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94화 (294/510)
  • 00294 꼭두각시 전쟁  =========================================================================

    *  *  *

    아군의 본대가 파리시오룸 남서쪽 방면에 합류했다. 이로써 우리군은 승리를 거머쥐었다.

    브르타뉴는 소중한 식량창고가 위치한 요새를 우리에게 빼앗겼다. 요새의 이름이 무척 길었다. 현자-제르맹-앙-레 요새였다. 기억하기도 부르기도 귀찮았다. 우리측 간부들 사이에선 <군량고>라고 멋대로 줄여서 불렀다.

    보병 칠백 명과 기병 이백 명이 요새를 지키고 있었다. 꽤나 견실한 수비 병력이었다. 하지만 무려 일만 명의 공화국군이 몰아닥치자 요새는 두 시간도 버티지 못했다. 이곳에 대군이 몰려들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겠지. 완벽한 기습이었다.

    유일한 희망은 앙리에타가 원군을 보내는 것이었지만……안 되었군. 부대가 출발하는 시점 자체가 너무 달랐다.

    우리는 바타비아 공화국군을 먼저 도하시키고 재빨리 출발시켰다. 그에 반해 브르타뉴군은 전투에 발이 묶여 있었다. 두 시간 정도가 낭비되었지. 전투를 일으킨 시점에서 이미 앙리에타는 실책을 범한 것이었다.

    물론 결과론적인 얘기다.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앙리에타는 과감하게 승리를 거둔 명장으로 역사에 남았을 테고, 정반대로 우리는 도하하는 와중에 각개격파 당한 머저리로 묘사됐을 거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결과가 모든 것을 평가해준다…….

    파리시오룸의 화재는 베르시 준남작에게 의뢰하였다.

    대대적인 숙청이 일어났다고 소식을 들었을 때는 덜컥했다. 다행히 베르시 준남작은 피바람을 살짝 비껴나갔다. 프랑크의 애국전선과 우리군을 이어주는 중개자가 준남작이었다. 그가 살아남은 것은 천운이었다. 실제로 준남작은 훌륭하게 제 역할을 다해주었다.

    앙리에타는 지금쯤 처절하게 한탄하고 있겠지.

    녹색 장미 기사단이라는 최고 전력을 잃었고 군량미마저 상실했다. 이걸로 브르타뉴군은 운신의 폭이 극단적으로 좁혀졌다.

    앙리에타, 너는 회전에 지나치게 집착했다. 전쟁이란 결국 속고 속이는 일이다. 브르타뉴군은 배수진을 취함으로써 자신들의 목적이 회전(會戰)에 있다고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반면에 우리는 끝까지 이쪽의 의도를 숨겼다. 장기전을 치루는 것처럼 요새를 만들었고, 파리시오룸을 노리는 것처럼 도하했다. 그러나 진짜 목적은 군량미였다. 이중의 함정에 앙리에타는 걸려서 넘어졌다.

    정오 무렵. 라우라와 나는 개인 막사에 함께 있었다.

    아군은 결정적인 승기를 손에 넣었지만 아직 전쟁이 끝나진 않았다. 브르타뉴의 군대는 건재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안 되겠지. 파리시오룸 남서부에 새로이 주둔지를 건설하자마자, 우리 두 사람은 작전회의에 들어갔다.

    “이제 브르타뉴군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이다.”

    “도시에서 농성전을 벌이든지, 아니면 전면적으로 후퇴하든지.”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운을 떼면 내가 이어서 말했다. 우리는 서로의 작전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브르타뉴군은 농성전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저들은 회전의 신봉자일뿐더러, 장기적인 농성전을 위한 군량미까지 탈취당했다. 하루라도 빨리 철퇴하고 싶겠지만…….”

    “어디로 철퇴할 것이냐가 문제지요.”

    프랑크에는 내전의 영향이 짙게 남아 있다.

    파리시오룸을 중심으로 해서 서쪽과 남쪽은 왕당파가 강하다. 공화주의자란 공화주의자는 싸그리 말살시켰으니 당연하다.

    반면에 프랑크의 북쪽은 명실상부 공화파의 성지가 되어 있다. 내전에서 독립을 선언해버린 자유도시들이 밀집한 지역도 북부이다.

