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291화 (291/510)
  • 00291 꼭두각시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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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스부르크 제국군. 여기에 더하여 바타비아 공화국 및 자유도시 연맹.

    연합군적인 성격이 강한 군세였으나, 주지하다시피 그 내실은 약 삼만에 이르는 마왕군에 있었다. 마왕군의 핵심 전력은 언제나 오크였다. 돼지족[猪族]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마족들은 강인한 팔뚝과 용력을 타고났으며, 인간에 비해 1미터 이상 긴 장창을 너끈히 쥐어들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기사단의 일제 돌격을 어느 정도 상쇄했다.

    “물러서지 마라! 발걸음을 움직이지 마라!”

    마왕 제파르가 소리쳤다.

    “하나의 성벽이 되어 파도를 막는 것이다!”

    전(前) 서열 제16위이자, 평원파는 물론이고 마왕군 전체를 통틀어도 방어전의 귀재. 일찍이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기사단들의 무시무시한 돌격을 막아낸 지휘관은 다시금 눈부신 재능을 뽐냈다.

    ─ 크훌라, 크후릅!

    오크들이 우렁찬 함성으로 화답했다.

    전투가 격화되고 있었다.

    우익에서는 마왕 아가레스와 세 명의 마왕이 신화적인 결투를 재현했다. 말 그대로 언덕이 깎여나가고 대지가 파이는 싸움이었다. 아군도 적군도 감히 우익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감히 지켜보기에도 무서울 정도로 폭발이 난무해서, 제파르조차 그쪽에는 신경을 껐다.

    “벨레드와 시트리. 그리고 바싸고인가……믿는 수밖에 없다.”

    만에 하나, 우익이 뚫린다면 작전은 완전히 실패해버린다. 부사령관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짜놓은 작전 계획은 도미노처럼 섬세했다.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익이 버텨줘야만 했다.

    ─ 두그르륵, 두그닥, 그르륵!

    말발굽 소리가 저 멀리서 밀려오기 시작했다. 기사단이 또 다시 돌격하는 것이었다. 마족 부관이 말했다.

    “각하! 여섯 번째 돌격입니다!”

    “나에게도 눈과 귀가 있다. 얼마나 지났다고…….”

    제파르는 반쯤 어이가 없어서 신음했다.

    “브르타뉴의 기사단은 정녕 괴물이란 말이냐.”

    벌써 여섯 번째 돌격이 이루어졌다. 전투가 시작한 이제 겨우 한 시간. 비정상을 뛰어넘어 비상식이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군사의 운용이 신속했다.

    심지어 지금은 어두컴컴한 야밤이었다. 인간보다 마족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시간대였다. 그런데도 브르타뉴의 기마병은 광구(光球)에 의지하여 일사분란하게 돌격, 재돌격을 이루어냈다.

    이쪽도 질 수 없었다. 제파르가 마음을 다잡고 지휘봉을 휘둘렀다.

    “마법사 전대는 물을 뿌려라! 투창병, 투석병은 창과 돌을 아끼지 마라!”

    “존명!”

    마법사들은 기사들이 격돌해오기 직전에 대지를 축축하게 만들었다. 마력을 아껴야 했기에 일대를 늪으로 만들 수는 없었지만, 땅이 다소 물렁해지는 것만으로도 말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결국, 여섯 번째 돌격도 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다.

    ─ 케르르륵! 케륵!

    기사단이 빠지자마자 고블린들이 참호 바깥으로 뛰어나가 말뚝을 박았다. 흐물해진 땅바닥에는 말뚝이 손쉽게 들어박혔다. 이제 인간군의 마법사들이 기사단을 위해 땅을 건조하고 딱딱하게 만들어주면――역설적으로, 말뚝을 단단하게 고정시키게 되었다.

    반대편에서 앙리에타 여왕이 이를 보고 감탄했다.

    “대단하네. 땅을 눅눅하게 내버려두자니 돌격이 영 힘을 못 쓰고, 그렇다고 마법을 쓰자니 도리어 말뚝을 박아주게 되고……흐응.”

    앙리에타 여왕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처했다. 진퇴양난. 그렇게 표현해야 옳겠지. 여왕의 탄식에 근처에 있던 장군이 반응했다.

    “전하, 아군은 충분히 분발하고 있나이다. 피해도 거의…….”

    “없지. 알고 있어. 하지만 피해가 거의 없는 건 적군도 마찬가지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 쌍방에 피해가 없이 시간만 흘러가고 있다고. 그건 정확히 적군이 바라는 바이지.”

    아군이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하여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설령 피투성이 넝마가죽이 되더라도 목적을 달성하면 그것이 곧 승리이다. 그리고 적군은 도하에 필요한 지연전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범용한 지휘관이라면 이곳에서 시간을 끌어버리겠지.

    그러나 여왕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는 어느 의미에서든 결코 범용하지 않았다.

    “밀리안느.”

    “예, 전하. 분부를.”

    “녹색 장미 기사단의 저력을 믿어보겠어.”

