만들어두었다.

    나는 기분 좋게 전쟁을 끝내고 귀환했다. 진심으로 유쾌했다.

    이상한 소식을 전해듣기 전까지는.

    *  *  *

    “……우리군이 프랑크 남부에서 약탈을 시행했다고?”

    “예. 그것도 상당히 대규모로 자행된 듯합니다.”

    연합군이 각기 바타비아 공화국군, 합스부르크 제국군으로 갈라져서 귀국하는 길이었다. 우리는 전령에게 묘한 정보를 전해들었다.

    제국군이 프랑크의 남부 영지를 싸그리 약탈하면서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그게 무슨 뜬소문이냐. 우리는 프랑크 남부에는 아예 진군한 적조차 없거늘.”

    “하지만 실제로 남부 도시들에서 아군에 대한 원망이 자자합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쑥대밭이 되어버린 곳도 있다고…….”

    전령의 말이 이어질수록 우리는 표정이 구겨졌다.

    말인즉슨, 무려 천 명이 넘는 제국군이 수십 개의 마을을 잔혹하게 약탈했다. 말이 약탈이지 학살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으며, 파리시오룸을 공략할 적에 그러했듯이 대규모 화형까지 거행된 모양이었다.

    거의 한 달 동안이나.

    피해는 더 이상 간과하기 어려울 정도여서 간신히 회복된 파리시오룸의 궁정으로 탄원서가 빗발치고 있었다. 새로이 뽑힌 프랑크 각료들은 정신을 못 차리고 진상을 조사하는 중이라던가.

    바르바토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야. 솔직히 불어. 어떤 년놈이야?”

    “…….”

    “누가 분견대를 풀어서 쓸데없는 짓을 벌였어? 앙?”

    마왕들은 서로가 서로를 슬쩍 쳐다보았다. 공중에서 무수한 시선이 엇갈렸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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