    즉, 앙리에타 입장에서는 자신들에게 그나마 우호적인 서쪽이나 남쪽으로 도망치고 싶다. 황제와 황태후를 납치하여 데리고 다니면 명목상이나마 '황제의 명령'으로 정당하게 전쟁세를 거둘 수도 있다. 합법적으로 군량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우리가 남쪽과 서쪽으로 향하는 길목을 틀어막고 있다.

    브르타뉴군이 남쪽-서쪽으로 후퇴하기 위해서는 어젯밤 우리가 그러했듯 강을 건너야만 한다.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겠지만, 라우라와 나는 저들이 도하하는 것을 얌전히 지켜볼 생각이 전무하다.

    “와이번 부대에게 명령해서 파리시오룸의 동태를 감시해야 한다.”

    “이미 가미긴을 통해서 전달해두었습니다. 부대가 절반씩 세 시간마다 번갈아가며 파리시오룸을 완벽하게 감시하고 있지요.”

    내 대답에 라우라가 싱긋 웃었다.

    “역시 나의 주군이다. 완벽한 부관이란 바로 주군을 가리킨다.”

    “……뭔가 주군과 신하의 역할이 바뀌어도 한참 뒤바뀐 것 같지만요.”

    주군을 부관으로 부려먹는 신하는 아마 라우라가 유일하지 않을까.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전쟁에서 승리할 수만 있다면.

    브르타뉴군이 움직이면 와이번 감시 부대를 통해서 즉각 보고가 이루어진다. 우리는 적군이 강줄기를 넘어오지 못하도록 움직일 예정이다. 물론, 앙리에타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와이번들이 자기네를 감시하는 것을 눈치 챌 거다.

    “브르타뉴 여왕은 억지로라도 도하를 시도하거나, 아니면 도하를 포기할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우리에게 유리하군요.”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군이 도하를 시도한다면 우리는 유리한 입장에서 전투를 펼칠 수 있다. 만약 저들에게 도하의 위험을 무시해도 될 정도로 강력한 부대가 있다면 이야기가 어려워지나…….”

    “바로 그 부대를 없애기 위해 지난 밤에 노력했지요. 안 그렇습니까, 라우라?”

    녹색 장미 기사단.

    이들은 비정상적으로 강하다. 도하가 이루어질 때 군대가 약해지는 것은 상식이지만, 녹장미 기사단은 아군의 도하를 원호하면서 적군의 공격을 너끈히 막아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난 밤, 다소 위험을 무릅써서라도 녹장미 기사단을 전멸시켰다.

    사실 제1차 방어선에서 제4차 방어선까지 병력을 분산시키는 대신, 아예 제1차 방어선에다 전군을 집중시킬 수도 있었다. 그렇게 했다면 방어선은 돌파당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우리는 의도적으로 돌파를 허용했다.

    그 결과 브르타뉴군은 비장의 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단순히 최고 전력이 상실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상황에서 부담없이 도하에 뛰어들 가능성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하긴, 앙리에타가 이 사실을 깨달으려면 아직 한참 시간이 남았겠지만…….

    “브르타뉴군은 이제 북쪽으로 퇴각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

    자신에게 적대적인 영역으로 앙리에타 여왕은 스스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부족한 식량은 북부의 마을과 도시를 약탈하면서 보충하겠지.

    그건 라우라와 내가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  *  *

    정오가 지나고 지휘관들이 막사에 집합했다.

    대체로 마왕들은 얼굴 표정이 밝았다. 전략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표정이 어두우면 이상했다. 다만 파이몬, 바싸고, 제파르 대장, 이렇게 세 명만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파이몬은 예전부터 라우라의 전략을 마뜩치 않게 여겼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승리했기에 삼가한다, 그런 느낌이 강했다.

    바싸고는 그냥 심통이 난 거다. 바싸고에게 어젯밤은 악몽이나 다름없겠지. 다시는 아가레스랑 싸우고 싶지 않다는 분위기가 풀풀 풍겨났다. 물론 내 마음속에서 바싸고는 이미 아가레스 전담 마크 선수로 내정되어 있었다.

    반면에 제파르 대장은 명백하게 화를 참고 있었다.

    “부사령관. 나는 이번 작전에 관하여 일언반구도 듣지 못했소. 해명을 요구하오.”