    앙리에타 여왕은 전투가 개시하고 한 시간 만에 최강의 패를 꺼내들었다. 자타공인 대륙 최강이라 인정받는 기사단을 출격시킨 것이었다. 검주(劍主)만 두 명이 포함되어 있는 기사단은 여왕의 명령에 곧바로 말발굽을 들어올렸다.

    “브르타뉴의 후예들이여! 돌격하라!”

    “우리의 여왕을 위하여!”

    기사단이 마음껏 내달리도록 마법사들이 바람의 칼날을 쏘아보냈다. 칼날은 대지를 훑으며 땅에 박힌 말뚝들을 두 동강 내버렸다. 마력을 아끼지 않는 지원사격이었다. 그 마법을 목격한 마왕 제파르는 이빨을 씹었다.

    “녹장미 기사단인가……! 투창병!”

    제파르와 길고 긴 악연으로 얽힌 기사단이었다. 바로 저 기사단에게 제파르는 휘하의 오우거들을 모두 잃어버렸다. 그 복수를 지금에야 이루게 되었다.

    “마력을 아끼지 마라. 공격하라!”

    “하지만 각하, 벌써부터 그러면 결전을 위한 예비 마력이…….”

    “눈이 달렸다면 보도록!”

    제파르가 그답지 않게 흥분하며 일갈했다.

    “지금이 바로 결전이지 않은가!”

    그리하여 마왕군은 돌격해오는 녹색 장미 기사단을 향하여 마법을 쏟아부었다. 대지를 축축하게 만들었으며, 화염구를 쏘아보내었다. 제파르가 말한 그대로였다. 지금이 결전이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명확해졌는데, 인간군 역시 눈에는 눈이라는 듯이 아낌없이 마법을 난타했다.

    마흔 개의 화염구가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떨어졌다. 오크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는 찰나, 투명한 방어막이 펼쳐지면서 화염구를 튕겨냈다.

    마족의 지휘관들이 칼을 빼들고 고함을 질렀으며,

    “물러서지 마라! 물러서는 자에게 죽음이 있으라!”

    기사단의 고참 기사들이 랜스를 꼬나쥐며 소리쳤다.

    “돌파하라! 짓밟아라――죽음을!”

    그곳에 거대한 충돌이 있었다.

    창날과 칼날, 쇠붙이와 쇠붙이가 부딪치자 공기가 요란하게 떨었다. 붉은 피가 사방에서 난자했다. 말발굽이 오크의 얼굴을 짓밟았다. 투구는 두개골째로 바스라졌다. 장창이 기병의 가슴을 꿰뚫어 등가죽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크아아악! 크흐아아악!”

    “크후르, 크후프릅!”

    비명과 신음이 뒤섞여 폭발했다. 거기에는 인간의 언어도 없었으며, 마족의 언어도 없었다. 오로지 피범벅이 된 짐승의 포효만이 울려 퍼졌다. 군마는 사나운 이빨로 오크의 어깨살을 와락 뜯어물었고, 오크는 낙마해버린 기병의 내장을 송곳니로 찢어발겼다.

    “죽어! 크아아악, 죽으란 말이다!”

    “크프라하알라!”

    살점을 뜯어물은 자가 인간이든 마족이든 무슨 상관인가.

    무기들이 땅바닥에 우수수 내팽개쳐졌다. 쇠붙이들이 떨어져서 내는 쇳소리에 귓속까지 멍멍했다. 여왕의 명령에, 마왕의 명령에, 무엇보다도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겨야 마땅할 것들이 주저없이 생명을 불태웠다.

    눈과 귀가 멀어버린 그곳에서――.

    “진형을 유지하라! 크윽, 대열에서 벗어나지 마라!”

    “쉬지 말고 달려라! 돌격이다! 브르타뉴에 영광을!”

    기사단은 기어코 장창병진을 꿰뚫고 말았다.

    그 선두에는 검주(劍主) 마리안느 드 나제흐가 있었다. 금발의 여기사는 월도를 풍차처럼 휘둘렀다. 황색 오러가 밤공기를 가를 때마다 오크의 머리통이 튀어올랐다.

    “전군, 나를 따르라!”

    검주가 뚫어놓은 길목으로 열댓 명의 기사가 잇따라 내달렸다. 간신히 한두 명이 지나갈 것 같았던 길목은 순식간에 넓어졌다. 열댓 명이 뒤따르자 수십 명이 그곳으로 쏟아졌으며, 그리하여 수백 명이 휘몰아쳤다.

    방어선이 돌파당한 것이었다.

    희비가 엇갈렸다.

    “좋아, 바로 그거야! 근위 기사단! 돌격을 이어나가!”

    “제기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복구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앙리에타와 제파르가 동시에 소리쳤다. 여왕과 마왕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거칠게 지휘봉을 휘둘렀다. 하지만 최강의 창과 최강의 방패가 맞부닥친 이 순간, 틀림없이 여신은 창에게 손을 들어주었다.

    중앙 방어선이 양단되었다. 일순간이나마 한 부분에서 장창병들이 도륙당했다. 기사단의 군마들은 깊게 파인 참호를 손쉽게 껑충 뛰어넘었다. 홍수에 방죽이 무너진 것처럼 수백의 기마병이 쇄도했다.

