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96화 (296/510)
  • 00296 꼭두각시 전쟁  =========================================================================

    회의가 끝나고 각자 개인막사로 돌아가는 길.

    파이몬이 나를 붙들고 구석으로 끌고갔다. 군진의 외곽에 경비병들이 있었지만 파이몬이 손짓으로 내쫓았다. 인기척이 사라지자 파이몬은 이쪽을 노려보았다.

    “인정할 수 없어요!”

    파이몬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저런, 너무 열렬하게 날 바라봐도 곤란한데. 나는 느긋하게 그녀의 시선을 넘겨받았다.

    “무엇을 인정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시치미 떼지 마세요. 단탈리안, 그건 학살이에요. 무분별하고 잔인한 짓거리에요.”

    “무분별하고 잔인하다라…….”

    내가 문장을 입에서 되풀이했다. 낱말 하나하나가 혓바닥에 들러붙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파이몬은 품속에서 유리병을 꺼내더니 바닥에 내팽개쳤다. 유리병에 담긴 보라색 액체가 스스로 마법진을 그렸다. 아마도 내부와 외부의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이겠지. 마법 서클을 전부 잃어버린 파이몬이지만 마법약 정도는 제조할 수 있었다. 이로써 밀실이 성립되었다.

    내가 침착하게 말했다.

    “새삼스럽게 잔인한 행위를 꺼리기엔 우리는 이미 너무 먼 곳까지 왔습니다.”

    “소녀는 무분별하고 잔인하다고 말했사와요. 의도적으로 생략하지 말아요. 만일 대의가 있다면 학살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번 작전에 어떤 대의가 있지요?”

    파이몬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단순히 브르타뉴를 궁지에 몰아넣을 뿐인 학살. 단순히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학살이에요!”

    “공화주의의 승리입니다, 파이몬.”

    “…….”

    그녀와 내가 시선을 똑바로 마주쳤다. 수많은 대화가 소리없이 교차했다. 우리가 나누어야 할 대화가 순식간에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 차악!

    호쾌한 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생각했다.

    “…….”

    “…….”

    어느새 목이 옆으로 돌아가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파이몬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내가 입술을 열려고 하자, 다시, 파이몬의 손바닥이 움직였다. 살갗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내 목이 또 한 번 힘없이 돌아갔다. 나는 고개를 돌렸고, 파이몬은 반복해서 손바닥을 날렸다. 그것이 여섯 번쯤 반복했을까.

    “위악자(僞惡者)……!”

    파이몬은 이를 악 물고 있었다.

    “일부러 가장 최악의 방법을 고안해내다니! 소녀가 눈치 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으면 큰 착각이에요! 단탈리안, 당신은 위악자예요. 전쟁은 사람을 죽이는 것, 변명할 것도 없이 악한 행위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변명을 하고 있다……정의를 위해서, 신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라고.”

    “…….”

    “그러니까 당신은 변명할 여지를 완전히 없애버리려는 거예요. 내가 하는 짓은 틀림없이 악이다, 여기에 변명이 개입할 틈은 전혀 없다……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고, 역사에 이해를 요구하지 않고, 단지 당신의 개 같은 순수성을 지키고 싶어서!”

    내가 뺨을 쓰다듬었다.

    누군가에게 뺨을 맞아본 적이 얼마만일까. 아니, 이런 식으로 맞아본 경험은 없었다. 적어도 당장에 기억하기로는 그랬다. 나는 다만 얼얼한 뺨을 만지고 있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내 입에서는 저절로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서요? 제가 잘못되었습니까? 파이몬.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월맹군을 일으켰어요. 수십만 명이 죽어나갔습니다. 알겠습니까? 수십만입니다.”

    어린애, 마족, 인간종, 아인종, 거기에 마왕까지. 가리지 않고 죽였다.

    “그 사람들 앞에서 내가 이렇게 말해야 되겠습니까? '미안하다. 나에게도 나만의 사정이 있었다. 당신들은 어쩔 수 없이 죽어주어야만 했다.' 제가 그렇게 말해야 되겠습니까? 파이몬, 대답하십시오. 그들이 저의 변명을 들어주어야만 합니까?”

    “…….”

    “나의 사정 때문에 당신들, 수십만의 생명이 죽어야 했다는 말이 애당초 가능하냐는 말입니다. 하! 그거 참 대단한 사정이로군요.”

