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97화 (297/510)
  • 00297 꼭두각시 전쟁  =========================================================================

    비명과 울음이 터졌다. 인간들이 소리를 질렀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용서해주십시오! 용서해주십시――.”

    “살려주세요! 뭐든지 할 테니까, 제발 목숨만, 제발 살려주세요!”

    오십 명이 제각기 색다르게 울부짖었다. 마치 연습을 하나도 맞추지 않은 오케스트라가 불협화음을 연주하는 것 같았다. 이 엉망진창의 교향곡에 내가 새삼 감동할 리 없었다. 내 명령은 번복되지 않았다.

    ─ 화르륵.

    아군 병사들이 장작에 불을 지폈다. 횃불에서 옮겨탄 불길은 점점 더 커졌다. 비명 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화형은 꽤나 번거롭다. 마른 장작도 잔뜩 모아야 하고, 무엇보다 처형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앞으로도 수백 명을 죽여야 하는 일정을 고려하면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내가 화형을 선택한 까닭은 단순하다.

    잔인하니까.

    “시발, 풀어! 당장 풀어――!”

    “자애롭게 굽어 살피시는 페르세포네여, 부디 제 혼과 백을 안내해주시옵고…….”

    “흐아악! 흐아아악! 크흐아아악!”

    마을의 촌장. 지주. 세금관리인의 수하. 자경단장. 작은 사회에서는 귀족으로 군림했을 인간들이 서서히 하반신부터 태워졌다.

    불길에 시야가 꾸불꾸불하게 일그러졌다. 그들은 비명을 질렀으며, 연기에 숨이 막혀 컥컥거리다가, 누군가는 정신을 잃었고, 누군가는 끝까지 울었다. 그러나 최후는 똑같았다. 모두 바싹 태워진 해골이 되어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

    성벽에 선 브르타뉴군이 침묵했다.

    화형에는 장점이 하나 더 있었다. 눈에 잘 띄었다. 장작이 불타오르면서 피워내는 연기는 능히 멀리서도 관찰할 수가 있었다. 파리시오룸 시민들한테도 똑똑히 보이겠지.

    성벽 저 너머에서 인간들이 실시간으로 죽어나가고 있다……그렇게 실감을 느껴주지 않으면 곤란했다. 나의 목적은 파리시오룸 시민들에게 압박을 주고, 그러함으로써 앙리에타에게 압박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여섯 시간마다.”

    내 경고가 새까매진 상공에 높이 울려 퍼졌다.

    “남쪽 성문에서 화형을 거행하겠다. 브르타뉴의 군주가 자신의 죄에서 도피하면 도피할수록 희생자는 늘어날 것이다. 여기에 자비란 없다.”

    “…….”

    “잘 지켜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브르타뉴의 인간들이여. 얼마나 거대한 죄악의 씨를 그대들이 뿌렸는지. 어떤 형태로 그것들이 수확되고 있는지. 그리고 언제까지 희생을 외면할 수 있을지…….”

    그날부터 하루에 네 번씩 화형이 집행되었다.

    사형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남녀노소도 구분하지 않았다. 낮에는 검은 연기가 치솟았으며, 밤에는 새빨간 불길이 멀찍이서 보였다. 파리시오룸 남쪽에는 매캐한 불내음이 잦아들 틈이 없었다.

    내 예상대로 브르타뉴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지 못했다고 표현해야 올바르겠지.

    “파리시오룸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있어.”

    가미긴이 말했다. 그녀는 와이번 부대를 이끌고 하늘에서 도시를 감시했다. 화형식이 시작되고 이틀째부터 시위가 일어났다.

    “좋군요. 규모는 어느 정도입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불어나던걸. 처음엔 서른 명쯤 되나 싶었는데 지금은 사백 명.”

    시위대가 빠른 속도로 커졌다. 시민들이 불안에 떤다는 증거였다.

    가미긴의 말에 따르자면 그들의 요구는 간결했다. 지금 도시 바깥에서 벌어지는 학살을 중단시켜달라는 것이었다. 앙리에타 입장에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겠지. 당장이라도 도시를 빠져나가고 싶은데 발목이 붙잡혔다.

    사흘, 나흘, 닷새. 하염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그동안 전투가 한 차례 일어났다. 파리시오룸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생뚱맞게도 파리시오룸에서 멀리 떨어진 곳, 그것도 바다에서 해전이 벌여졌다. 지상이 틀어막히자 브르타뉴군은 강을 통해서 보급선을 보내려고 했다.

    그리고 하구에는 바타비아 공화국의 함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농성전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다면, 브르타뉴군은 틀림없이 강을 통해서 보급하려고 시도할 터.”

