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02화 (302/510)

00302 제국 살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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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레스의 처형이 일단락되고, 우리군은 내성을 포위했다.

외성과 시가지를 함락했으니 나머지는 쉽게쉽게 풀려나갈 것이라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르 아브르의 내성은 무척이나 단단했다. 성벽이 높았고 성탑이 일곱 개나 세워졌다. 그 자체로 하나의 요새라 보아도 무방했다.

“보고에 따르면 어림잡아 일만삼천 정도가 무사히 퇴각한 듯하다.”

“생각보다 많군요. 많아본들 육칠천이 되지 않을까 예상했습니다만…….”

아가레스에 의해 내분이 일어나는데도 절반 이상의 병력을 무사히 후퇴시켰다. 더구나 육지와 해상 양쪽에서 협공해오는 와중에.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앙리에타 여왕은 내분이 일어났을 때부터 이미 사태가 여기까지 흘러갈 줄 예상했겠지. 미리 퇴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다.

앙리에타 여왕은 불의의 습격을 당해 경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고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 병사들에게 농성에 나서는 한편 시기를 봐서 내성으로 퇴각하라 명령한 것이다. 놀라운 지휘력이다.

“전부 예상하고 있었는가. 제법이다.”

“예……확실히 제법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전령에게 물었다.

“혹시 시내에서 군량고가 발견되었는가?”

“아닙니다. 시내에선 군량이 저장된 장소를 찾지 못했습니다.”

“과연. 외성이 함락되기 전에 군량을 모두 내성으로 옮겼군.”

이로써 공성전이 길게 이어지지 않은 이유도 짐작되었다.

나는 주위에 앉아 있는 마왕들을 향해서 말했다.

“브르타뉴군의 목적은 외성을 사수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시내에 비축해놓은 식량을 내성에 모두 운송할 때까지 시간을 벌고 싶었겠지요. 요컨대 시간을 버는 용도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생각보다 요새의 방비가 철저하다는 얘기잖아.”

“아마도 틀림없이.”

바르바토스의 질문에 내가 긍정했다.

“내성은 외성보다 작습니다. 그만큼 방어하기 용이하지요. 해상에서 기습을 당할 염려도 없으니 도리어 상황은 적군에게 유리해졌습니다. 회광반조라고 할까요. 마지막의 마지막에 멋진 발악을 보여주는군요.”

마왕들이 눈썹을 찡그렸다.

모처럼 전투가 싱겁게 끝났다고 마음을 놓고 있었거늘, 난데없이 본격적인 공성전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소식을 들어버린 것이었다. 불쾌할 만했다. 바르바토스는 흐응, 하고 콧소리를 냈다.

“어쩔 수 없지. 나한테 맡겨.”

“바르바토스 군단장. 좋은 계책이 있는가?”

“으응. 뭐, 썩 마음에 드는 방법이 아니지만…….”

바르바토스가 라우라의 하문에 말꼬리를 늘어트렸다. 무슨 방도가 있다는 것일까. 마왕들도 고개를 갸웃하며 바르바토스를 쳐다보았다. 다만 파이몬이 자그맣게 한숨을 쉬는 걸 보아하니 그녀는 계책의 정체를 아는 듯싶었다.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전염병이야. 전염병. 내가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지?”

“아.”

내가 손뼉을 쳤다.

“명안이다! 사방에 널린 게 시체이니 얼마든지 흑마법을 활용할 수 있겠어.”

“그래. 시체들에다 전염병을 심어 넣은 다음에 투석기로 시원하게 날려버리면 그만이지. 좁아터진 요새에 병사가 일만이나 넘게 들어찼으니까, 효과가 직빵으로 날 거야.”

이른바 생화학전이다.

적군에도 사제가 있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그 숫자가 몇 백명에 이르진 않을 터. 일만 가량의 병사가 단체로 앓아누우면 사제들이라고 해도 손 쓸 도리가 없다.

요새가 널럴하다면 따로 격리할 장소를 만들 수 있겠지만, 브르타뉴군은 후퇴하면서 식량을 대량으로 가져갔다. 요새 안쪽의 빈 공간에는 죄다 식량이 채워졌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공간이 더더욱 좁아졌으리라. 돌림병에 대처하기에는 가히 최악의 상황이다.

“깔끔하고 멋지군.”

무심코 감탄했다.

정작 칭찬을 받은 바르바토스는 영 표정이 뚱했다. 그걸 이상하게 여겨 내가 물어보았다.

“뭐야, 바르바토스. 왜 진즉부터 흑마법을 쓰지 않았어? 월맹군에서 그 방법을 썼다면 훨씬 더 효율적으로 전쟁을 끌어나갔을 텐데.”

“…….”