    입가가 이죽거렸다.

    의도적으로 이죽거리는 게 아니었다. 목소리가, 어조가, 표정이, 나의 통제를 벗어나서 제멋대로 움직였다. 좋다. 어디 마음대로 움직여봐라. 뺨을 맞고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꼴불견이겠지.

    “어디 십만의 생명 앞에 가서 말해보십시오. 국가를 위해서 당신들은 희생되었으며, 따라서 당신들의 죽음은 필수불가결했다고. 국가가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정의라고 부르든 신이라고 부르든, 공화주의라고 부르든 마음대로 하십시오……개소리입니다! 전부 개소리입니다! 당사자들이 납득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내 손이 파이몬의 손목을 강하게 잡았다. 손목을 부러트릴 기세로.

    “수십만의 죽음이 필수불가결한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절대로! 어디 피해자들 앞에서 그딴 식으로 입을 놀려보십시오……제가 가만히 두지 않을 겁니다. 맹세컨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강자를 제가 전부 죽여버릴 것입니다!”

    “…….”

    “내일부터 파리시오룸의 부속 도시들은 모조리 불타오릅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겠다. 선한 자와 악한 자도 가려지지 않는다.

    오로지 앙리에타와 아가레스를 없애기 위한 작전이 철두철미하게 이루어진다.

    “내 행위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어야 합니다. 이해의 여지도 없어야 합니다! 파이몬, 알겠습니까?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십만을 죽였고, 이것이 유일무이한 진실이며――절대적으로 확고해야만 하는 진실입니다!”

    “…….”

    “이건 당신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에요. 내가 죽인 십만의 생명과 나 사이의 문제입니다. 멋대로 끼어들지 마십시오.”

    나는 파이몬의 손목을 내리끌었다. 그녀는 내 힘에 떠밀려 땅바닥에 넘어지듯이 주저앉았다. 무력으로 따지면 그녀가 압도적으로 우월한데도.

    온몸에서 당장 약을 피워대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망토를 뒤적거려서 담뱃대를 꺼내들었다. 파이프 구멍에 연초를 꾹 눌러 담으려고 했지만 그만 놓쳐버렸다. 담뱃대가 땅바닥에 굴러떨어졌다. 다시 주워들었지만 또 놓치고 말았다.

    “제기랄.”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금단증상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빌어먹을 기분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나는 담뱃대를 다섯 차례 정도 들었다가 떨구었다. 병신 같았다. 아니, 정말로 병신인가……웃음밖에 안 나오는군.

    나는 파이프를 짓밟았다. 작센에서 도기 장인이 특별히 제작한 사치품이었다. 간단하게 부러지지도 않았다. 그저 땅바닥에 쑤욱 박혔을 뿐이다. 짜증이 풀리기는커녕 화가 더 쌓였다.

    “후우.”

    미쳐서는 안 된다. 미치는 것 또한 변명이다. 나는 그걸 알고 있다……분노를 참아라.

    눈을 감고 호흡해라. 간단하게 생각하라. 손이 떨리는 것쯤은 얼마든지 제어할 수 있다. 수십만의 생명을 도륙한 학살자는 알고보니 미치광이였습니다, 라는 결말 따위 용납할까보냐. 미치는 것도 권리이다. 나한테 그런 권리 따위는 없다…….

    조금은 침착해졌다. 나는 파이몬한테 등을 돌리고 걸어나갔다.

    무언가가 망토를 잡았다. 아마도 파이몬의 손끝이겠지.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툭, 하고 무언가가 끊어지듯 망토를 잡아당기던 것은 이윽고 멀어졌다.

    이후로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엔가 이미 개인 막사에 들어와 있었다. 막사에서는 데이지가 책을 읽고 있었다. 녀석은 내 모습을 보고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신경 쓰지 않고 모포에 털썩 누웠다.

    “칠칠맞게 약이라도 잃어버렸나요, 아버님?”

    데이지가 말했다. 나는 데이지한테 등을 지고 몸을 구부리고 있었으므로 목소리는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이제 약은 안 한다.”

    “제 기억력이 맞다면 아버님이 약을 끊겠다고 다짐하는 게 정확히 마흔여섯 번째입니다. 개도 세 번이면 자기 잘못을 깨닫는다는데, 작심삼일에도 정도가 있다고 생각…….”