    라우라가 지적했다.

    “세쿠아나 강 입구에 함단을 매복시켜두면 큰 소득이 있을 것이다.”

    브르타뉴는 육지에선 둘도 없는 강군일지 몰라도 해군은 특출나지 않았다. 반면에 바타비아 공화국은 사르네야 왕국과 더불어 최강의 해군을 보유했다. 쉰 척이 넘는 대형 갤리선이 보급선단을 기습하자, 브르타뉴 해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가라앉은 전함이 크고 작은 배까지 합쳐서 스무 척. 나포된 보급선만 서른 척.

    라우라의 예측은 이번에도 빗나가지 않았다. 식량을 가득 실은 보급선이 도리어 우리의 것이 되어 오고 있다는 보고에 지휘관들이 크게 웃었다. 그중에는 경악과 존경이 담긴 시선으로 라우라를 바라보는 마왕도 적지 않았다.

    “이쯤 되면 그냥 예언자나 다름없구만.”

    벨레드 형님이 투덜거렸다. 이제 라우라는 단순히 군명에 의지해서 권위를 잡은 것이 아니었다. 순수하게 실력으로 부사령관이라는 지위를 주변에 납득시켰다.

    하지만 라우라는 주변의 열광에서 반 발자국 정도 떨어져 있었다. 표정에도 변함이 없었다. 당연하게 일어날 일을 당연하게 예상했다. 그런 느낌이었다. 아마 본인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걸.

    이로써 브르타뉴군은 자체적으로 보급 받을 수단이 완전히 사라졌다.

    파리시오룸에 남아 있는 식량을 죄다 긁어모았겠지만, 글쎄.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도망치려면 하루라도 더 빨리 도망쳐야 한다. 이도저도 선택하지 못하고 시간을 죽이는 건 최악의 수다. 누구보다 앙리에타가 잘 알고 있겠지.

    *  *  *

    “아군의 함대가 바타비아 해군에 패배했어.”

    앙리에타 여왕의 말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장수들은 소리를 죽이고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군량고가 습격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여왕은 본국의 해군에 연락했다. 더없이 신속하게 행동한 것이었다. 그것이 좌절되었다…….

    “전하, 하오면 보급은…….”

    “바타비아 해군을 돌파한 함선은 전무해. 제군들. 우리는 보급을 기대할 수 없다.”

    이 순간, 브르타뉴 왕국군의 운명은 정해졌다.

    앙리에타가 씁쓸하게 말했다.

    “통신 방해가 왜 쉽게 풀렸나 했지. 황궁의 마법진을 이용해서 뚫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적들이 일부러 반마법을 해제한 거야. 우리가 해군에 원군을 요청하도록…….”

    “전하. 설마 적군이 그것까지 예상했겠습니까?”

    한 장군이 반문했다.

    “어느 정도 우연이 섞였을 것입니다.”

    “아직도 모르겠나, 제군들. 이 전쟁에는 우연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어. 요새를 만들고 도하해서 군량고를 공격하기까지,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적의 장단에 놀아났지……. 빌어먹을 이야기야.”

    앙리에타가 고개를 저었다.

    “장기전이라고 생각했더니 황제를 노린 단기결전이었다. 단기결전이라고 생각했더니, 이쪽의 군량미를 빼앗았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장기전을 우리한테 강요하고 있어……. 꼭두각시 인형이라도 된 기분이군.”

    “…….”

    세간에선 이 전쟁을 꼭두각시 전쟁이라 불렀다. 브르타뉴의 괴뢰가 된 프랑크 황제, 마왕군의 괴뢰가 된 합스부르크 황제, 두 꼭두각시가 전쟁을 벌인다는 풍자였다.

    앙리에타는 다른 의미에서 이름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각본을 썼다. 마왕군이든 브르타뉴군이든 모두 그 각본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 심지어 언제까지 인형극이 계속될지도 모른다. 악몽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여왕의 질문에 장수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앙리에타가 예상하기로 이제 스무 일을 버틸 식량밖에 남지 않았다. 아끼고 또 아끼면 한 달 반일까. 농성전에서 한 달치 식량은 비축한 물량이라 말하기도 부끄러웠다. 장수들이 현재 상황을 얼마나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을지, 앙리에타는 반쯤 시험하는 기분으로 말했다.

    “송구하오나, 전하. 적게는 보름. 아무리 많아도 두 달을 버티기에 모자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장군들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앙리에타는 제장의 판단이 자신과 비슷함을 알고 쓴웃음을 지었다.

    장군들이 우수하다는 것은 더없이 기뻤다. 우수한 장군들을 이끌고도 승리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더없이 절망적이었다. 그렇기에 앙리에타에겐 쓴웃음을 짓는 것 이외엔 별 도리가 없었다.