바르바토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어딘지 권태로운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는 시선의 의미를 깨닫고 아, 하고 헛숨을 흘렸다. 바보처럼 말해버렸다. 바르바토스는 무엇보다도 전사로서 긍지를 지니고 있었다. 전염병으로 적군을 학살하는 것은 그녀의 신념에 어긋나겠지.

“전사의 도리에 어울리지 않는가…….”

“나는 나와 함께한 부하들을 되살리기 위해서 흑마법을 익혔어. 거기에 대해서 부끄러움일랑 전혀 없어. 창과 검을 들고 적병에게 뛰어드는 거야.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무기를 주고받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작자는 그 공포를 몰라.”

바르바토스가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딘지 모르게 달관한 느낌이었다. 바르바토스답지 않게 눈빛에 슬픈 기색이 담겨 있어서, 나를 비롯하여 주변의 마왕들은 저절로 귀를 기울였다.

“전사란 항상 자신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나는 거기에 긍지를 갖고 있어. 그렇기에 일찍이 전사였던 부하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에도 긍지를 느껴. 하지만 흑마법 따위 단순한 사술(邪術)이라고 욕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이지.”

부정할 수 없다.

생전에 아무리 고귀한 전사였다 한들, 흑마법에 의해 소생되면 그저 좀비나 구울에 불과하다. 살갗이 썩어문드러지고 온몸에서 악취가 풍긴다. 죽음의 기사도 육중한 갑옷 안에는 시체나 해골이 있다.

그것을 과연 생명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오히려 생명에 대한 모욕이지 않을까.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받아들일 게 분명하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좀비와 구울은 단순한 마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여기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뭐라 비난해도 상관없어. 그렇지만 죽음을 맞이하고서도, 사후에서도 전쟁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나의 부하들을 매도하는 것만큼은 용서하지 못해.”

바르바토스가 시선을 내려 내 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황금색 눈동자가 뚜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만일 내가 흑마법을 다르게 사용한다면 사람들은 흑마법을 모욕하고, 더 나아가 내 부하들까지 모욕하겠지. 단탈리안.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흑마법의 마에스트로로서, 나는 흑마법 자체에 책임을 지닌 거야.”

“……이해했다. 섣불리 말해서 미안해.”

나는 솔직하게 사과했다.

<던전 어택>에서도 바르바토스는 죽는 순간까지 생화학전을 펼치지 않는다. 부하들의 명예를 모욕하느니 차라리 용사의 손에 처단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만한 신념에 대해 나는 경의를 표했다.

바르바토스가 피식 웃었다.

“뭐, 하지만 우리는 연합군이야. 내 개인적인 명예욕 때문에 대사를 그르칠 수는 없지. 이번에 한해서 큰 마음 먹고 써줄게.”

“아니. 괜찮아.”

내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목숨을 걸 정도로 소중한 신념을 일개 '개인적인 명예욕'이라 단언하는 바르바토스는 과연 거물이었다. 오로지 바르바토스만이 모든 마인을 위한다는 대의 그리고 전사로서의 명예,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지금이 연합군이라는 집단을 위해 희생해야 할 때라고 판단했겠지. 간단하게 자신의 굳은 신념을 포기했다. 하지만, 나는 바르바토스가 어떤 의미에서든 희생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엉? 하지만…….”

“저 요새가 전염병이 퍼지기에 최적의 환경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굳이 흑마법을 사용할 이유가 없어. 그저 매일 시체를 투석기로 쏘아올리기만 해도 충분히 전염병이 나돌 거야.”

바르바토스가 뭐라 반박하려고 했지만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마왕들을 둘러보며 정중하게 말했다.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역적 바알을 참하고 우리가 새로이 마왕군을 창설한 지 벌써 이 개월이 넘게 흘렀습니다. 이 새로운 마왕군의 창설에 부족하나마 한손 보탠 자로서 발언하고 싶습니다. 바로, 우리는 어느 마왕에게도 개인적인 희생 따위를 강요해선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마왕들 한명한명과 시선을 마주쳤다.

“바알을 생각해주십시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수만이 넘는 군대를 간단하게 내버렸습니다. 또한 아가레스를 기억해주십시오. 그녀는 자신의 집착을 이루기 위해서 동족을 배신했습니다. 그들 모두 이기적인 욕망으로 다른 마왕을 희생시킨 장본인이요, 우리는 그들에 의한 피해자나 다름없습니다.”

“…….”

“만일 신(新) 마왕군이 다시금 전체의 욕망을 위해서 어느 특정한 마왕에게 희생을 요구한다면, 저로서는 도대체 바알과 우리들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왕들이 웅성거렸다. 그중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자도 꽤나 많았다.

