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92화 (292/510)

00292 꼭두각시 전쟁  =========================================================================

─ 푸그르르!

수십 마리의 말이 구슬프게 비명을 질렀다. 땅에서 치솟은 대검들이 뱃가죽을 일직선으로 그어버린 것이었다. 군마의 질기고 튼튼한 가죽이 힘없이 갈라지며 희여멀건 창자를 와락 뱉어냈다.

“카아아악!”

군마들이 자기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여 흙바닥에 처박혔다. 기마병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흔 명이 넘는 병사가 자신의 애마와 함께 땅에 얼굴을 들이받았다. 먼지가 피어오르며 육중한 장갑의 병사들이 나뒹굴었다. 이들은 목뼈가 부러져 즉사했다.

단 일격에 정예병력 수십이 몰살당했다.

어쩌면 기사단을 칭찬해야 할지도 몰랐다. 불의의 습격을 사각에서 당했다. 그런데도 피해는 고작 수십 명. 신기에 가까운 기마술로 대검을 피한 것이었다. 평범한 기병대였다면 지금 시점에서 이미 반토막이 나버렸겠지.

하지만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앙리에타 여왕은 칭찬을 입에 담지 못했다.

“자아. 어디 진득하게 춤을 추어볼까요.”

“화살 세례를 퍼부어라. 무얼, 화살값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쿤쿠스카 상회에서 전적으로 지원하겠다는 희소식을 전달하마.”

“예하 군단장들에게 명령한다.――적군을 압살하라.”

파이몬이, 마르바스가,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일제히 공격 명령을 내렸다.

처참한 포위전이 시작되었다.

기습의 충격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기사단에게 공세가 쏟아졌다. 앞쪽과 양옆, 세 방향에서 화살과 돌무더기 그리고 마법이 쇄도했다. 기병들이 찢어지는 목소리로 악을 썼다.

“하마(下馬)하라! 말의 시체를 방패로 삼아서 방어해!”

“바보 같은 놈, 여기서 돌격을 멈추어봤자 화살받이가 될 뿐이다!”

부기사단장이 소리쳤다. 그녀의 판단은 옳았다.

“돌진해! 무조건 앞으로 돌진하는 것이다!”

녹장미 기사단이 뚫어놓은 길목을 통해서 계속하여 기병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제 와서 기사단이 방향을 선회하여 후퇴한다면, 뒤쫓아오는 아군과 맞부닥치게 되어 일대 혼란이 벌어지겠지.

삼면 포위가 완성된 상황인데 아군끼리 혼란에 빠지다니. 자살도 그만큼 멍청한 자살이 따로 없다. 죽든지 살든지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는 편이 차라리 낫다.

“전군, 돌격!”

“죽음을 두려워 마라!”

목적지는 적군의 심장인 사령부. 그곳에 타격을 집어넣으면 이쪽이 승리를 거머쥔다.

부기사단장이 직접 최선두로 달려나갔다. 기사단이 다시금 말발굽을 들어올렸다. 그들은 월도(月刀)나 곡도(彎刀)를 휘저으며 돌격했다.

“훌륭하군.”

라우라가 감탄했다.

사방에서 화살이 쏟아지든 마법이 들이닥치든 사정없이 나아간다. 아마 저들에게는 죽음조차 공포를 안겨주지 못하리라. 인간으로 태어난 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런 죽음을 달갑게 맞이하는 기사단의 모습은 이미 초인적이었다.

허나, 죽음조차 뛰어넘은 성벽이 나타난다면 어떠할까.

“제4방어선. 영격하라.”

라우라가 지휘봉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병사가 깃발을 흔들었다.

깃발이 흔들리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제4방어선을 맡은 지휘관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아아, 라우라. 굳이 명령을 내릴 필요도 없다고.”

제4방어선 지휘관.

불명의 마왕 바르바토스.

“우리 아이들한테 줄 먹잇감이 아주 생생하게 잘 보이거든.”

자그마한 체구의 마왕 뒤에는――사천오백의 좀비와 구울이 떼거지로 서 있었다.

썩은 악취가 풍기며 살기로 번들거리는 시체들이 차가운 숨결을 토해냈다. 넓은 평원에서 오직 이곳만이 영하로 내려간 것처럼 스산했다. 가장 더럽고 가장 추악한 군대가 그곳에 있었다.

살점이 썩어 문드러질지라도, 차마 생명체라 불리지 못할 신세에 전락할지라도, 이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자신들의 영원한 군주와 영원토록 싸움을 이어나갈 것. 그뿐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가장 순수한 전사라 불리운다.

한 좀비가 으르렁거린다.

