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98화 (298/510)
  • 00298 꼭두각시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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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르타뉴군이 탈출을 감행했다. 소식을 들었을 때는 '드디어 움직이는가' 싶었다.

    포위가 이루어지고 아흐레가 흘렀다. 퇴각하기로 결심했다면 이틀째가 되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학살에 대한 공포가 파리시오룸을 뒤덮기 이전에 도망치는 게 옳았다. 앙리에타 여왕에게도 변명거리가 생겼을 거다.

    “그럴 줄 몰랐다.” “설마 거기까지 잔인하게 나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 식으로 변명할 수 있다.

    부주의하다는 비난이야 쏟아지겠지만, 적어도 학살을 방조했다는 혐의에선 꽤나 자유롭겠지. 정치적인 위험도 떨어진다. 여왕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의 치세는 유지된다…….

    하지만 앙리에타는 밍기적거렸다. 그것도 열흘에 가깝게. 어중간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황도 파리시오룸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이 지나치게 아까웠는가, 아니면 해군이 보급에 성공할 것이라고 믿었는가……. 아마도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했으리라. 그러나 어느 쪽이든 계산 착오였다. 과연 당사자는 알고 있을까. 너의 정치적 생명은 이미 끝났다, 앙리에타.

    “서둘러 추격조를 편성해야겠군요. 바타비아군을 황도에 남깁시다. 그 정도면 충분히 황도의 민심을 통제할 수 있을 겁니다.”

    “아직 군사들이 도시를 방어하고 있는데?”

    가미긴의 지적에 내가 눈을 깜빡였다.

    “네? 무슨 말씀입니까. 브르타뉴의 여왕이 도시를 탈출했다면서요.”

    “군사가 전부 여왕을 뒤쫓은 건 아니야. 빠져나간 군사는 대충 이만오천. 아직 사천 정도가 파리시오룸을 지키고 있어.”

    “설마……군대를 둘로 나눈 것입니까?”

    이럴수가.

    내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앙리에타의 노림수였다.

    사천의 군사를 희생양으로 삼는다. 자신은 파리시오룸을 버리지 않았다, 그렇게 주장하려는 것이다. 아마도 별 쓸모없는 군사를 중심으로 남겼으리라. 생색을 내기 위해서 지휘관만큼은 높은 직위의 인물이 남았을 테고.

    여왕 자신은 정예 병력을 고스란히 빼내서 퇴각……우리가 파리시오룸을 점령하는 사이를 틈타서 냉큼 후퇴해버린다.

    만약 우리가 파리시오룸을 내버려두고 추격한다면, 그대로 반전하여 파리시오룸에 남은 군대와 함께 우리를 협공한다. 쫓아오지 않으면 퇴각해서 좋고, 쫓아오면 유리한 입장에서 회전을 전개하니 좋다. 그런 계획이겠지.

    이 얼마나.

    “얼마나 어리석은 수작입니까……!”

    나는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뱃속에서 웃음이 새어나오는 바람에 허리가 저절로 굽어졌다.

    걸작이었다. 아아, 이건 걸작이었다!

    병력도 살리고 명분도 살리려고 하다니. 어리석은 것에도 정도가 있었다. 앙리에타는 내 수업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설마 나를 깔보고 있는 것일까? 프랑크 내전에서 당했다고 하여 이쪽을 괄시하는 것인가.

    최악의 수를 골랐구나, 여왕이여.

    “부대를 둘로 나눈 게 뭐 어때서? 수가 적긴 해도 쟤네가 농성전에 들어가면 적어도 사흘은 걸릴 텐데.”

    “가미긴. 우리가 공성전에 돌입하면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요. 하지만 뭣하러 우리가 파리시오룸을 함락합니까. 여왕의 장단에 맞춰줄 필요가 없습니다.”

    가미긴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럼 황도를 뒤에 내버려두고 추격하려고? 후방이 불안해.”

    “제 말을 곡해했군요. 가미긴. 저는 굳이 '우리'가 파리시오룸을 함락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지금 당장 와이번을 통해서 인쇄물을 뿌리십시오. 거기에 이렇게 쓰는 것입니다. 여왕은 그대들을 버리고 도망쳤다. 파리시오룸 시민들이여, 만약 그대들 또한 학살당하기 싫다면 이제 와서라도 스스로 브르타뉴군의 압제에 대항하라. 용감하게 일어선 이들에 한하여 우리는 무조건적인 관용을 선물하겠다…….”

    나는 저 멀리 펼쳐져 있는 파리시오룸을 바라보았다.

    “허나 끝까지 브르타뉴의 학살자들을 옹호한다면 결코 용서란 없을지어니. 이것은 마지막 경고요. 마지막 자비로다.”