“우리에게 전체의 이익이란 개인들을 위한 것이야만 합니다. 바싸고 전하를 위한 이익이 아닙니다. 가미긴 전하를 위한 이익만도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전원의 이익을 도모합니다. 그리고 전체의 이익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부해야 마땅합니다.”

내가 한 템포를 쉬고 바르바토스를 바라보았다. 바르바토스는 왠지 모르게 멍한 눈초리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바르바토스. 우리는 강하다.”

“…….”

“평원파, 산악파, 중립파. 그뿐만 아니라 무소속인 전하들까지 이곳에 함께하고 있다.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해두지. 우리는 강하다. 설마 우리가 네 개인의 희생을 통해서만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어……응…….”

내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너가 모든 것을 짊어질 필요는 어디에도 없어. 아군을 믿어라.”

바르바토스가 떡끝을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녀석이 입술을 움직였는데 소리가 너무 작아서 내 귀까지 들리지 않았다. 대충 고맙다거나 그런 얘기일 거다. 쟤는 발랑 까진 주제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일에는 상당히 어수룩하니까.

“부사령관. 바르바토스 군단장의 제안을 저도 지지합니다. 브르타뉴 병사의 시체를 모아서 투석기로 날려보내도록 하지요. 십중팔구 돌림병이 발생할 것이고, 설령 발병하지 않는다 해도 적군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킬 것입니다.”

“……본관이 어떻게 끼어들 틈이 없군.”

라우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좋다. 바르바토스 군단장과 단탈리안 참모장의 제안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 시내에 널린 브르타뉴군의 시체를 수집하고 투석기에 실어 날린다.”

그날 이후로 우리군은 매일마다 시체를 내성으로 던졌다.

자군의 시체가 공중에서 떨어지는 광경은 그 자체로 끔찍한 구석이 있었다. 브르타뉴군은 멀리서 보기에도 확실히 질려 했다. 투석기가 동원되고 보름이 흐르자, 마침내 내성에서 전염병이 나돌았다.

브르타뉴군은 나날이 기색이 나빠졌다. 우리는 일부러 야간을 틈타서 공성전을 펼쳤다. 말이 공성전이지 사실은 치고 빠지기를 반복할 따름이었는데, 이는 적군에게 무시무시한 스트레스를 강요했다.

한 달이 지나자 브르타뉴군은 슬슬 한계에 직면했다.

짐작하건대 이미 군사의 상당수가 장티푸스 따위에 걸려 앓아누웠다. 사제들이 분발하고 있겠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하겠지. 때때로 성벽에서 브르타뉴군이 시체를 떨어트렸다.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여왕 전하께서 협상을 원하시나이다.”

결국 성문이 열리고 사절단이 찾아왔다.

우리는 느긋하게 사절을 맞이했다. 인간과 달리 마족은 각종 병균에 강했다. 이쪽에도 전염병이 돌긴 했지만 곧바로 격리시켰기에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여유로움의 측면에서 적군과 아군은 차원이 달랐다.

라우라가 턱끝을 세우고 물었다.

“협상이라니? 무엇에 대한 협상인가.”

“여왕 전하께서는 명예로운 항복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주위에 앉은 마왕들이 코웃음을 쳤다. 대놓고 무시하는 분위기였다. 명예로운 항복은 적군이 함락시키기 까다로운 요새에 있을 경우, 우리의 손해를 최대한 적게 하려고 제안되며 수락되었다. 지금 상황은 우리에게 지극히 유리했다.

“무인에게 명예란 오직 죽음에만 덧붙이는 수식어 아니던가?”

“항복을 하려면 진즉에 파리시오룸에서 했어야지. 이제 와서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 들다니 가당치 않군.”

“너희의 여왕에게 직접 성문을 열고 나오라 하라! 무얼, 예쁘게 옷을 차려입었다면 고려해주지 못할 것도 없지.”

마왕들이 소리 높여 웃었다. 외교적인 예의라고는 눈꼽만치도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절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전황이 불리하지만 않았더라면 이미 쌍욕이 튀어나왔을 거다.

“자아, 자. 동지 여러분. 브르타뉴의 군주가 멋진 분전을 보여준 것도 사실입니다.”

내가 적당히 틈을 노려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애써 노력한 적에게 조금이라도 기회를 베풀어도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관대하니 말입니다. 어쩌면 여왕이 우리의 구미에 맞는 제안을 해올지도 모릅니다.”

“흠. 단탈리안, 정확히 어떤 식으로 협상하자는 말인가?”

마르바스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나는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글쎄요. 여왕의 얘기를 직접 들어봐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직접 성에 들어가서 여왕과 협상해보겠습니다. 모쪼록 저에게 전권을 맡겨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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