─ 여기 우리, 불패하고 불사하는 군대가 있나니.

해골의 병사들이 음산한 마나의 파동으로 화답한다.

─ 영원토록 행군하는 발퀴레일지어다.

사천오백의 언데드 몬스터가 군가를 불렀다. 그것은 차라리 장송곡이라 불러야 마땅했다. 성대가 썩어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구울, 입에 구멍이 뚫려 소리가 새어나가는 좀비. 노랫소리는 쉬어빠진 저음이 되어 안개처럼 땅에 낮게 내려앉았다.

“좋다, 제군들. 나 바르바토스는 그대들의 영원한 고용주로서 계약을 이행한다.”

바르바토스가 한 발자국 앞서 걸어나갔다.

그러자 사천오백의 몬스터가 뚜벅, 하고 발을 내딛었다.

“유일한 계약을. 무서운 계약을. 전사가 영혼으로 나눈 계약을.”

바르바토스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갔으며, 그에 뒤따라 사천오백의 발걸음이 대지를 진동시켰다. 그들의 앞에 오러와 신성력을 휘감으며 돌격해오는 기사단이 비추었다.

“더 많은 전투를.”

어느새 사천오백의 마물은 뛰고 있었다.

그 선두에는 파도와 같은 무언가가 앞서 나가고 있었다. 새까만 물결이었다. 검은 물결은 점점 더 거대해지더니 다음 순간, 흑기사들이 형태를 갖추었다. 흑기사들은 대검을 치켜들고 질주했다.

─ 캬아아아악!

가래침이 섞인 듯한 함성이 터져올랐다. 바르바토스가 중얼거리는 말은 이미 고함과 노성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바르바토스는 말했다. 어차피 그녀와 전사들은 서로 말소리를 통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했는가. 하찮은 인간이여, 좋다.”

바르바토스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이제 죽음의 이후를 보여주마.”

기사단과 불멸의 군대가 격돌했다.

기병들은 훌륭했다. 말에 올라탄 채로 정확하게 검을 휘둘렀다. 좀비들은 머리가 잘려 나갔고, 군마는 말발굽으로 구울의 가슴을 치어 박았다. 그러나 이것은 목이 잘리고 가슴이 뚫린다고 해서 끝나는 전투가 아니었다.

머리가 사라져도 상체가 남아 도끼를 찍어내렸다. 가슴이 꿰뚫려도 이빨로 군마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젠장! 말에 뭐가 덕지덕지 붙잖아!”

녹장미 기사단은 출격하기 이전에 성녀의 축복을 받았다. 그렇기에 효과적으로 언데드 몬스터에게 대항할 수 있었으나, 시체 조각이 되어서도 달라붙어서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돌격을 이어나갈 수가 없습니다, 부단장!”

질풍과 같던 기사단의 돌격이 점점 느려졌다. 기사들은 악을 써가며 어떻게든 군마를 이끌었다. 하지만 좀비와 구울은 거머리처럼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군마들이 피를 흘려가며 한 마리씩, 빠른 속도로 쓰러졌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기사단은 완전히 정지해 있었다.

“전원. 하마해서 응전하라.”

부기사단장이 월도를 고쳐잡으며 명령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침통했다.

녹색 장미 기사단은 최선을 다하였다. 야밤에 장창병진을 돌파했다. 적진에서 돌격을 지속했다. 전방에 나타난 언데드 몬스터에게 거의 궤멸적인 피해를 입혔다. 그렇지만, 하고 부기사단장이 주위를 쓰윽 둘러보았다.

몬스터들이 삼면을 포위하고 있었다. 녀석들은 어느새 기사단의 지척까지 접근했다.

바르바토스가 기사단의 돌격을 멈춰세우는 동안, 파이몬과 마르바스가 포위진을 완성한 것이었다.

그 숫자는 어림잡아도 일만.

기껏해야 천 명에 지나지 않는 기병 전력, 그것도 돌격이 멈추어진 병사들이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구원군이 올 때까지 버틴다. 아니, 조금이라도 더 적병을 주살하라.”

“예!”

기사들이 호기롭게 소리쳤다.

한편, 부단장은 생각했다. 여왕 전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지 않겠지.

너무 깊숙하게 들어왔다. 이제 와서 구원군을 보내봤자 성공할지 말지도 미지수. 의미없는 소모전이 되어버린다……부단장은 죽음을 직감했다.

이곳이 마지막이다.

부단장은 여왕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그걸로 미련은 사라졌다. 그녀는 월도를 휘두르며 주저없이 몬스터들에게 뛰어들었다.