    노장의 주름살은 당장이라도 분노로 폭발할 것 같았다.

    우리는 제1차 방어선이 뚫릴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승전을 거두었지만, 정작 제1차 방어선을 담당한 제파르 대장한테는 사전에 어떤 정보도 주어지지 않았다. 제파르 대장은 자신이 뚫리면 전군이 위험해진다는 생각에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분투했다.

    라우라가 덤덤하게 말했다.

    “이번 작전은 제1차 방어선이 필사적으로 싸워주어야만 성립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사전에 정보를 알고 있었다면 덜 용맹하게 싸웠을 것이라는 얘기오?”

    “아군에 대비책이 있는가 없는가는 천지차이입니다. 적어도 마음가짐에서 차이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부정하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제파르 장군.”

    제파르 대장이 입술을 닫았다. 납득은 간다. 그러나 분노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제파르 대장의 표정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었다.

    “이번 전투에서 최고의 공훈을 세운 사람은 단연 제파르 장군입니다.”

    라우라가 손뼉을 쳤다.

    막사 바깥에서 호족 병사가 품에 군기를 안고 들어왔다. 마왕들이 의아스러운 눈으로 전령을 바라보았다. 제파르 대장만이 그게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저것은…….”

    “예. 녹색 장미 기사단의 군기입니다.”

    라우라가 손짓하자, 병사 한 명이 다가가서 깃발을 주욱 폈다.

    “총사령관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를 대리하여 본관이 선언하니, 전투의 최고 공로자인 제파르 장군에게 군기를 포상하겠습니다.”

    “…….”

    제파르 대장의 눈동자가 떨렸다. 자그마치 칠백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군기였다. 유구한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약탈당한 적 없는 깃발이기도 했다.

    평범한 군기는 200골드에서 500골드 가량의 값어치를 지닌다만……녹장미 기사단의 군기는 감히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를 가졌다. 자신의 마왕성에 저 군기가 내걸린다면 대단한 명예였다.

    제파르 대장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오백 년 전에 당한 설욕을 지금에야 갚게 되었다. 어찌 회한이 없겠는가.

    “……고맙소. 부사령관.”

    제파르 대장이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장은 가슴에 오른손을 올리고 경례했다. 바르바토스를 주군으로 모시는 대장에게 있어 사실상 최고의 예의나 다름없었다.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투에는 마땅히 명예가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브르타뉴의 군대는 건재합니다. 본격적인 논공행상은 확실한 승리가 이루어지고 난 뒤에 계속하겠습니다.”

    마왕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뭘 감추랴, 이번에도 바싸고였다. 내가 일부러 바싸고와 시선을 맞추어서 활짝 웃어주니 그제서야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정말 귀여운 양반이라니까.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언제까지나 순수한 당신으로 남아주었으면 한다.

    분위기가 정리되자 라우라가 말했다.

    “우리는 내일부터 파리시오룸 근방을 철저하게 약탈할 것입니다.”

    “응? 이제 군량은 충분하잖아. 구태여 인상 나빠지게 약탈할 필요가 있어?”

    바르바토스가 반문했다. 지당한 의문이었다. 이 시대에 약탈은 일상적이었으나, 하지 않아도 좋다면 당연히 안 하는 편이 나았다.

    라우라가 시선으로 내 쪽을 가리켰다.

    “거기에 대해서는 단탈리안 장군이 설명해줄 것입니다. 그가 이번 작전의 입안자입니다. 단탈리안 장군.”

    “예.”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좌중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마왕 동지 여러분께는 생소하겠습니다만, 프랑크에선 왕당파와 공화파가 대립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브르타뉴군은 왕당파에 속하고, 우리와 함께하는 바타비아군은 공화파에 속하지요.”

    대다수의 마왕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 세계의 정치 따위 관심을 가져봐서 뭐 하겠는가, 그런 얼굴들이었다. 쯧. 댁들이 월맹군에서 왜 연전연패했는지 아주 잘 알겠다.

    내가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 년 전, 브르타뉴군을 주축으로 하여 프랑크에선 대규모의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못해도 십만 명이 넘는 공화주의자가 전국 곳곳에서 몰살되었지요. 즉, 프랑크의 공화파는 왕당파에 대해 어마어마한 증오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증오심을 이용합니다.”

    여전히 마왕들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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