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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293화 (293/510)

00293 꼭두각시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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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에타 여왕은 기병대와 함께 먼저 내달렸다.

이날 밤 돌격에 돌격을 거듭한 기병대는, 가혹하게도 강행군이라는 또 다른 역할을 맡았다. 갑옷이 뭉텅하게 부숴져 있었다. 군마는 두 시간에 걸쳐서 체력이 떨어졌다. 그렇지만 브르타뉴의 기병대는 다시 한 번 힘을 끌어올렸다.

“반드시 적군보다 앞서 파리시오룸에 입성해야 한다!”

마르네 강줄기를 사이에 두고 양군이 경주했다. 브르타뉴의 기병은 신속하기로 유명했다. 조건만 같다면 적군에 비해 늦게 도착할 걱정이 없었다.

그러나 앙리에타 여왕은 이미 시간이 꽤나 늦어버렸음을 알고 있었다.

첫 번째, 브르타뉴군은 이제야 행군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마왕군은 도하를 완료한 부대들부터 미리 출발하고 있었다. 전투에 두 시간 가량이 소요된 것을 감안하면, 마왕군은 이쪽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움직였다…….

두 번째, 방금 전투에는 바타비아 공화국군이 일절 참가하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간 병사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제아무리 적군의 다수가 마족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인간이 눈꼽만치도 안 보이다니 어찌된 일인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공화국군은 도하 부대에 속했어.’

앙리에타 여왕이 거칠게 몰며 생각했다. 왜 하필 인간군을 먼저 도하시켰을까. 적군의 목적이 파리시오룸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정답은 쉽게 도출되었다.

‘도시에 안전하게 입성하기 위해서야.’

만약 마물로 이루어진 부대가 파리시오룸에 입성하려 든다면 시민들은 크게 혼란에 휩싸이겠지. 설령 절대로 약탈하지 않겠노라고, 우리는 마왕군이 아니라 똑같은 인류의 군대라 강조한다 할지라도, 당장에 병사의 얼굴이 오크인 것이다. 시민들이 무서워하지 않는 쪽이 되레 이상하다.

그렇기에 인간 부대를 먼저 도하시켰다. 시민들이 편안히 입성을 받아들이도록.

“단탈리안……!”

처음부터 상대방은 완벽하게 역할을 갈라놓았다. 전투력이 높은 마족 부대는 전쟁터에 배치했다. 이들이 브르타뉴군을 상대하는 동안, 전투력은 낮되 정치적으로 유용한 인간 부대가 도시로 행군했다.

본래 전쟁이 정치의 연장선상이라 회자되지만 이건 정도가 심했다. 이날 밤에 펼쳐진 전투는 전부 눈가림에 불과했다. 진정한 목적은 파리시오룸에 입성하는 것. 더 나아가, 황제와 황태후를 탈취하는 것. 적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적인 목적밖에 없었다…….

“전하,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기병대장의 말에 앙리에타 여왕이 생각의 바다에서 깨어났다.

브르타뉴 기병대는 파리시오룸 외곽에 다다랐다. 걸린 시간은 사십 분. 군마의 체력을 무시하고 최고 속력으로 내달린 셈이었다.

“성문을 열어라!”

“브르타뉴의 주인께서 여기 계신다!”

기수들이 깃발을 높이 들었다. 브르타뉴를 상징하는 흑색 백합이 펄럭였다.

파리시오룸의 동쪽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깜짝 놀랐다. 그들은 다급하게 성문을 열었다. 하지만 도개교는 별 수 없이 느릿느릿하게 내려왔다.

“천치 같은 놈들! 얼른 내리지 못할까!”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빨리 내리면 다리가 부서질 수가 있어서…….”

기병대장들이 경비병을 윽박질렀다.

브르타뉴의 병사는 명백히 조바심에 쫓기고 있었다. 당연했다. 군주의 마음은 부하들에게 전염된다. 앙리에타 여왕이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자, 휘하 장수들과 병졸들에게도 그 영향이 뻗치는 것이었다.

“……후우.”

앙리에타는 부하들이 경비병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고 자신이 지나치게 서둘렀음을 알아차렸다. 군주는 언제 어디서나 냉정하고 침착해야 했다. 그런 기본적인 사항을 잠깐 잊어버리고 말았다.

앙리에타가 의식적으로 마음을 편하게 가다듬었다. 그녀는 도개교가 아니라 성벽을 쓰윽 훑어보았다.