    앙리에타 여왕이 승리를 직감한 이때.

    “제2차 방어선. 제3차 방어선.”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미소를 지었다.

    “――마음껏 돌파당하라.”

    부사령관이 내린 명령은 즉시 예하 지휘관들에게 하달되었다.

    제파르가 맡은 제1차 방어선과 달리, 제2차 방어선과 제3차 방어선에는 참호가 파이지 않았다. 단지 장창병들이 일렬로 여러 겹을 이루고 있었다. 이 방어선을 맡은 두 명의 군단장이 일제히 지휘봉을 올려들었다.

    “전군, 양옆으로 갈라지세요.”

    “기사단에게 중앙을 터주어라.”

    파이몬과 마르바스.

    두 군단장은 특출나게 지휘에 능숙하지 않았다. 공격에 있어서는 벨레드나 시트리보다 못할 것이고, 수비에 있어서는 제파르보다 떨어지겠지. 그러나 파이몬과 마르바스는 대부분의 마왕이 갖지 못한 장점을, 그것도 절대적인 장점을 두 개씩이나 지니고 있었다.

    ─ 크후르릅!

    ─ 케르르, 케륵!

    그들이 서열 제5위와 서열 제9위에 해당하는 최고위 마왕이라는 사실.

    단탈리안은 기껏해야 수십 명의 마물에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 하지만 두 명의 마왕은 수천 명에 이르는 마족에게 자유자재로 명령을 내렸다. 단순한 말 한 마디에, 별다른 전령과 지휘조차 필요없이, 거대한 부대가 움직였다.

    두 번째 장점은, 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이 사병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있다는 것.

    파이몬과 마르바스는 단 한번도 아군을 버린 적 없었다. 보급선이 끊겨 전군이 배고픔에 시달렸을 때도, 적지에 고립되어 필사의 행군을 이어나가야 했을 때도, 두 군단장은 병사들과 함께 모든 고난을 함께 겪었다.

    진정한 지도자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자신을 입증한다. 그런 의미에서, 파이몬과 마르바스는 특출난 군사 지휘자가 아닐지언정――전 마족의 지도자임에 분명하겠지.

    병사들에게 직접 전달되는 명령. 병졸들이 한점의 의심없이 명령을 따르게 만드는, 절대적인 신뢰.

    두 가지 요소가 작용함으로써 군단장들은 사령부가 내린 지시를 더없이 훌륭하게 이루어냈다.

    “……!”

    홍해가 갈라지듯 제2차 방어선과 제3차 방어선의 병력이 둘로 나뉘었다.

    이미 기세가 올라버린 기사단은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그대로 달려나갔다. 여기서 멈춰버리면 장창병들에게 둘러싸여 협공당할 따름이었다. 녹색 장미 기사단은 적군의 사령부를 향해서 직진했다.

    “안돼! 함정이다!”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본 앙리에타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주변의 장군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겉으로 지켜보기에는 기사단의 돌격에 지레 겁을 먹은 나머지 방어선이 저절로 붕괴된 형세였으므로.

    “전하. 돌파가 성공했나이다. 나머지 방어선들은 도망치고 있지 않습니까. 이대로 적군의 사령부를 참살하고 교두보를 공격하면…….”

    “저게 어딜 봐서 '도망치는' 적병의 움직임이야! 나제흐 경한테 당장 명령해!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철퇴하라고!”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앙리에타 여왕은 적군의 움직임을 정확히 꿰뚫어보았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적군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했는데도 본능적으로 철퇴해야 한다는 사실까지 깨달았다.

    “전하, 송구하오나…….”

    그러나 깨달았다고 해서 승리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통신 마법이 반마법에 방해를 받아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뭐? 무슨 소리야, 지금도 저렇게 마법들이 휘황찬란하게 오가는데.”

    “송구하옵니다. 통신 마법만 이 일대에 작동하지 않는 듯합니다.”

    앙리에타가 눈썹을 찡그렸다.

    “일대 전부에 간섭할 만큼 강력한 반마법이 펼쳐져 있는데……겨우 통신만 차단했다고?”

    “예. 송구하오나.”

    “누가, 그런 말도 안 되게 비효율적인 짓거리를.”

    앙리에타가 입을 서서히 벌렸다.

    그녀가 고개를 휙 돌려서 전방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앙리에타가 지휘봉을 꾸욱 쥐었다. 반마법을 펼칠 수 있었다면 당연히 통신뿐만이 아니라 각종 마법을 차단해야 옳았다. 어차피 차단하는 것, 아예 이쪽의 마법전력을 묶어두면 훨씬 더 이롭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적군은 오직 통신만을 끊었다.

    마치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을 충분히 깊숙한 곳까지 끌어들이려는 것처럼.

    “죽음의 기사들이여.”

    정 반대편. 마왕군의 사령부에는 금발의 여인과 장신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중 여인, 라우라 데 파르네세라 불리는 인간이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기사단의 돌격을 막아세워라.”

    그 순간, 사백 개의 대검들이 대지에서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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