    우리군은 즉시 선전 공작을 가동했다.

    인쇄물을 마련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으므로 대신 성량 확대 마법을 십분 활용했다. 성벽 바깥에서, 와이번을 올라타고 하늘에서, 쉴 새 없이 항복하라는 목소리를 쏟아부었다.

    열흘 가깝게 대규모 화형식이 집행된 데다가 믿었던 브르타뉴의 여왕까지 도망쳤다. 심지어 퇴각하면서 시내에 남은 식량 대부분을 긁어모아서 가져갔겠지. 학살에 대한 공포, 신뢰에 대한 배반, 굶주림에 대한 두려움……. 파리시오룸 시민들에게 선택지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날 밤, 도시의 안쪽에서 새빨간 불길이 치솟았다.

    쇳소리와 고함이 멀리까지 들려왔다.

    파리시오룸에는 팔만 명의 시민이 살았다. 그들이 봉기를 일으킨 것이었다. 사천 명의 비숙련병으로 막을 만한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우리군은 남쪽 성문에 장사진을 차려두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눈앞에서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는데 가만히 있기 좀이 쑤셨는지 벨레드 형님이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이봐, 아우. 지금 성문을 두들기면 바로 함락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부사령관 아가씨……아니, 부사령관 각하께 한번 말씀드려보게나.”

    “형님께서 직접 제안하시지 그러십니까?”

    벨레드 형님이 손사레를 마구 쳤다. 단단히 라우라한테 혼난 모양새였다. 내가 작게 키득거렸다.

    “저게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도시에 혼란이 일어난 것처럼 위장. 우리가 얼씨구 좋구나 하고 입성하는 순간, 매복해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습격한다……. 가능성은 적지만 무시할 수도 없지요. 부사령관은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으음.”

    벨레드 형님이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라우라가 아니라 나의 판단이지만.

    라우라는 도시에 소란이 일어나자 바로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내가 반대했다. <던전 어택>에서 이와 똑같은 상황이 재현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합스부르크 제국, 그러니까 엘리자베트가 여황이 되어 프랑크를 침공한 시나리오가 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주축으로 한 프랑크-브르타뉴 제국은 잘 버틴다. 하지만 끝내 용사 때문에 수도 파리시오룸까지 밀려난다.

    그때 파리시오룸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용사는 신나게 도시 안으로 진격하지만 알고보니 속임수. 대대적인 기습을 허용하여 정신없이 패주한다. 여기서 북쪽 성문으로 도망치느냐 동쪽 성문으로 도망치느냐에 따라 히로인 루트가 갈리는데……음. 아무튼 의심스러웠다.

    결과적으로 내가 맞았다. 한밤에 일어난 방화는 브르타뉴군이 의도적으로 저질렀다.

    문제는 시민들이 정말로 봉기가 일어났다고 착각한 것이었다.

    불길이 치솟자 그동안 참아왔던 공포와 불안이 폭발하여 시민들은 한밤의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수만 명의 폭도는 어마어마했다. 순식간에 무기고가 약탈되었다. 브르타뉴군이 경계를 선 성탑과 망루, 망대, 아성이 모조리 점령당했으며, 항복하든 저항하든 상관없이 학살이 자행되었다.

    만일 우리가 초장부터 조심성 없이 성안에 진입했다면, 건물 사이에 매복된 적군들에 의해 몰매를 맞았겠지. 그러나 우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브르타뉴군은 매복을 위하여 이곳저곳에 분산해서 배치되어 있었다. 그것이 오히려 시민들에게 좋은 사냥감이 되어버렸다. 브르타뉴군은 집결하지 못하여 각개격파 당했고, 끔찍하게 몰살되었다.

    새벽 여섯 시.

    도시의 성문이 스스로 열렸다.

    시민군들이 브르타뉴의 포로들을 끌고 나왔다. 숫자는 약 이백 명. 달리 말하자면, 이백 명을 제외하고 도시에 남은 사천 명의 브르타뉴군 전원이 죽었다.

    “…….”

    놀랍게도 포로에는 낯익은 인물이 섞여 있었다.

    새하얀 사제복. 주황색의 곱슬머리. 아테네 대신전의 성녀, 자클린 롱그위였다. 그녀는 독기에 찬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설마 여왕이 성녀를 희생양으로 남겨두었을 줄이야…….

    시민군 대표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폐하. 합스부르크의 유일한 주권자이자 점령자이시여.”

    일반 시민들은 성벽 위에 올라서 있었다. 성벽에 올라간 시민만 어림잡아 일만 명이 훌쩍 넘어보였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자비를 약조해주셨기에 저희 파리시오룸은 역도를 토벌하여 이리 바치오니, 부디 약속된 관용을 이행해주시길 청원하나이다.”