‘성벽을 지키는 병사가 적다. 깃발이 바람에 접혔는데도 펴두지 않았어.’

깃발이 제대로 펴져 있는가, 아니면 볼썽사납게 접혀 있는가. 그것만 보아도 부대의 군기(軍紀)를 가늠할 수 있었다. 현재 성벽 위에는 군데군데 엉망으로 구겨진 깃발이 있었다. 깃발 따위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는 얘기였다.

게다가 서서히 새벽이 밝았는데도 파수병이 지나치게 적었다. 최소한의 인원으로 동쪽 성문을 지키고 있었다. 달리 말해, 파리시오룸 어딘가에 무슨 일이 벌어져서 병사들이 그쪽으로 차출되었다는 걸 뜻했다.

‘공화국군이 파리시오룸 남쪽을 점령했거나 적어도 일부를 점거했겠지.’

그리고 아마도, 황태후나 황제가 별궁을 탈출하여 그곳에 합류했다…….

공화국군이 시내 일부를 점령했다면 이쯤에서 전투를 각오할 필요가 있었다. 아직 마왕군의 본대가 합류하지 못한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 덜컹.

도개교가 마침내 내려왔다.

기병들이 말허리를 차려는 찰나였다. 앙리에타가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제군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이곳에 도착했어. 이 대륙에서 제군들보다 빠른 군대는 단언컨대 존재하지 않아. 그런데도 우리가 늦었다면 하늘을 원망할 일이지, 제군들이 자책하거나 누군가를 탓할 일이 아니야.”

“…….”

기병들이 여왕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피로에 젖었으나 눈빛만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조급함은 실수를 낳고, 실수는 전투에서 패착으로 이어진다. 정예병일수록 무엇보다 조급한 마음을 가장 위험하게 여기는 까닭이 여기 있다.

병사들이 조급해지느냐 마느냐는 지휘관에게 달렸다. 지휘관에게 필요한 것은 병사들의 믿음. 설령 전황이 불리해져도 '저분께서 우리를 지휘하시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느끼게 해주는, 다소 광신적인 유대감.

그 유대감을 복돋우기 위하여 앙리에타가 입을 열었다.

“우리의 조국은 좁아터진 반도다. 땅은 소금기에 찌들어서 농사 짓기도 힘들지. 우리의 선조들은 오래 전부터 대륙으로, 프랑크로 진출하기를 열망했어. 자그마치 칠백 년 동안 내려온 염원이야. 그 염원을 다름 아니라 제군들이 이루어냈어.”

“…….”

“달리 말해, 제군들은 브르타뉴 역사상 최강이다.”

앙리에타가 투구를 벗어서 높이 치켜들었다.

“감히 어느 누가 자그마한 반도의 국가가 대륙을 호령하리라 상상했겠나! 하지만 우리는, 브르타뉴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브르타뉴는 꺾이지 않는다! 제군들, 그렇지 않은가!”

기병들이 투구를 벗어들고 소리 질렀다.

“브르타뉴 만세!”

“여왕 전하 만세!”

연거푸 함성이 터졌다. 장수와 하사관은 여왕의 의도를 파악하고 열광적으로 화답했다. 한 목소리로 만세를 외치는 동안 병사들의 마음에서 조급함이 잦아들었다. 앙리에타가 고개를 끄덕이고 도개교를 건넜다.

“브르타뉴의 영광을 뵈옵니다.”

도개교를 건너자, 수문장이 앙리에타를 맞이했다. 프랑크인이 아니라 브르타뉴인이었다. 앙리에타가 얼마나 파리시오룸을 뼛속까지 장악했는지 입증되고 있었다.

“수고했어. 보고를.”

“예. 파리시오룸의 동문은 현재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

앙리에타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상이 없다니. 파수병은 다 어디로 사라졌어?”

“아, 그것이.”

수문장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시내에 큰 불이 났습니다. 경비대에서 급히 원호를 요청해서 소관의 재량으로 병사를 보냈습니다.

“…….”

문득, 정체 모를 불안감이 앙리에타의 가슴에서 번졌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수문장이 계속해서 따박따박 보고했다.

“그 때문에 파수에 잠시 소홀하게 되었습니다만, 현재 병사들이 무사히 귀환하여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비상시에 언제라도 출동할 수 있도록 철저히 방비하고 있습니다.”