    한 장군이 망설이며 고했다.

    “이대로 농성전에 돌입할 수는 없습니다. 전하. 적도가 포위망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남쪽 성문이 봉쇄되었을 뿐이지만, 언제 나머지 성문까지 틀어막힐지 모릅니다. 국체를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결단하셔야 합니다.”

    “아니. 정반대일 수도 있어.”

    앙리에타가 말했다.

    “저들은 일부러 남쪽 성문만 막아둔 거야. 도망치려면 도망쳐보라는 뜻이지. 제장들. 우리가 브르타뉴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서쪽으로 향해야 한다. 중간에 세쿠아나 강을 건너야만 하지. 그리고 세쿠아나 강 저편에는 저들이 버티고 있어.”

    “……우리가 도하할 때를 노려 공격해온다, 라고.”

    장군들이 신음을 흘렸다.

    “무엇보다도 얄미운 점은 이제 와서 바타비아의 해군이 등장했다는 것이지. 우리가 도시를 비웠을 때 저들은 함단을 이끌고 파리시오룸을 기습할 수 있었어.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구태여 파리시오룸을 함락할 필요가 없다. 적도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군요, 전하.”

    앙리에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들의 목적은 파리시오룸이 아니야. 전쟁의 승리조차 아니다. 그저 우리, 브르타뉴를 파멸시키는 것만 노리고 있어.”

    “…….”

    “농성을 하면 우리는 말라죽는다. 군대가 사라진 브르타뉴는 강대국도 뭣도 아니야. 단숨에 대륙에서 가장 약한 국가로 전락해버리겠지. 하지만, 농성을 하지 않고 탈출해도 브르타뉴는 이념을 잃어버린다. 신민들은 우리를 의심하게 되겠지. 그것 역시 국가의 죽음이다…….”

    앙리에타가 중얼거렸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파멸이 기다리고 있어. 눈치 채보니 막다른 골목이다……. 끈질기고 끔찍한 적이야.”

    끈질기고 끔찍하다. 그 표현에 장군들은 무심코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제대로 된 회전은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녹장미 기사단이 전멸했으나 인원으로 따지자면 천 명이 안 되는 피해였다. 하지만, 눈치 채보니 어느새 전쟁이 끝나 있었다. 이런 전쟁이 가능하리라고는 브르타뉴의 장수들도 상상하지 못했다.

    “군을 둘로 나눈다. 파리시오룸에 남아서 농성을 벌일 부대와 이곳을 탈출할 부대를.”

    “전하.”

    “적어도 도시를 버렸다는 소문이 돌지 않을 정도는 병사를 남겨야겠지.”

    장군들이 할 말을 잃었다. 그것이 유일한 해답이라는 사실을 장군들 역시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수많은 병사를 희생양으로 남겨두고 떠난다는 걸 의미했다.

    “어차피 얼마 버티지 못할 거야. 노병과 신병을 중심으로 남겨.”

    “전하, 하오나 그것은…….”

    “그렇다면 제가 남겠습니다.”

    그때 롱그위 성녀가 말했다. 여왕과 장군들이 놀라서 입을 벌렸다. 도시에 남겠다는 것은 곧 죽음을 자처하는 것이었다.

    “롱그위 성녀.”

    “우리가 전부 떠나서야 병사들이 버림 받았다고 생각해버립니다. 설령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래서야 하루조차 농성전을 이어나갈 수 없겠지요. 버림패에 의미가 없어져요.”

    롱그위 성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함께 남으면 병사들도 버림받지 않았다고 느낄 겁니다. 전하. 윤허해주십시오.”

    앙리에타가 눈썹을 찡그렸다.

    “아니, 내가 직접 남을 것이다. 나는 이미 브루노에서 병사를 버렸어. 그런 짓은 두 번 다시 저지르고 싶지 않아.”

    “전하께서는 브르타뉴를 위해 남아주셔야 합니다. 죄책감은 군주에게 있어 훌륭한 덕목입니다. 그러나 죄책감에 휘말려서 대사를 그르쳐서야 본말전도입니다. 브르타뉴를 대륙으로 이끄는 것, 그것이 전하의 의무이자 사명이지요. 벌써 잊으셨나요?”

    “…….”

    여왕이 침묵했다.

    모두가 시선을 아래로 향하는 가운데, 롱그위 성녀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저 역시 목숨을 쉽게 버리고 싶지 않아요. 최대한 버티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병사들과 함께 탈출하겠습니다. 여신께서도 그 정도의 자비는 저희에게 허락해주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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