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03화 (303/510)

00303 제국 살해자  =========================================================================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들었다.

“……네가 왜 여왕을 만나러 들어가?”

언제 어느 때나 목소리에 장난기가 섞인 것이 바르바토스의 특징이었는데, 지금만큼은 평소에 비해서 기운이 없었다. 아니. 기운이 없다고 표현해야 할지, 꼭 의도적으로 목소리에서 높낮이를 없앤 느낌이었다.

“우리군은 아가레스를 처단하는 것이 목적이야. 방금 목적이 완수되었고. 이런 명분을 내세운 덕분에 버니시아 왕국과 같은 타국의 개입을 봉쇄할 수 있었지. 만약 우리가 여왕에게 일말의 자비를 허락하지 않으면 여러모로 정세가 귀찮아질 거야.”

승리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지나치게 적을 짓밟아서야 주변 국가의 경계심을 필요 이상으로 키워버린다.

이번 전쟁에서는 군단장들이 거의 모든 전비(戰費)를 부담했다. 벌써 전역이 일어난 지 삼 개월이 흘렀다. 서서히 전비가 걱정되는 무렵이었으며, 약탈이나 징수로 비용을 메꾸자는 생각이 샘솟는 시점이기도 했다.

지금 전쟁을 마무리 지으면 딱 적절하다. 마족 병사들은 별달리 위험하지 않았던 전쟁에서 급료를 제대로 받아서 좋고, 마물들은 인육을 잔뜩 먹어서 좋고, 마왕들은 그럭저럭 적은 지출로 최고의 결말을 연출해서 좋다. 어딜 봐도 해피 엔딩이다.

하지만 바르바토스는 얼굴 표정이 영 못 마땅했다. 녀석이 엉뚱한 말을 꺼내었다.

“그게 아니라. 왜 하필 네가 가야 하냐고.”

“어?”

“협상할 뿐만이라면 딱히 다른 사람이 사신으로 가도 상관없잖아.”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야……내가 말을 잘하니까?”

“나도 말은 잘 하는데에~.”

가미긴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녀가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면서 이쪽을 쳐다보았다. 어째서인지 미소가 유독 무서워보였다.

“단탈리안은 전쟁에서 전면에 나서는 바람에 쓸데없이 원한을 많이 사지 않았을까? 거추장스러운 원한이 없는 내가 오히려 사신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해.”

“……아니, 죄송하지만 가미긴 전하께선 인간계의 역학관계에 완전 꽝입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가미긴이 협상가로서 일류에 속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마왕군 내부에서 협상이 이루어질 때 적용되는 얘기였다.

“버니시아 왕국이랑 카스티야 왕국이 현재 브르타뉴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 꿰고 있습니까? 거기서 프랑크 제국, 황제, 황태후가 각각 어떤 역할을 의미하는지는요? 황태후가 사르데냐 왕국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의문입니다.”

가미긴이 입술을 닫았다. 그런데도 웃음은 여전히 활짝 피어 있었다.

이상했다. 가미긴이라고 자기보다 내가 사자에 더 적합하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바르바토스도 그렇고 당최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다.

“뭐, 이곳이 인간계가 아니었다면 가미긴 전하께 부탁드렸을 겁니다. 다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사자에는 제가 적합…….”

“인간계의 국제적인 정세라면 소녀에게도 견식이 있사와요.”

“…….”

이번에는 파이몬이 끼어들었다.

“바타비아 공화국을 포섭한 것도 소녀였지요. 산악파는 최대한 전쟁을 피하고 외교로 이득을 취하려는 걸 목적으로 삼아 결성된 집단. 산악파의 수장을 맡고 있는 소녀가 사신으로서 부적합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워요.”

댁은 대신에 협상 능력이 잼병이잖아!

무심코 소리를 질러버릴 뻔했다. 아니, 정말로 뭐냐. 왜 갑자기 이 아가씨들이 삐딱한 자세로 나오는 거냐. 설마 나를 협상자로 보내면 불안하다는 소리인가?

약간 충격이다. 내가 다른 부분에서는 전부 밑바닥을 깔아줄지언정 말빨에 한해서만큼은 제법 인정받았다고 생각했는데.

“후후.”