“……불은? 무엇 때문에 불이 난 거야?”

“부두에 정박한 상선들에서 화재가 발생했다고 하옵니다. 천만다행으로, 인명 피해는 거의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수문장은 자랑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전시에 예상치 못한 사고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내 경비대와 성문 경비대가 협력하여 신속하게 대처했다. 인명 피해도 없었다. 자칫 큰 혼란으로 이어질 사고를 훌륭하게 막아낸 것이었다. 수문장은 위대한 여왕 전하에게 직접 칭찬을 들을 기회라고 여겼겠지.

그러나 수문장의 생각과 다르게 여왕은 점점 표정이 굳어졌다.

“그것 말고는? 시내에 아무런 일이 없었어?”

“예. 소관이 알기로는 화재 이외에 별다른 사고가 없었습니다.”

“…….”

앙리에타가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수문장의 어조를 들어보건대, 공화국군은 아예 파리시오룸에 접근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만일 남쪽 성문이 돌파당했거나 최소한 포위를 당했다면 응당 보고가 이루어졌겠지.

또 다른 가능성은 화재의 혼란을 틈타서 황태후나 황제가 빠져나간 것이지만……이것도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별궁에는 앙리에타가 특별히 신경 써서 경비 병력을 배치해두었다. 황태후나 황제가 탈출하면 즉각 동서남북의 성문에 협조를 요청하게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해답은 둘 중에 하나였다.

별궁의 경비대가 협조도 요청할 틈이 없이 완벽하게 몰살당했고, 그리하여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황태후와 황제가 어디론가 탈출했거나――.

“……공화국 놈들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이냐.”

――애시당초 적군이 파리시오룸으로 오지 않았거나.

앙리에타가 친위대를 이끌고 시내에 진입했다. 꼭두새벽부터 기병들이 대로를 지나치자, 시민들이 호기심과 불안감에 찬 시선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앙리에타는 시민들을 다독일 여유도 없이 별궁으로 향했다.

황제와 황태후가 무사하냐는 질문에 별궁의 수비대장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전하, 철통같이 지키고 있사옵니다.”

“…….”

혹시 몰라서 앙리에타는 황태후와 황제의 안위를 확인해보라고 명령했다. 잠시 뒤, 시녀들이 돌아와서 어떠한 문제도 없노라고 보고했다.

앙리에타가 중얼거렸다.

“정말 화재가 일어났을 뿐이잖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왕군은 파리시오룸 남쪽 성문을 점거할 기회가 있었다. 최소한 포위라도 할 수 있었다. 프랑크의 귀족들과 내응하여 충분히 황태후나 황제를 빼돌릴 법했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달랐다. 프랑크의 귀족들이 소란을 일으키지도 않았고, 남쪽 성문이 포위되지도 않았다…….

모든 가능성이 사라지고 질문만이 남았다. 공화국군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앙리에타가 피로해진 눈으로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머릿속이 멍멍했다.

‘기껏 위험천만하게 도하를 해놓고서 파리시오룸이라는 목적을 놓치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설마 녹색 장미 기사단을 끌어들여서 전멸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었을까. 그렇기에는 너무나 장대한 움직임이었는데……잠깐, 목적이라고?’

앙리에타가 멈칫했다.

‘파리시오룸이 목적이 아니라면?’

앙리에타의 시선이 강줄기를 좇았다. 그리고 지도의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 멈추었다.

침묵이 있었다.

앙리에타는 한참이나 고개를 떨구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이제 완연하게 새벽이 되었다. 저 멀리서 어두운 햇볕이 비추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종이 다가와 합스부르크 공화국에서 급하게 전령을 보내왔다고 말했다. 전령이 전달해준 문서에는 엘리자베트 통령이 친필로 써재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단지 두 문장으로 이루어진 친필 문서였다.

─ 군량고. 조심할 필요가 있다.

바스락, 하고 소리가 났다. 앙리에타의 손안에서 종이가 구겨졌다.

앙리에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입끝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미소를 지으려다 실패한 것처럼. 그녀의 입술 틈새에서 신음에 가까운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두 시간은 늦게 보냈어. 엘리제.”

같은 시각.

브르타뉴의 군량고가 위치한 요새에는 바타비아 공화국의 국기가 꽂혀 있었다.

============================ 작품 후기 ============================

설정란에 지도를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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