    “너 잘난 거 알고 있으니 닥쳐라.”

    조용해졌다.

    데이지가 책장을 부드럽게 넘기는 소리가 막사에 간간히 퍼졌다. 모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럴 때는 잠이 별로 필요없는 마왕의 체질이 원망스러웠다. 잠이라도 퍼질러 자면 기분이 환기될 텐데 말이다. 가슴만 답답했다.

    내가 신음하듯이 중얼거렸다.

    “……술을.”

    “하아.”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 화를 내고 싶지도 않았다.

    데이지가 말했다.

    “아버님. 아버님의 책략은 확실히 효과적입니다. 하지만 구태여 공화파와 왕당파의 구도를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요? 마족들이 인간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다. 그것만으로도 브르타뉴의 군주는 도시를 책임져야 하는 압박에 시달릴 것입니다.”

    “……멍청하기는. 그래서야 외국이 개입해버리지 않느냐.”

    브르타뉴군을 압박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다. 앙리에타 여왕을 고립시키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이다.

    “공화주의자들이 왕정주의자에게 복수한다. 그런 명분이 있어야 주변국들이 개입해올 가능성이 적어진다. 단순히 마족에 의한 학살이 되어서야 반(反) 월맹군이 또 다시 결성될 뿐이야…….”

    “과연. 하지만 버니시아나 사르데냐는 그렇다 쳐도 카스티야 왕국은요?”

    “상관없어. 카스티야가 개입하면 이번 전쟁은 본격적으로 국제전이 되겠지. 사르데냐와 버니시아에게 원호를 요청하고, 프랑크 자체를 난장판으로 몰고 간다……나쁘지 않아…….”

    물론 최선의 경우는 아니다. 그렇게 되면 전쟁이 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되어버린다. 카스티야 왕국, 버니시아 왕국, 사르데냐 왕국, 전부 나와는 인연이 일절 없다. 바타비아 공화국이 참전한 지금 정도가 딱 좋다…….

    “그걸 위해서 황태후나 황제를 손에 넣는 편이 좋겠지……명분을 확실하게 가져가는 거다…….”

    “그렇다면 아버님, 둘 중 어느 쪽이…….”

    데이지가 자꾸 뭔가를 질문했다. 나는 꼬박꼬박 대답해주었지만 점점 의식이 흐릿해졌다. 이미 눈을 감고 있는데도 또 다른 눈꺼풀이 내려오는 것처럼 어두워졌다. 귀로 무언가가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더 이상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날은 오랜만에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  *  *

    작전이 결정되고 바로 다음날. 약탈을 빙자한 학살이 실행되었다.

    이 시대에 약탈이란 일상적이었다. 하지만 우리군은 정도가 심했다. 성인 남성은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 여자와 어린애도 죽였다. 인간들은 비명을 지르며 제발 용서해달라고 빌었지만, 우리의 대답은 확고했다.

    “사 년 전에 너희가 죽인 이들도 그렇게 빌었을 터이다.”

    문답무용.

    파리시오룸 근방의 마을과 도시에서 인간들이 묶인 채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모두 나무에 묶여서 파리시오룸의 남쪽 성문 앞에 놓였다. 성벽 위에서는 브르타뉴의 군사들이 명백히 당황한 기색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은 사 년 전, 무고한 인민을 단지 공화주의자라는 명목으로 학살한 전쟁범죄자들이다. 그 범죄를 조장한 자가 브르타뉴의 여왕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내가 성량 확대 마법도구를 통해 소리 높여 말했다.

    “브르타뉴의 군주여! 만일 그대에게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이들을 대신해서 죄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용기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당장 성문을 열고 항복하라. 만일 다섯 시간이 지나도 대답이 없다면 이들에게 학살의 죄를 묻겠다.”

    예상대로라고 할까. 다섯 시간이 지나도 반응이 없었다. 성벽 위에서 병사들이 분주하게 오갔지만 앙리에타 여왕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이 대답인가, 여왕이여.”

    나무통에 매달린 오십 명의 인간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절망에 찬 자, 눈을 감고 끊임없이 기도문을 올리는 자, 악을 쓰다가 지쳐 고개를 떨군 자, 수십 가지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그들 곁에 대기하고 있는 아군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처형을 집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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