라우라가 숨을 죽여 웃었다. 주군이 곤란한 처지에 놓였는데 웃음이 나오다니!

나는 분해져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라우라는 태연자약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얼, 참모장. 그렇게 무시무시한 눈으로 본관을 노려보지 마라. 군단장들은 지금 참모장을 적진 한 가운데에 홀로 보내는 것이 걱정되어서 저러는 것 아닌가.”

“하아?”

라우라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참모장은 심모가 날카롭다 한들 일신의 무위는 보잘 것 없다. 행여나 브르타뉴군이 좋지 않은 마음이라도 품으면 잠시라도 저항할 수 없겠지. 군단장들은 참모장의 안위가 걱정되고 또 걱정되어서, 차라리 자신이 나서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

내가 고개를 돌려서 바르바토스, 가미긴, 파이몬을 차례대로 쳐다봤다.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내 시선을 슬쩍 피했다. 천하에서 제일 이기적인 년을 뽑으라면 나란히 공동 1위를 차지할 얘네가 걱정이란 걸 한다고? 그것도 나를? 농담이겠지.

“흠흠. 꼭 걱정되어서 하는 말은 아니고…….”

“너무 한 사람한테만 역할이 집중되는 것도 아니다아, 싶어서.”

“소녀는 그저 또 다른 가능성도 있음을 지적했을 뿐이와요.”

그녀들은 끝까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

……분위기가 묘해졌다.

마르바스는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시트리는 안절부절 못해서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편 바싸고는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완벽하게 썩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멍청한 구더기 새끼' 하고 바싸고의 눈동자가 매도하고 있었다.

내가 한숨을 쉬었다.

“어휴. 농담도 적당히 해주십시오, 부사령관.”

“호오, 농담이라? 본관은 언제나 진실만을 입에 담는다.”

“그러면 더욱 더 질이 나쁩니다. 설마 군단장들이 개인적인 심정 때문에 아군 전체의 향방이 걸린 대사에 관여할 리 없지 않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군단장 각하들에 대한 모욕이 되어버립니다.”

“흐응. 그러한가?”

라우라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본관이 경우에도 없이 장군들의 명예를 욕보인 셈이 되었는가? 본인들은 어찌 생각하는지 묻고 싶군.”

바르바토스, 가미긴, 파이몬 세 사람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당연히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할 장수는 아무도 없었다. 총사령관이나 다름없는 라우라를 대놓고 비판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니까 사적으로 라우라의 군주에 해당하는 내가 대신해서 총대를 메준 것이고. 아니나 다를까, 세 사람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라우라가 쿡쿡 웃었다.

“침묵은 긍정이라고 하지. 물론, 이 경우에는 어느 질문에 긍정했는지 분명하지 않다만.”

“……부사령관.”

“후후. 알겠다. 본관이 성급하게 말했다.”

라우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제장들, 부디 본관의 실수를 용서해주기를 바란다. 아직 경험이 일천하여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너그러이 넘어가주면 감사하겠다.”

몸짓은 귀족 영애답게 무척 공손했는데 정작 목소리에서 반성의 기미가 눈꼽만치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약간 불만스러웠다. 아무리 라우라가 원작에서도 공손한 구석이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해도, 이럴 때는 화끈하게 제대로 사과해야 옳았다. 씁, 역시 천재라서 어쩔 수 없이 태생적으로 오만한 구석이 있는 건가.

“아, 아니. 괜찮아, 라우라.”

“……오히려 내가 경중이 없었는걸.”

“실례했사와요.”

다행히 군단장들이 사과를 받아주었다. 세 마왕 모두 사회적인 활동에 있어서 라우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른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모욕에 가까운 소리를 들었으니 앙금이 남았으리라. 나중에 내가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다시 사과해야겠다.

아무튼 분위기가 다시 묘해지기 전에 화제를 돌리자.

“동지 여러분. 저에게 협상을 맡겨주십시오. 여러분이 전쟁에서 얼마나 위대한 공적을 세웠는가 저는 매번 감탄하고 있습니다. 동지 여러분께서 기울이신 노력이 유종의 미까지 거두도록, 저 단탈리안, 분골쇄신이 되더라도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마왕들은 내가 사신이 되는 것에 찬성했다. 하긴 세 사람을 제외하고는 처음부터 반대하는 마왕 따위는 없었다. 바르바토스와 가미긴, 파이몬도 마지못해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세 사람은 뭘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해할 수 없다.