    “그대들은 과거에 죄를 범했다.”

    루돌프가 말했다. 참고로 우리는 명목상 인류의 군대였으므로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 황제가 항복사절단을 맞이했다. 마왕들은 황제 뒤편에 서 있었다.

    “하지만 신들께서는 우리에게 속죄를 허락하셨으니, 그대들 역시 신들의 뜻에 따르는 것.”

    루돌프의 입에서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녀석에게 의식은 없었다. 바르바토스가 조종하는 대로 읊조릴 뿐이었다. 그리고 바르바토스에게 대사를 적어서 건넨 사람은 나. 루돌프는 그야말로 꼭두각시 인형이었다.

    “만일 누군가가 그대들에게 자비를 내린다면 그것은 짐의 자비가 아니라 다만 신들의 자비로다. 파리시오룸의 시민들이여. 일어서라.”

    루돌프가 몸소 대표 중 한 사람의 어깨를 붙잡아서 일으켰다.

    “브르타뉴에 의해 통치되는 프랑크, 브르타뉴에 의해 신음하던 파리시오룸은 지금 이 순간부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짐은 프랑크와 파리시오룸의 영원한 동맹자이자 친우로서 맹세하나니. 짐의 군대가 파리시오룸을 점령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오오, 존귀하신 황제 폐하…….”

    대표들이 감격한 얼굴로 루돌프를 바라보았다.

    루돌프가 대표의 어깨를 상냥하게 쓰다듬고――세상에, 바르바토스 녀석의 조종술은 단언컨대 세계 제일이었다!――고개를 돌렸다.

    “위대한 파리시오룸의 주민들이여! 짐은 침략자도 아니요, 그대들의 군주는 더더욱 아니로다. 그대들은 성문의 열쇠를 건내지 않아도 좋다.”

    꼭두각시 황제가 파리시오룸의 성벽을 향해서 소리쳤다. 물론 성량 마법이 걸린 채로.

    “짐의 군대가 그대들의 안락한 저택을 들쑤실 일은 없을 것이다. 그대들이 자랑스러워 하는 거리를 군인이 활개치는 일 또한 없을 것이며, 아녀자와 노인이 두려움에 떨 일도 없을 것이다. 신들께 맹세하나니! 파리시오룸은 완벽하게 독립권과 자치권을 부여받았노라!”

    그 순간, 성벽에서 시민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당연히 우리가 도시를 점령하리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우리는 아주 잠깐이라도 도시에 주둔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시민들조차 예상하지 못한 관용이었다.

    “황제 폐하 만세!”

    “프랑크 제국 만세! 합스부르크 제국 만세!”

    “바타비아 공화국 만세!”

    인간들이 한 목소리로 함성을 질렀다. 정말로 전쟁의 업화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사 년 동안이나 브르타뉴에 의해 통치되던 도시 파리시오룸은 드디어 자유로워졌다. 물론 '지나치게' 자유로워졌지만……지금 시점에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

    모두가 환호하는 가운데 오직 이백 명의 포로들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우리는 시민군에게 포로의 처우까지 맡겼다.

    “브르타뉴에 의해 피해를 입은 것은 파리시오룸의 시민이다. 고로, 피해에 대해 복수할 권리도 온전히 파리시오룸에 있다.”

    루돌프의 말이었다. 이 이해심 깊은 발언에 시민들은 다시 한번 열광했다. 즉석에서 시민들의 손에 의해 포로 수백 명이 처형되었다. 시민군은 황제의 자애로운 제안에 감사하며 최고급 지휘관들의 처우만은 우리에게 도로 양도하였다. 성녀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황도가 적어도 사흘은 버텨줄 거라고 기대했는가, 앙리에타?

    미안하군. 파리시오룸은 단 하루만에 함락되었다. 그것도 내분에 의해서…….

    나는 분명히 양자일택을 권고했다. 하지만 너는 군대도 명분도 모두 챙기려고 했다. 그것이 네 패착이다.

    이런 부분에서 너는 엘리자베트보다 한 발자국 떨어진다. 엘리자베트는 멸망의 위험이 들이닥치자 주저없이 제도(帝都) 빈드보나를 버렸다. 덕분에 월맹군이 분열되었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그것을 해낼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국 군주의 자질을 결정하겠지. 엘리자베트는 해냈으며 그렇기에 합스부르크는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반면에 앙리에타는 아무것도 버리지 못했다…….

    <던전 어택>에서 엘리자베트가 대륙을 재패한 건 우연이 아니다. 필연이다. 자신의 어수룩함을 원망해라, 앙리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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