녹장미 기사단은 사천에 가까운 마물을 참살한다. 부단장을 비롯하여 기사단 칠백 명 전원이 전사한다. 이 놀랍고 장대한 최후에 대하여, 병법(兵法)은 비정하리 만치 차가운 문장으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기사단은 돌파에 실패하여 전멸했다.

그것은 여왕 앙리에타의 단기결전이 좌절했음을 의미하며.

“……전군, 전선에서 물러서.”

동시에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도하에 성공했다는 것을 뜻한다.

마왕군은 안전하게 강을 건넜다. 이후, 마왕군은 부교를 파괴하고 강줄기를 따라 진군했다. 군대를 도하시킬 방법이 없는 브르타뉴군은 마왕군이 행군하는 모습을 건너편에서 멀찍이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전쟁에 승패가 갈린 것은 아니었다.

녹장미 기사단을 비롯해서 꽤나 많은 숫자의 기병을 잃어버렸지만, 병력이 손상된 것은 상대편도 똑같았다. 오히려 전력비로 따지자면 브르타뉴가 근소하게 유리하겠지.

다른 한편으로 마왕 아가레스는 비록 결판을 짓지 못했으나 대지의 정령왕을 죽임으로써, 역시 유리한 입장에서 결투를 끝냈다.

이제 문제는 황도(皇都) 파리시오룸이 함락되느냐 마느냐였다.

파리시오룸에는 프랑크의 황제와 황태후가 남아 있었다. 절대로 그들을 빼앗겨서는 안 되었다.

“파리시오룸을 끝까지 방어하거나 적어도 황제랑 황태후를 탈출시켜야 하는데…….”

앙리에타가 전쟁의 피로에 감긴 채 중얼거렸다. 장군들이 침체된 분위기로 여왕을 둘러싸고 있었다.

“황제는 그렇다쳐도 황태후 그 깐깐한 할망구가 우리를 따라올 것 같지는 않아.”

“파리시오룸에서 농성전을 벌일 필요가 있군요, 전하.”

“무슨 소리야. 따라오지 않을 테니까 기절시켜서 납치해야지. 농성전 따위 우리에게 유리할 거 하나 없어.”

앙리에타가 한숨을 쉬었다.

“황제와 황태후를 납치한 다음 서쪽으로 퇴각하겠어. 적군은 보급로가 허술하니까 감히 추격해오지 못할 터. 그렇다고 약탈을 자행하면 명분이 사라지니, 꽤나 난감한 상황에 처할 거야.”

“퇴각입니까.”

장군들이 마뜩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결국 결전을 피한다는 얘기이지 않는가.

앙리에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퇴각은 수단일 뿐. 저놈들의 명분은 어디까지나 아가레스를 처단하자는 것이다. 우리쪽에 아가레스가 건재한 이상 쟤들은 마음대로 철퇴할 수가 없지. 보급로가 불안한 상황에서 철수하지도 못한 채 파리시오룸에 머물 거야.”

“과연. 식량이 없이 천천히 괴사하겠군요.”

장군들이 턱끝을 끄덕였다.

“그래. 어느 시점이 되면 참지 못해서 파리시오룸을 뛰쳐나올 것이고……그때 가서 우리는 다시 한번 회전을 강요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우선 파리시오룸에 별동대를 파견하여 황제와 황태후를…….”

어느 정도 작전이 수립될 무렵이었다.

서서히 새벽의 유리색이 하늘에 번져갔다. 밤하늘이 옅어지자, 전혀 예상하지 못하게, 파리시오룸이 위치한 방향에서 피어오르는 무언가가 목격되었다. 바로 새까만 연기 구름이었다.

“전하! 파리시오룸에서 연기가 나고 있나이다!”

장군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앙리에타 여왕이 이빨로 입술을 깨물었다.

“……프랑크의 귀족놈들, 감히.”

앙리에타는 적군이 유독 통신마법을 골라서 먹통으로 만들어버렸는지 이해했다.

단순히 기사단을 끌어들이는 유인책만이 아니었다. 파리시오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 수 없도록 간계를 부린 것이었다.

밤새도록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파리시오룸에서는 잔재 귀족들이 소란을 일으킨 것일까. 목적은 황제나 황태후, 어느 한쪽이라도 탈출시키는 것……혹은 두 명 모두를 탈출시키는 것, 그쯤인가.

“빌어먹을!”

앙리에타가 지휘봉을 두 쪽으로 부러트렸다. 만에 하나라도 황제나 황태후가 적군에 합류하면 말도 안 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것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만 한다.

“당장 전군을 몰아서 파리시오룸으로 향한다!”

브르타뉴군은 야간 전투의 피로가 가시기도 전에 다시금 전속력으로 행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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