앙리에타가 천하의 멍텅구리가 아닌 이상에야 공식적인 사신으로 온 사람을 죽일 리 없다. 그래서야 안 그래도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브르타뉴가 더더욱 궁지에 몰릴 따름이다. 아니, 궁지에 몰리기 전에 일단 앙리에타 본인이 죽겠지. 우리군의 복수에 의해서.

만약의 가능성이 있긴 하다. 정말로 상대방이 빡 돌아서 너 죽고 나 죽기 전법을 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앙리에타가 절대로 그럴 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던전 어택>을 통해 알고 있다…….

음, 역시 아무리 생각해봐도 세 사람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다. 나중에 사과하면서 왜 그랬냐고 물어보자.

*  *  *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나는 사절의 안내를 받아 요새에 입장했다.

요새에서 농성 중인 브르타뉴군은 상태가 제법 나빠보였다. 일단 갑옷을 입지 않은 병사가 드물게 보였다.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해서 체력을 보존하겠다는 뜻이겠지. 달리 말해, 갑옷을 입은 채로는 체력이 유지될 수 없는 수준이라는 얘기였다.

호위를 받으면서 성내를 거닐자, 병사들이 이쪽을 찌릿 노려보았다. 그들은 괴질이 도는 마당에 농성을 펼치고 있었다. 적군의 사신에게 다소 신경질적으로 반응할 법했다.

내가 약간 목소리를 키워서 질문했다.

“전염병이 퍼졌다고 들었다. 격리는 제대로 되어 있는가?”

“죄송합니다. 소신은 군사와 관련된 일에 대해 말씀드릴 권한이 없어서…….”

사절이 난감한 어조로 말끝을 늘였다. 뭐, 권한이 있더라도 말해주지 않겠지.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사절에게 대답을 기대한 게 아니었다. 곁눈질로 주위 병사들의 표정을 살폈다. 도저히 호의적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만큼 험상궂은 얼굴들이 그곳에 있었다.

만약 격리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코웃음이라도 치거나 비웃음을 흘렸을 거다. 원래 여유가 없는 사람은 여유가 있는 척 가장하여 적을 압박하려 든다.

그런 가장조차 하지 못하고 적대적으로 나온다는 것은 정말로 사태가 심각할 경우…….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병사들을 여기에 배치한 것이로군.’

내가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앙리에타 여왕은 꽤나 힘든 입장에 처한 것 같았다. 협상자로서 이보다 기쁜 소식이 달리 없었다.

“이곳입니다.”

몇 겹의 엄중한 경비 병력을 지나쳐서 요새 최중심부에 도착했다. 나무로 된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송구합니다만. 혹, 인간계의 예법에 익숙하지 않으신지요?”

“아아, 괜찮다. 본인은 아군을 대표하는 자로서 방문했다.”

사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문앞에 선 기사를 향해 고개짓을 했다. 기사가 큰 목소리로 고했다.

“전하! 합스부르크 제국의 사신이 당도했사옵니다!”

문 건너편에서 쿵, 하고 소리가 들려왔다. 경비병이 창대를 바닥에 찧는 소리였다. 그러자 거대하고 육중한 문이 끼이익, 하고 열렸다.

화려한 치장이나 장식과 거리가 먼 장소였다. 붉은 카펫에 각탁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일곱 명의 인간이 각탁을 중심에 두고 서로 두런두런 얘기하고 있었다.

그중에, 마치 피안화가 활짝 핀 것처럼, 붉은 머리가 찬란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장군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허리를 숙이려 했지만, 문득 한 번이라도 더 여인을 보고 싶었다. 여인의 얼굴에는 특별하게 생기가 넘치는 무언가가 조용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에게 시선이 고정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인의 연한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네가 단탈리안이군.”

그제야 나는 시선의 주박에서 풀려나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나이다, 브르타뉴의 존귀한 여왕이시여. 말씀하신 대로 저는 단탈리안. 마왕군에서 서열 제71위라는 말석을 차지하며, 궁중백작의 작위를 수여받은 자입니다.”

그녀야말로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난세의 영웅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